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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육씨(陸氏)는 옥천육씨(20,173명),관성육씨(1,329명).보은육씨(1명).장수육씨(1명).청산육씨(2명)등 5본관으로 조사되었으나,옥천육씨(沃川陸氏)단본이며,나머지는 세거지명이라고 한다.육씨(陸氏)는 2000년에는 21,545명이었다.옥천육씨(沃川陸氏)의 본관인 옥천(沃川)은 충청북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원래 관성군(管城郡)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때 고쳤고, 1313년(충선왕 5)에는 주(州)로 승격되어 옥주(沃州)라 했으며,경산부 소속인 이원.안읍(安邑).양산(陽山)3현을 받아들였다.1413년(태종13)에 옥천(沃川)으로 개칭하고,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변경하였다.1914년에는 청산군(靑山郡)을 병합하고 학산면.용화면.양산면은 영동군에 이관하였다. 1929년에는 이내(伊內).이남(伊南) 두면을 합하여 이원면(伊院面)으로 하였으며,1949년에는 옥천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다.옥천육씨대종회(沃川陸氏 大宗會)자료와 문헌에 의하면,우리나라 육씨(陸氏)는 옥천육씨(沃川陸氏,관성管城) 단본이다.육씨(陸氏)성(姓)의 유래는 중국 하남성의 평원반군(平原般郡) 육향(陸鄕:육종)의 지명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우리나라 육씨(陸氏)의 연원은 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옥천육씨(沃川陸氏) 시조 육보(陸普)는 중국 절강성(浙江省)사람으로,927년(신라 경순왕 원년,고려 태조10,후당(後唐) 명종(明宗)2년)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서,신라에 유교를 전파하기 위해 보낼때,8학사의 수반으로 신라에 들어와 문교(文敎)를 높이고, 이단(異端)을 물리쳤으며,학문진흥에 공로가 많았다. 한편,당시 당나라에서는 왕명에 의하여 문학을 가르치기 위한 교수로서 전례지신(典禮之臣)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에 파견된 8학사(八學士)중의 한사람으로 육보(陸普),정한,홍은열(洪殷說,남양홍씨시조)세사람을 선교사(宣敎使)라 하였고,그밖에 최(崔),류(柳),심(沈),서(徐),하(何)의 5학사를 부정관(副正官)이라 하여,모두 여덟명을 8학사라고 하였다.육보는 신라에서 뛰어난 공적을 쌓아 경순왕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부마도위의 약자)가 되었고,관성군(管城君:관성은 옥천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고 한다.시조 육보는 신라의 천년사직이 쇠락하고 고려에 손국하자,옥천군 안내면 인포리(仁浦里)에 은거하면서, 매일 산에 올라가 신라의 부흥을 축원하다가 숨졌다고 한다. 옥천육씨는 학문이 높은 육보의 전통을 이어 고려와 조선조에 와서도 많은 문인,학자와 무인등을 배출하여 가문을 빛냈다. 육씨들은 특히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는 의병을 일으켜 나아가 싸운 충의의 전통을 세웠다.그리하여 후손들이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정착 세거하며,육보(陸普)를 시조로 받들고 옥천(沃川)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중간 계대(繼代)를 잃어,고려 충렬왕때 주부(主簿:종6품 낭관)를 역임한 육인단(陸仁端)을 1세조로 받들며,세계(世系)를 계승해 왔다.옥천육씨(沃川陸氏)는 1세조인 육인단(陸仁端)의 손자 육거원(陸巨遠)이 고려말에 중랑장(中郞將:무관 정5품)을 역임하였으며,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명성을 떨쳐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큰아들 육려(陸麗)는 덕곡공파(德谷公派),둘째 육항(陸沆)은 공주목사공파(公州牧使公派),셋째 육비는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넷째 육수(陸綬)는 낭장공파(?將公派)로 크게 갈라졌고,막내인 육태귀(陸台貴:공양왕때 1품 벼슬지냄)는 손자대에서 후손이 끊겼다고 한다.덕곡공파 육려(陸麗,호 덕곡德谷)는 공양왕때 도순찰사(都巡察使난리때 지방의 군무를 순찰하던 임시벼슬로 재상급이 맡음)를 지냈으며,왜구를 토벌하여 고려사에 기록된 큰 인물로 경주(慶州)에 그의 공적비가 세워져있다. 