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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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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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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숭조는 경사(經史:경서와 사기)에 통달 도학정치 실현하려는 최초의 학자문하에 정암 조광조 등 대학자 배출 소북파의 영수 영의정 류영경 배출전주류씨(全州柳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류혼(柳渾) 류습(柳濕) 류지(柳池)를 각각 파조(派祖)로 삼아, 충숙공파(忠肅公派).장령공파(掌令公派).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지며, 파(派)에 따라 시조를 달리한다.만성보(萬姓譜)등에는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을 시조로 하고 있으나, 류혼(柳渾).류지(柳池)를 시조로 받드는 파(派)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고 한다.완산백(完山伯) 류습의 묘는 전북 완주군 고산면 율곡리에 있다. 관향인 전주는 1392년(태조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유수는 2품지방장관)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3)에 전주부로 개칭되어 조선시대동안 유지되었다.1895년(고종 32) 전주부 전주군이 되었고, 1935년 전주면이 부(府)로 승격하여 독립하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인구조사에서 전주류씨는 1985년에는 총 11,365가구에 47,383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9,008가구 61,650명이었다.전주류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급제자 100명을 비롯하여,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17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47명, 의과 2명 등 366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1. 관향(貫鄕) 전주(貫鄕全州)의 연혁(沿革) 전주류씨의 관향(貫鄕)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도시(都市)로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에서 유래하며, 백제(百濟) 때는 완산(完山), 비사벌(比斯伐) 등으로 불리었고, 신라 진흥왕18(557)년에 완산주로 되었으며, 그 후 경덕왕15(756)년에는 완산주의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다. 신라 효공왕4(900)년에 견훤이 후 백제를 세워 40여 년간 이곳 완산주를 도읍지로 하였고, 고려 태조19(936)년에 태조가 이곳을 점령하여 안남도호부라 하였으며, 태조23(940)년에 전주로 되었다. 그 후 승화절도안무사, 전주순의군절도사, 안남대도호부, 전주목을 거쳐 공민왕4(1355)년에 완산부로 되었다. 조선시대 태조1(1392)년에 선조(先祖)의 고향이라 하여 완산부로 개칭하였고 태종3(1403)년에 다시 전주부로 되었으며, 여러 번 변천을 거쳐 1949년에 전주시로 개편되었다. 2. 전주류씨(全州柳氏) 류습(柳濕)파의 유래(由來) 전주류씨 연원(淵源)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일본(日本)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요청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축(建築)하러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류중광(柳重光)은 본관이 전주(全州)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전주인(全州人)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는 증조부가 신라 때 각간(角干) 벼슬을 한 류기휴(柳基休)라고 하였으며, 그 계대가 고려사에 고려말 류능(柳能)의 가문(價文)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전주류씨는 고려 왕건(王建) 때 창성(創姓)된 문화류씨(文化柳氏)보다 훨씬 앞서 백제 때 창성(創姓)된 성씨(姓氏)인데 문화류씨 측에서 족보에 류양재(柳良梓)를 전주류씨의 선조(先祖) 또는 시조(始祖)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고려말에 문화류씨 류경(柳璥)은 전주류씨 류능(柳能)의 가문(家門)을 몰락시킨 분이며, 이 류경은 전주류씨의 선조(先祖)하는 류양재의 당숙이다. 그런데 문화류씨 측에서 전주류씨를 몰락시킨 류경의 당질(5촌조카) 류양재가 전주류씨 시조 습(濕)의 증조부라고 한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문화류씨 류경 등에 의하여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의와 함께 측근인 류능이 피살(被殺) 당하자 류능의 일족(一族)은 역적(逆賊) 가문(家門)의 누명을 쓰고 전주로 낙향, 은둔(隱遁)하여 비참(悲慘)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학문(學文)을 배우지를 못하여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한편 효종3(1652)년에 창간한 임진보(壬辰譜)에는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分貫說)을 기록하고 있으나 전주류씨 4번째 병자보(1876년)에는“전주류씨보계변증문”을 싣고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 아닌 토성(土姓) 전주류씨라 하였으며, 미완성 갑자보(1924년)에는 반증문을 싣고 전주류씨는 문화류씨 계열이라 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명종20(1565)년에 발간한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서문(序文)에 전주류씨 분관설(分貫說)이 없고, 또한 본문에서도 전주류씨 시조라는 류양재(柳良梓)는 직함(職銜)도 없고 무후(无后)인데 후에 편집한 족보에는 전성군(全城君)이라는 군호(君號)를 가필(加筆)하고 전주류씨 시조를 증손자로 하였다. 