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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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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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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에 통달 한 바둑애호가 임진왜란때의 정승 서애 류성룡안동 하회마을 한집에서 불천위제사 셋 탄생풍산류씨(豊山柳氏)의 시조는 류절(柳節)이다. 시조 류절은 고려초에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낸 인물로 류차달의 13세손이며, 풍산류씨는 류차달을 시조로 받드는 문화류씨에서 분관했다고 한다.풍산류씨세보(豊山柳氏世譜)에 의하면,류절(柳節)의 증손 류백(柳伯)이 고려 충렬왕 때 은사(恩賜:왕이 신하에게 내려줌)로 급제하여 가문의 기틀을 세웠으며,시조의 7세손 류종혜(柳從惠)가 조선초에 공조전서(工曹典書판서로 바뀌기전의 정3품 장관 사도공(司徒空)이라고도 함)를 역임하고,낙향하여 하회동(河回洞)에 정착하였다고 한다.문헌에 따르면, 모든 류씨(柳氏)는 문화류씨에서 분적되었다는 설에 따라 풍산류씨도 문화류씨에서 분관된 것으로 짐작하여 왔으나, 분적년대나 문화류씨와의 서차(序次)관계가 불분명해 4백여년동안 의문으로 내려온다고 한다.결국 풍산류씨가 문화류씨에서 분적했다는 "설"은 있지만 확실하지가 않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이어져 온 '설(說)'에 따른 자료를 바탕으로 풍산류씨의 연원을 정리한다.한편 무오(戊午) '서애종파(西厓宗派)' 서문에는 풍산류씨(豊山柳氏)는 선대의 계대(系代)가 중절(中絶:중간이 실전됨)하여 '기송(杞宋)이 무징(無徵)하다'고 하였고, '무인보 戊寅譜' 서문에는 풍산(豊山)은 영가(永嘉)의 대현(大縣)으로 그곳 토성(土姓)으로 조선초에 류씨(柳氏)가 세거하였는데, 바로 풍산류씨(豊山柳氏)라는 귀절이 있다.풍산류씨 시조 류절(柳節)은 문화류씨 "병진보 丙辰譜"에 의하면, 고려 고종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 부총리)를 지낸 유소(柳韶)의 증손자라고 하며, 그의 할아버지인 류평(柳坪)도 판밀직사(判密直事:고려시대에 정령을 출납하고 군기를 맡아보던 밀직사의 벼슬)를 지냈다. 풍산류씨는 7세손 류종혜(柳從惠)가 공조전서(工曹典書:고려때 산림.건축.야금.도예등을 관장한 관청의 정3품 장관으로 현재의 산림청.건교부 기능)에 오른 후 비로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명신 류성룡(柳成龍)에 이르러 크게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들날림.입신출세)하였다. 시조 이하 현재까지 21세가 내려오는데 59개 분파로 나위어져 있다.풍산류씨 12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 )은 류성룡(柳成龍)의 아버지로 중종 35년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보던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장령(掌令: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 부부장검사)을 거쳐 황해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도지사)에 이르렀다.역시 12세인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은 중종 39년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던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예문관에서 사초를 맡아보던 정9품)과 정자(正字:홍문관.교서관.승문원의 정9품)를 지냈다.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을사사화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했던 정적 숙청 사건)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명종6년 다시 기용되어 회인현감(縣監:종6품수령)이 되고, 그후 정주목사(牧使정3품수령)와 종성부사(府使정3품수령) 광주목사(牧使:정3품)를 지냈다.선조1년에는 호조참판(戶曹參判:종2품 차관)으로 성절사(聖節使:중국 황제나 황후의 축하사신)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사헌부의 종2품 현재의 검찰총장)을 거쳐 평안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가 되었다. 저서에 <귀촌집(龜村集)>이 있다.파산(巴山) 류중암(柳仲淹)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문장(文章: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줄거리를 세워 글자로써 적어 나타낸것.글발)과 행의(行誼:행실이 올바름)가 고명했으나, 30세에 요절하여 이황 문하의 안연(顔淵:안회,기원전 521~기원전490년,노(魯)나라의 현인으로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였다. 은군자적인 성격으로 “자기를 누르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지킴)이란 칭호를 받았다.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시호 문경)은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으로 선조5년에 음보(蔭補: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게되는 일)로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전함사는 조선때 서울과 지방의 선박.군함의 관리를 맡아본 관청으로 전투에 사용할 배들을 관리하고,선박재료들을 배양하며,배를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는 등의 일을 담당한 정.