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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는 전주이씨(全州李氏) 22세 고려 충신 이연계대흥이씨(大興李氏)는 이연계(李連桂: ~1407년10월13일,대흥군 大興君)를 시조로 받든다.시조 이연계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22세(世)에서 분적했다.문헌에 따르면 이연계는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예문관은 고려때부터 임금의 교서를 짓던 관청이며 정3품)을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에 이르렀다. 그는 태조 이성계와 6촌(재종)간 임에도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절의를 굽히지 않고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반대하였다.상서(尙書:정3품장관) 이연계(李連桂)는 이선흥(李善興,유일 遺逸)의 아들이며 함성대군(咸城大君) 이응거(李應巨)의 손자이다.태조 이성계와는 재종간(6촌)이며참고로 고려 무신 최고실력자였던 이의방(李義方, ~1174,위위시경,위위시(衛尉寺)는 서기 995년(성종14)부터 명칭을 사용하였으며,왕의 행차를 호위하는 데 필요한 의장(儀仗)과 기물(器物) 등의 관리를 맡아본 현재의 청와대 경호실장이며 경(卿)은 종3품 대장군(大將軍)임)의 친동생 이린(李麟)이 6대 할아버지이다이린의 둘째 형 이의방은 전주(全州)이씨로 1170년(고려 의종 24) 견룡행수(牽龍行首:견룡행수는 고려때 국왕의 숙위 및 의식을 담당한 숙위군의 대장으로 대전.동궁의 숙위를 담당하고 태묘의식 등 각종 의식에 참가하였고 의장에도 시종하였으며 행수.산원등의 직제가 있는 비록 말단의 무관직이었으나 국왕과 가까이하여 총애를 받자 권문세가 자제들로 자리를 맡아옴)로서정중부(鄭仲夫).이고와 함께 무신난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뒤에 대장군(大將軍:종3품).전중감(殿中監) 겸 집주(執奏)가 되어 벽상공신(壁上功臣공신벽에 초상을 그려넣은신하)에 책록된 고려무신정권 최고실력자였다.같은 동료인 이고가 정권을 마음대로 하려 하자 1171년(명종1) 그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중방(重房)을 강화하여 무신(武臣)들을 끌어들이는 한편,원래 문신들이 임명되었던 지방관에 하급 무신을 임명하여 그들을 회유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서기1174년 조위총 토벌을 위한 두번째 토벌군이 출동한 가운데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과 승려 종참(宗 )에게 살해되었으며,좌승선(정3품)인 형 이준의(李俊義)를 비롯하여 동생 이린,같은 세력인 고득원(高得元) 등이 이때 죽었다.이의방은 4남1녀의 형제 가운데 둘째로 형은 이준의로 좌승선(왕명을 출납하던 정3품)이었고,동생인 셋째는 이린(李麟 또는 璘),넷째는 이거,막내가 여자누이 였다.이린(李麟)은 <목.익.도.조.환조> 가운데 목조(穆祖)의 할아버지이며 이린의 아들이 이양무(李陽茂)이고 이양무는 목조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 이다.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濬慶墓)는 이안사의 아버지 이양무의 묘다.이연계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을 끝까지 반대한 3명(이성계 큰형 이원계,완풍대군,큰아들 이방우) 가운데 한사람이라고 한다.