또한 여말에 불교의 폐해가 심하자,강력히 반불(反佛)을 상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성계와 함께 이름이 높았던 무장으로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이성계가 조선을 건국,왕위에 올라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으로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충남 공주(公州)의 덕리(德里)에 은거하여 생애를 마쳤다.후에 전북장수(長水)의 압계사(鴨溪祠)에 배향되어 후인들이 추모하고 있다그의손자 육명산(陸命山)은 대장군(大將軍:종3품)을 역임했으며,후대에 다시 석동계(石同系)와 석정계(石貞系)로 나뉘어져,조선시대에 충의(忠義)의 전통을 이었다.전북 장수군 산서면 산서 국민학교 정문 앞 지방도로를 따라 약 10리를 더가면 동북쪽으로 장수의 명산인 팔공산(八公山)과 영태산(靈台山)을 잇는 준령이 병풍처럼 둘러있는 중간 위치에,임야 약 60정보가 있다.행정구역으로는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동고지(東皐地 )마을 속칭 매골이란 곳이다. 이곳에 덕곡 육려(德谷陸麗)이하 여러대의 설단 및 분묘가 모여 있고,각 묘마다 각종 수호석이 있다.이곳 묘혈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옥녀산발형(玉女散發形)이라 하여,숙녀가 머리카락을 앞으로 흐트러놓고 빗질을 하고 있는 혈이라고 전한다.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속칭 남성바위 마을뒷편으로 영대산 기슭에 육덕곡을 비롯하여 5위를 모신 압계서원(鴨溪書院)이 있다.제각 건물 여러채가 여섯자 높이의 돌담에 둘러 쌓여 있다덕곡공파는 대장군(大將軍:종3품) 육명산(陸明山),조선 명종때 문명을 날린 육대춘(陸大春),병자호란때 의병일으킨 육보,문인(文人)으로 명성을 떨친 육수례(陸守禮).육만정(陸萬貞).육홍진(陸洪鎭).육도(陸燾)와 목사(牧使:정3품수령)를 지낸 육린(陸麟).육복상(陸福尙),효자로 이름난 육호진(陸好鎭).육만태(陸萬泰).육봉천(陸奉天).육재중(陸在中),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육상용(陸相龍),구한말 의병을 일으킨 육병양(陸炳陽),민의원을 지낸 육건수(陸建洙),전북도청내무국장을지낸 육완기(陸完基),예비역육군준장 육완식(陸完植),단국대교수 육완정(陸完貞),이대교수 육완순(陸完順),전주시장을 지낸 육종진(陸鍾振)등이 문중인물이다.목사공파(牧使公派) 육항(陸沆)의 큰아들 육진(陸晉)의 후손에서는 부위(副尉:무관 계급으로 정위 다음 계급)를 지낸 육저(陸渚)와 제주목사(牧使:정3품수령)를 지낸 육한(陸閑),동래현감(縣監종6품수령)을 지낸 육세영(陸世英),정조때의 유학자 육상지(陸相贄)등이 유명했으며,둘째 육상(陸常)의 후손으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맡아보던 중추부의 종2품)에 오른 육춘수(陸春秀)와 만호(萬戶:각도의 여러 진(鎭)에 배치되었던 종4품무관)를 지낸 육석(陸碩),선조때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훈련원은 군사의 시재(試才),무예 훈련 및 병서 습독을 관장하던 관청이며 종5품)을 지낸 육성우(陸成禹)등이 있다.충북 옥천군 청성면 마장리는 일명 은천동 마을이라고도 하는데,파조(派祖)인 공주목사공(公州牧使公)의 후손들 40여호가 취락을 이루어 살고 있다.충청도 일원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특수 건축물로 기둥위에 글로리를 얹은 건축 기법을 사용한 450여년전의 목조 건물인 재실이 그대로 있어,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구한말의 유력자였던 육종욱(陸鍾旭)씨가 지은 건평 약 70여평의 기와집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어 주춧돌만 남아 있는 영월정(迎月亭)터 등은 육씨 영화의 화려했던 옛모습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마을 뒷편에 자리잡은 문수산(文殊山)은 육씨 종산인데, 병풍 바위라 불리우는 큰 암벽에는 옥천육씨 세거지천(沃川陸氏 世居之阡)이란 큰 글씨가 새겨져 있어,육씨 고장의 오랜 역사로 천년세월 무상의 여운으로 남겨주고 있다. 산기슭에는 파조공의 설단을 비롯하여,그 4대손인 제주목사 육한(陸閑),그리고 그 후손들의 분묘가 있는데,무인석,문인석 각 한쌍식과 망부석,향로등 석, 비석 등 각종 수호석이 고루 갖추어져 세워져 있는 선영묘가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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