한편 2008년 문화류씨족보에 류양재의 큰아들을 방직(邦直), 작은 아들을 방헌(邦憲)이라 하고, 방헌의 주기(註記)에는 高麗惠宗甲辰生穆宗朝禮部侍郞己酉卒(고려혜종갑진생목종조예부시랑기유졸)이라 기록하였다. 즉,“류방헌은 고려 혜종1(944)에 태어나 목종 때 예부시랑을 하고 목종12(1009)년에 별세하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1009년에 별세한 류방헌을 1250년 전후 사람인 류양재의 둘째아들로 하였으니 누가 보아도 족보를 짜마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전주류씨가 이를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호류씨 측에서는 차원부설원기를 위작(僞作)이라 하여 중국의 황제(黃帝)로부터 차(車)씨, 문화 류(柳)씨로 이어지는 계보인 원파록을 족보에서 삭제하고 문화류씨는 연안차씨와 관련이 없다고 하는 여건 속에서 우리 전주류씨 문헌에는 없는, 문화류씨측에서 발행한 종덕지에 나오는 혼(渾), 습(濕), 지(池)를 류양재의 증손자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주류씨는 신라(新羅) 때부터 이어온 토성설(土姓說), 문화류씨로부터의 분관설(分貫說) 모두 확증(確證)할 문헌이 없어 시조(始祖) 선대(先代)의 계대를 이을 수 없다. 순종2(1908)년 홍문관(弘文館)에서 간행한 증보문헌비고정오(增補文獻備考正誤) 제계고(帝系考)에는“전주류씨 시조 습(濕)은 완산백(完山伯)이다”라하고 그 상계(上系)는 밝히지 않고 있다. 따라서 시조 완산백 습(濕)의 상계(上系)는 문화류씨분관설(文化柳氏分貫說)이나 토성설(土姓說)을 향후 각파 종중에서 각종 문헌(文獻)이나 금석문(金石文) 등에 사용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첨언(添言)할 것은 전주류씨는 3개 파가 있는 것이다. 즉, 습(濕), 혼(渾), 지(池)를 각각 시조로 하는 3개 파이다. 여기서 혼(渾)파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한 전주인(全州人) 류방헌(柳邦憲) 묘지명(墓誌銘)에 증조부로 기술한 신라 때의 각간(角干) 류기휴(柳基休)를 비조(鼻祖)로 하고 혼(渾)을 시조(始祖)로 하여 족보를 발간하였는데 시조 혼(渾)의 상대(上代) 계대(系代)를 부친(父親)과 조부(祖父) 2대(代)는 성함(姓銜)을 실전(失傳)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주류씨 시조 완산백(完山伯) 류습(柳濕)의 생몰년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사위 대제학(大提學) 심효생(1349∼1398)이 고려 충정왕1(1349)년에 출생한 기록으로 보면 전주류씨는 약 7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577년 묘갈문에 의하면 시조(始祖) 습(濕)은 슬하에 5남1녀를 두었는데 큰아들 극강(克剛), 둘째 아들 극서(克恕), 넷째 아들 극제(克濟) 및 사위 심효생(沈孝生)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셋째 아들 극수(克修)와 막내아들 극거(克渠)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따라서 고려 때 세 아들이 문과(文科)에 급제를 하면 나라 법에 따라 부모에게 벼슬을 주게 되어있어 시조는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掌令)에, 시조비(始祖?) 전주최씨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증되고, 조선 초에 이르러 시조(始祖)의 따님인 심효생의 부인 류씨(柳氏)가 정경옹주(貞慶翁主)가 되었기 때문에 시조는 완산백(完山伯)에, 시조비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봉(追封)된 것으로 보인다. 시조 류습(柳濕)의 아들 5형제 중 둘째인 극서(克恕)는 고려 말기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지제교(知製敎), 연안부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빈(濱)은 조선 초기에 영흥부사를 하였다. 빈(濱)의 아들 경손(敬孫)은 해주 판관을, 의손(義孫, 회헌공)은 세종 때 이조ㆍ예조참판을 하였고, 말손(末孫)은 순창 군수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다. 경손(敬孫)의 손자 숭조(崇祖)는 18년간 성균관에 재직하며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말손의 셋째 아들로서 회헌공[의손]의 양아들이 된 계동(季潼)은 충무위 부사직을 역임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계동(季潼)의 큰아들 식(軾)은 인천도호부사를 지내고, 막내아들 곡(?)은 전라도 고산현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여 고산현 율곡리에 있는 시조 묘에 5대봉사(奉祠)의 기틀을 마련하여 모시도록 하니 오늘날 많은 자손들의 조상숭배에 귀감이 되었으며, 식(軾)의 큰 아들 윤덕(潤德)은 중종 때 대사헌, 예조 참판, 한성 우윤(右尹) 등을 지냈다. 말손(末孫)의 손자 헌(軒)은 간신배의 방자함을 탄핵하는 상소(上訴)를 올리자 화가 난 연산군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사간원을 없애버리니 연산군(燕山君) 시대의 마지막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헌(軒)의 아들 세린(世麟)은 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조광조를 구제하는 상소(上疏)를 하였으며, 증손 영길(永吉)은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경(永慶)은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워 전양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이 되어 부친 의(儀)도 전릉부원군이 되었다. 