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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씨(尹氏)는파평윤씨(713,947명).칠원윤씨(54,263명),무송윤씨(13,384명).가평윤씨(11,565명).강릉윤씨(2,458명).거제(504명).거창(919명).경남(778명).경주(시조윤통,265명).고령(905명).고창(시조윤세보636명).광주(589명).구만(1명).기계(시조윤유정은 윤양비아들로고려때합문지후지냄,775명).김해(768명).남원(32,731명).남평(1,076명).달성(866).대전(296).덕산(시조윤희관,261명).목포(1).문화(1,195).밀양(1,069).배천(244).수원(284).순흥(154).신녕(시조 윤자임,252).야성(시조 윤혁 107).양주(시조는 창화백 윤숭 2,315명).여주(시조는 윤달신으로 무송윤씨 윤양비 13세손이며 성종때 문과에 급제하고 충주판관지냄,506).영천(시조는 호장을 지낸 윤절생,1745명).예천(醴泉,시조 윤충1,965명,조선시대에 문과 2명 등 과거급제자 3명).전주(1,042).죽산(시조 윤정화 1200).진주(568).청송(1).청주(시조윤취 532).태평(5,069).팔판(612).평산(시조윤번421).평창(516).함안(시조는 남원백 윤위의 손자 윤희보 6106명).함평(516).해남(55,627).해주(시흥윤씨라고도 함 899).해평(26,341명,조선때 과거급제자 428명).현풍윤씨(시조 윤보은,파평에서 분관 인구 430명,조선때 문과 4명 등 14명의 과거급제자)등 윤씨(尹氏)는 47본관에 2000년에는 총 948,600명이었다.<임진왜란 첫 승리 다대포첨사(僉使:종3품 첨절제사) 윤흥신 장군>임진왜란 첫 승리는 부산 다대성 전투이고,주인공은 다대포 첨사(僉使:종3품 첨절제사) 윤흥신 장군(파평윤씨)이다"2007년 부산 사하구청에서 열린 '임란 초기의 다대성 싸움과 윤흥신 첨사'라는 제목의 학술토론회에서 한건 다대문화연구회장은 "다대성 전투가 벌어진 다대포 일대가 사실상 임진왜란 첫 전승지임에도 윤흥신 장군과 다대포 민중의 역사적인 전투기록이 소실됐다"고 말했다.향토사학자인 한 회장은 임진왜란 당시 첫 승전이 1592년 5월7일(음력)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이 아니라 4월13일 다대포 첨사 윤흥신 장군이 이끈 다대성 전투라고 주장했다.한 회장은 "'윤공단 비문'에 임진왜란의 첫 전투일이었던 4월13일 다대첨사 윤흥신이 왜적을 물리쳐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돼 있으며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과 구사맹의 '조망록'에도 임진왜란이 4월13일 발발했으며 윤흥신 장군이 이끈 다대성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고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그는 이어 "일본측 사료에서 임진왜란 개전일을 4월 14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대패한 4월 13일 다대성 싸움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한 회장의 주장대로 임진왜란의 첫 승전이 발발 당일 다대포에서 있었다면 '이순신 장군의 승전 전까지 속수무책으로 왜군에 연패를 당했다'는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을 뒤집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한 회장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마자 열악한 조건에서 목숨을 바쳐 싸운 영웅적인 지휘관과 백성들의 존재가 부산 다대포에 있었고, 이들이 왜군의 진로를 막았었다는 부분은 분명히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윤흥신 장군은 형조판서를 지낸 윤임의 다섯째 아들로 을사사화에 윤임이 연루되면서 큰 고통을 당했으나 무과에 합격, 종6품 진천 현감과 3품 다대포 첨사 등을 지냈으며 다대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윤흥신은 1592년(선조 25) 부산에 상륙한 왜적이 부산진성을 함락시킨후,다대진을 공격하자 동생 윤흥제와 군관민을 이끌고 이들과 대치하다 전사하였다. 왜란이 끝난 후에도 이 일이 알려지지 않다가,1761년(영조 37) 경상감사(종2품관찰사)로 있던 조엄이 이 사연에 얽힌 자료를 찾아내어 조정에 올리니,비로소 그의 충절이 드러나게 되었다.윤 장군의 위패는 정발 장군, 송상현 부사와 함께 부산 충렬사에 있으며 부산 사하구 다대동에 공을 기리는 비석과 제단이 설치된 '윤공단'이 있다.이 사실은 뒷날 팔곡(八谷)구사맹(具思孟)이 조망록(弔亡錄)을 쓸 때 사실을 자세히 갖추어 기술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공은 찬성(贊成) 윤임(尹任)의 아들로서 형제가 6인인데 그 중 3형제는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죽었다. 윤공이 다대포진에 부임할 때는 서제(庶弟)인 윤흥제(尹興悌)가 따라 왔었는데 왜적이 윤공에게 달려들어 칼날로 내리칠 때 윤흥제는 윤공을 부둥켜안고 함께 칼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그가 죽어서도 형을 하도 꽉 끌어안고 있어서 마침내 관에 함께 넣어 장사지냈다’라고 하였다.임진왜란 당시 제일먼저 왜군의 공격을 받아 순직한 사람은 동래진(東萊鎭)주위로서 수령들만 십 수명이 된다. 그렇게 순절한 희생자 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동래부사인 송상현(宋象賢)과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과 다대포(多大浦)의 윤흥신장군으로 이들은 모두 동래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이다. 뒤에 동래부에서는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송공과 정공은 사당에 모셔 제사했지만 윤흥신은 고향 집에 정려(旌閭)만 세웠었다.왜구(倭寇)가 처음에 부산을 함락시키고 병력을 나누어 다대포를 포위하자 윤흥신이 힘써 막았다. 그때 군리(軍吏)가 와서 말하기를 ‘적들이 모두 몰려올 터이니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공이 꾸짖기를 ‘나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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