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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씨

    위(韋)

    문중

  • 유래

    우리나라 위씨(韋氏)는 강화위씨 단본으로, 강화위씨는 경기도 여주가 집성촌이며,1985년에는 351가구에 1,443명이었고, 2000년에는 597가구에 1,805명이었다.문헌에 의하면,위씨(韋氏)는 중국 경조(京兆)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팽조(彭祖)의 손자가 위(韋)땅에 봉(封)해지자,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우리나라 위씨는 강화위씨(江華韋氏) 단본으로,강화는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입때와 조선시대 병자호란때는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였고,수도의 관문에 위치해서 근세에 이르러서는 188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1875년의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 등 역사적인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우리나라 위씨(韋氏)는 중원(中原)출신인 위수여(韋壽餘: ~1012,시호는 안공)가 서기960년(광종 11)에 고려에 귀화하여,고려조에서 사선관(司膳官: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옹원과 같은 관아의 벼슬)을 거쳐,목종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부의 정2품부총리)에 이르렀으며, 현종초에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그만 둠)를 상소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고 하며, 후에 궤장( 杖:나라에 공이많은 70세이상의 원로대신에게 왕이 내리던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 받은 후,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그는 상주국(上柱國:정2품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에게 주던 국가 최고 훈호)으로 강화백(江華伯:훈작을 받을 때는 개국백 이었음)에 봉해졌고, 죽은 후에 내사령(內史令:내사문하성의 종1품 벼슬로 대개 문하시중을 지낸후 임명됨 중서령으로 고침)에 추증되었다.그의 후손들이 식읍(食邑: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리어 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으로 하사받은 강화(江華)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그 후 시조의 후손 위근영(韋瑾英)이 고려 인종때 소감(少監:감 다음의 4품에서 5품)을 역임했으며, 위원(韋元)은 몽고의 내침으로 강화에 천도하는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모시고 따르던 일) 하였으며,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 등의 정2품 부총리)에 이르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위득유는 충렬왕때 대장군(大將軍:종3품)으로 도원수(都元帥:전쟁시에 군무를 통할하던 임시 무관직) 김방경(구안동김씨 중시조)과 함께 왜국 정벌에 참여한 명장이었다.조선시대에는 의령현감.인동현감(縣監:종6품 수령)을 거쳐,인천부사(仁川府使:정3품수령)를 역임한 위조(韋組)가 간신들의 모략으로 평안도 영유에 유배되었다가,그 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자 그를 낙향시조로 삼고 1세조로 받들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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