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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옹씨(邕氏)는 옥천옹씨(玉川邕氏)와 순창옹씨 등 2본관에인구는 2000년에는 772명으로 조사되었으나, 옥천옹씨(玉川邕氏)단본이다.옹씨(邕氏)는 순창옹씨(淳昌邕氏)를 비롯하여 옹씨 본래의 본관은 옥천(玉川:순창 옛지명)이다. 그러나 1930년 조선총독부의 국세조사에서 본관을 기록할 때, 일족 중의 일부가 [옥천]에서 바뀐 지명인[순창]으로 본관을 등록함으로써, [순창옹씨]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결국 옥천.순창 두 본관은 동일한 본관이며,족보에서 두 본관을 구분하지 않고,함께 기재하고 있다. 한편 조사에 나타난 거창옹씨(居昌邕氏)도 일제강점기인 1930년 실시된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서,당시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신고함으로써 기록되었다.파평옹씨(坡平雍氏) 또한 그때의 국세조사에서 경남 창원에 8가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이는 옹(邕)의 한자를 잘못 기록함으로써 생겨난 성씨로,옹(雍)씨는 옹(邕)씨의 분적 종이라 할 수 있다.옹씨(邕氏)는 고려시대에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국방장관)를 지낸 옹희태(邕羲泰)를 비조(鼻祖:처음 시조)로 받들고,옹경성(邕慶星).옹의성(邕義星).옹명정(邕命廷)등 여러 상계(上系) 조상들이 고려가 망하고,조선이 개국할때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둔하거나 성(姓)을 감추고 있었다고 한다.이 과정에서 모든 가승과 종적(宗籍)이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사적이나 묘지를 알 수 없게 됨)되었다고 한다.순창옹씨(淳昌邕氏,옥천옹씨)순창은 전라북도 남쪽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고려 때에는 순창현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1314년(충숙왕1) 군(郡)으로 승격,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군(郡)으로 삼았다. 옥천(玉川)은 순창의 별호(別號)이다.인구조사에 따르면 순창옹씨는 1985년에는 총 56가구에 271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총 105가구에 353명이었다.순창옹씨(淳昌邕氏)의 시조는 고려때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국방장관)를 지낸 옹희태(邕羲泰)로 전(傳)하며,판관(判官:수령의 지휘받아 사법.행정업무담당하던 종5품)을 지낸,옹몽진(邕夢辰)을 중흥조(中興祖)로 받들고 있다. 그후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사적이나 묘지를 알수없게 됨)되어,후손들은 옹명정(邕命廷)의 아들 옹은(邕誾)을 1세조(一世祖)로 하고,선조(先祖)의 세거지(世居地)인 순창(淳昌:옥천의 옛 지명)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옹몽진의 증조부 옹은(邕誾)을 1세조로 받들며, 새로이 세계(世系)를 세우고, 2세조 옹식(邕湜),3세조 옹은운(邕殷雲),4세조 옹몽진(邕夢辰)으로 하여 이후에는 누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고 가문이 영달하여,옥천지방(玉川地方:순창지방)에서는 명문(名門)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옥천옹씨(순창옹씨)는 1629년(인조7)에 족보인 [기사보]를 발간한 뿌리깊은 가문으로,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3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1명 등 총 6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옥천옥씨의 관향인 옥천(玉川)는 전북 순창의 옛 지명으로 순창옹씨라고도 한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옥천옹씨는 2000년에는 총 120가구 407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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