한편 묵계공 복립(復立)은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치 않았는데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던 외숙 경상 우감사 김성일(金誠一)을 따라가 참모 역할과 함께 수문장(守門將)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진주성이 왜적(倭敵)에게 함락되어 순절(殉節)하였다.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크게 공을 세운 조생(肇生)은 호성공신으로서 부친, 아들, 손자 4대가 봉군(封君)의 교지(敎旨)를 받았다. 인조 때 전창군(全昌君)에 봉해진 영의정 영경(永慶)의 손자 정량(廷亮)은 사은사(謝恩使), 진향사(進香使)로 청나라에 3번 다녀왔고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으며, 전창군의 부친 열(悅)은 전원군에, 송설체(松雪體) 글씨에 능한 전원군 아들 심(?)은 참판으로서 전평군에 봉해져 5대가 봉군(封君)이 되었다. 영성(永成)의 셋째 아들 질(秩)은 인조1(1623)년에 알성급제(謁聖及第 )알성급제(謁聖及第) : 조선 시대에 임금이 성균관 문묘에 참배한 후에 치룬 과거 시험에 합격한 것을 말한다.하여 병자호란 때 철원부사로서 청병에 맞서다 전사(戰死)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청백리(淸白吏) :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 근검, 도덕, 경효, 인의 등의 덕목(德目)을 겸비한 조 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로서 의정부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다.에 오른 경창(慶昌)은 사마시,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대사간에 이르렀다.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내고 제자백가와 천문에 정통한 정원(正源)은 병률(兵律)과 도학(道學)에 능통하여 삼산문집(三山文集)과 하락지요(河洛指要)를 지었고 영순(永詢)은 경상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안동의 기봉공[복기]과 함께 실전(失傳)된 직제학공[극서] 묘소를 찾아 묘비를 세웠다. 영변부사를 지낸 정양(鼎養)은 문장이 뛰어나 고양시와 용인시에 있는 묵계공 비문을 비롯하여 여러 문중 선조(先祖)의 비문을 지었다. 정조 때 춘관지(春官志) 등을 편찬한 의양(義養)은 승지(承旨)가 되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집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홍주목사로 선정(善政)을 베푼 의(誼)는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완(玩)은 무과(武科)로 참령(參領)을 하였고, 정(珽)은 문과로 교리(校理)를 지냈다. 언론인이며,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인 근(瑾)은 구한말(舊韓末)에 탁지부(度支部, 재무부) 주사(主事)를 하고 장지연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5대 황성신문사장이 되었다. 또한 대종교대종교(大倧敎) : 단군(檀君)을 교조로 하는 민족 고유의 종교.와 광문회(光文會)광문회(光文會) : 국민계몽 활동과 애국적인 독립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새로운 지식을 널리 전하 고자 1910년에 설치된 한국고전(韓國古典) 간행기관.사업에 종사하였고, 휘문의숙장[교장], 중앙학교장을 하였으며, 3ㆍ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는 양기탁과 함께 고문이 되었고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독립운동가인 임(林)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인식(寅植)은 민족운동가ㆍ교육자로 활약하였고, 영(瑛)은 해방 후 대법관을 지냈으며, 기수(驥秀)는 용인군 제2대 국회의원을 하였고 그의 손자 기홍(基洪)도 제17, 1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편 치송(致松)은 제6, 9, 10, 11, 12대 국회의원을 하고 민주한국당 총재를 지내었다. 청(靑)은 전주고등학교장을 거쳐 제4, 5, 6, 8대 국회의원을 하고 전주류씨 문중에서 운영하는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으며, 기정(琦諪)은 제8, 9대 국회의원, 중소기업협동조합회장을 하였다. 전주류씨는 1360년경에 관향(貫鄕)인 전주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대를 거듭할수록 크게 번성하여 점차 인근으로 세거지(世居地)를 확대해 나가 그중 일부는 관직을 따라 서울과 파주, 의정부, 광주, 이천, 용인 등 경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한편 영의정 영경(永慶)이 광해정변(光海政變)에 휘말려 일족이 화가 미치자 장단, 평창, 음성, 임실, 진주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강원감사를 지낸 계반(季潘)의 일부 자손들이 임진강변과 황해도, 강원도 내에 널리 퍼져 살게 되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주류씨는 남한에 61,650명[19,008가구]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전주류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개파 즉, 혼(渾)파, 습(濕)파, 지(池)파가 있으므로 습(濕)을 시조로 하는 전주류씨는 이보다 약간 적을 것으로 본다. <작성 : 全州柳氏 23世 墨溪公后 柳基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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