이연계는 포은(圃隱) 정몽주,목은(牧隱)이색과 같이 고려조에 충절을 지켰고 고려가 멸망하려 할 때 선죽교에서 일어난 화(禍)를 탄식하였으며 이성계가 등극하던 날 말고삐를 끌어당기며 즉위하지 말고 함흥으로 돌아가라고 만류하였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최영장군과 친히 지내다가 최영이 순절(나라위해 목숨버림)한 후에는 나라의 은혜에 보국하겠다는 일념으로 차라리 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겠다고 다짐했는데결국 이태조의 즉위를 반대한것으로 조준(趙浚)등의 참소(讒疏)와 간계에 몰려 양양(襄陽:경북 예천군)으로 유배되었다.이연계의 높은 절의를 가상히 여긴 태종은 1403년 귀양을 풀어주면서 대흥군(大興君)으로 봉하였지만 봉군을 마다하고 대흥땅(충남 예산군 대흥면)을 떠나 다인 고현(경북 의성군 다인면)으로 이주하여 살았다.대흥군은 고려를 구하지 못한 망국지신을 자처하며 학식과 재덕을 스스로 감추어 갈포베옷만 입고 지내다가 1407년(태종7)10월13일 일생을 마치고 다기산 묘좌(卯坐:동향에서 서향)에 묻혔으며 순천 장세호(張世鎬)가 묘갈문을 지었다. 대흥이씨는 자손이 희소하였음에도 최근에 크게 정화하였고 수호의 열성이 대단하다.이연계는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내 자손은 반드시 대흥(大興)으로 관향(貫鄕)을 삼을 것이며, 내가 죽은 후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쓰지 말라"고 하였으니 그 유지(遺志)는 곧 고려를 구하지 못한 죄인의 글은 내세울것이 못된다는 절의정신을 일깨워 준 것이다.대흥군 이연계의 부인은 개성왕씨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종1품 수상)을 지낸 왕영(王泳)의 딸로 3형제를 두었다.큰아들 이손귀(李孫貴)는 고려조에서 용주부사(龍州府使:정3품)를 역임하였으나 조선 건국후에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양양(襄陽)에서 절의를 지키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후손은 경북 의성 부사공파(府使公派)와 황해도 평산 청헌공파(淸軒公派)이다.둘째 아들 이손정(李孫禎)과 셋째아들 이손현은 대흥으로 돌아갔으며, 둘째아들의 후손은 평북 박천 초산의 송재공파(松齋公派)이고, 셋째아들 좌찬성(左贊成,시호 충숙)이손현(李孫賢)의 후손은 전남 담양과 경기도 강화의 충숙공파(忠肅公派)이다.시조의 묘소는 경북 의성군 다인면 송호리 다기산(多岐山)이며 음력 10월 13일에 향사(제사)를 올린다.대흥(大興)은 충청남도 예산군에 있는 지명으로,명종2년에 감무(監務:작은 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었다. 1895년에 승격하여 군(郡)이 되었고,1914년 예산군에 병합되었다.대흥이씨의 주요파(派)는 상서공파(尙書公派),청헌공파(淸軒公派),송재공파(松齋公派),충숙공파(忠肅公派)등이며,주요세거지는 1930년대에는 평북 박천군 청룡면 일화동(一和洞)과 의주군 고관면(古館面)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杏村里),황해도 연백군 모단면(牡丹面) 창덕리(彰德里),평북 초산군 고면(古面) 일원에도 많이 살았다.세 명의 아들 중 큰아들은 예천(醴泉)에 머무르고 두 아들은 대흥(大興)에 돌아왔는데, 유서를 남기기를 "우리 자손은 반드시 대흥(大興)으로 본관을 삼으라"하였다고 한다.기록에 의하면 대흥이씨를 전주이씨로 복원하라는 임금의 전교(傳敎)에 의해 일부의 후손들은 전주이씨로 돌아갔으나,대부분후 손들은 이에 불응하고 시조의 유언에 따라 본관을 대흥(大興)으로 하였다고 한다.시조 이연계가 남긴 시편(詩篇)이있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다 소실되어 미궐시(薇蕨詩) 한수만 암송되어 왔는데,"아득히 하늘이 비 이슬 내리는 봄을 열었음을 생각하니천년된 고사리는 누구를 위하여 새로피는가.수양산 아랫 길을 지나지 마라.백이(伯夷)는 응당히 죽지 못한 사람을 비웃으리라.면상천개우로춘(緬想天開雨露春) 천년미궐위수신(千年薇蕨爲誰新)막과수양산하로(莫過首陽山下露) 백이응소미망인(伯夷應笑未亡人)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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