종 5품)가 되고,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풍저창은 대궐안에서 쌀이나 콩 등을 맡아보던 관아이며 7품)으로서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그는 인동현감(縣監종6품 수령)을 거쳐, 선조25년 임진왜란때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사복시는 궁중의 말이나 수레에 관한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며 첨정은 종4품)이 되고, 다음해 풍기군수(郡守:종4품 수령)로서 토적(土賊:토비라고함 시골에서 일어난 도둑의 떼.토비)을 소탕하였으며,선조28년에는 원주목사(牧使:관찰사 아래의 목을 다스리던 정3품)에 이르렀다.풍기의 우곡서원에 제향되었고 저서에 <겸암일고(謙庵逸稿)>가 있다.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607년 5월6일)은 풍산류씨의 후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명종19년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는 시험)를 거쳐 명종21년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보이던 과거)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종9품)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의 6품에서 9품 벼슬)을 지냈다.류성룡은 서장관(書狀官:중국에 보내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던 임시벼슬)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다음해 귀국한 후 정언(正言:정6품),이조좌랑(吏曹佐郞:3사의 문관 천거권이 있는 요직으로 정6품 전랑),검상(檢詳의정부에 속한 정5품 관직으로 정원은 1명이며,사인(舍人).사록(司錄)과 의정부의 모든 실무를 담당하는 요직),응교(應敎:홍문관의 분장인 공방을 관장한 정4품으로 부제학이하 종6품 부수찬까지 옥당(玉堂)이라 함)를 거쳐, 선조 12년 직제학(直提學:집현전은 종3품 홍문관은 정3품)이 되었다.선조15년 대사간(大司諫:왕에게 잘못을 간하던 사간원의 정3품)에 승진한 후,예조판서(정2품 장관)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독(講讀)하며 논평(論評)하고 사고(思考)하는 일을 관장한 정2품이 겸직,영사는 정1품이 맡음),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명성을 떨쳤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 및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2품) 예조.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등을 두루 역임하였다.류성룡은 선조23년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 올랐으며,광국공신3등(光國功臣三等)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풍원은 풍산의 별칭)에 봉해지고, 다음해에는 좌의정(左議政:정1품정승)이 되었다.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전쟁시에 맡은 군직으로 보통 정1품관이 맡음)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권율 등 명장을 등용했고,이어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모시고 따르던 일)했다.다음해 명나라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4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전쟁시에 맡는 임시최고 군직)를 겸하여 군사를 총 지휘하였으며, 화기(火器)의 제조,성곽의 수축 등 국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군대양성을 역설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설치하고, 제조(提調:정1품이 겸함)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講解)했다.선조31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北人)의 탄핵으로 관작(官爵)을 삭탈당했다가, 선조33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류성룡은 선조 37년에 호성공신2등(扈聖功臣二等)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류성룡은 바둑애호가로 유명한데, 일화에 의하면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선조임금에게 대국을 요청하자, 류성룡은 우산에 구멍을 뚫어 훈수함으로써 이여송을 무릎 꿇게 하였다고 전해질 만큼 바둑애호가였다.서애 류성룡은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 글씨로도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안동의 호계서원, 병산서원 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영모록(永慕錄).난후잡록(亂後雜錄).상례고증(喪禮攷證)>등이 남아 있다.안동 하회마을 한집에서 불천위제사 셋 탄생풍산류씨 하회종가에는 한집에서 세 사람이나 불천위(不遷位)가 탄생했다.입암공 류중영과 문경공 류운룡,문충공 류성룡 형제가 불천위로 모셔져 있다.불천위(不遷位)는 유림에서 칭송할만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증거가 된다.불천위제사 대상은 학문이 탁월하고, 많은 인재를 양성한 대학자나 충신,후세 사람에게 좋은 보기가 될 만한 탁월한 행적을 남긴 사람에게, 유림에서 추대하거나 나라에서 왕이 불천위를 내린다.일반적으로 4대조까지만 올리는 제사의 관례를 깨고,불천위는 신주를 옮기지 않고, 후손들이 끊임없이 제사를 올리는 특별한 제사이기에, 가문 최고 명예를 보증하는 것이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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