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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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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의정 윤두수.양관 대제학 윤근수 형제 부자(父子) 영의정 배출윤치호는 최연소 신사유람단 대한자강회 독립협회 이끌었으며 애국가 작사문헌에 의하면,해평윤씨(海平尹氏)의 원조(遠祖)는 고려 인종때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재상)을 지낸 윤신중이 해평에서 출생하였기에 본관으로 창본했다.해평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해평면으로, 해평윤씨 선조들의 묘나 비석이 남아있다고 하며,고려때인 1300년대에 영의공이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위해 심은 방풍.방사용 수만그루의 나무숲인 해평숲은 해방후 제방용으로 또는 농경지로 변하여,지금은 덕수평야로 불리우고있다.해평은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수륙교통의 요지였으며,조선시대에는 상주현에 속했다가 1896년 13도제(道制)실시에 따라 선산군 해평면이 되었다.해평윤씨 시조는 윤군정(尹君正)이다.그는 고려 고종과 원종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고려 문산계 29계중 제3계로 종2품이었으나1361년 정2품으로 바뀜)의 품계에 올랐고,공부판사(工部判事:정3품)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부총리).수사공(守司空:3공의하나로 정1품)에 이르렀다.그는 고려 고종44년 4월 원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정벌하였으며,흥원창(興元倉고려.조선때 조창(漕倉)의 하나로 강원도 원주시 법천리에 있었고, 원주.평창.영월.정선.횡성.강릉.삼척.울진.평해 지역의 세곡을 보관하고 한강수로를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송)싸움에서도 윤군정(尹君正)은 크게 이겼고,항복한 자 중에서 두목급 몇명만 베고 나머지는 해도(海島)로 귀양보내 생명을 보전토록 했다고 한다.문헌 해평세덕고(海平世德考)에는 이 부분을 사공공(司空公)의 덕의(德義)라 칭송하고 있으며,그 공으로 우복야(右僕射:상서도성의 정2품)에 이르렀다.해평윤씨는 시조 윤군정의 증손대에서 문영공파(文英公派:윤지현 尹之賢)와 충간공파(忠簡公派:윤지표 尹之彪) 양파로 크게 갈라지게 된다.그의 손자 윤석(尹碩)은 고려 충숙왕때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에 책록되고 벽상삼중대광(壁上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도첨의사(都僉議司중서문하성이 바뀐 정부의 최고기관으로서 왕의 조칙(詔勅)을 받들어 심사(審査)하고 시행한 관아이며 종1품이 수장),좌정승(左政丞:종1품)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문관의 선임.제향.학교의 일을 맡아본 관청)로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져,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본관을 해평(海平)이라 하게 되었다.윤군정(尹君正)의 아들 밀직공(密直公) 윤만비(尹萬庇)는 충렬왕3년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그 역량이 알려져 권간(權奸)으로 국정에 큰 폐를 끼쳤던 오기(吳祈)의 무리를 소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그리하여 충렬왕때는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정령을 출납하던 정3품)에 이르렀고,원종복위(復位)때는 기사일등공신(己巳一等功臣)이 되었다.3세손인 영의공(英毅公) 윤석(尹碩)은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 대언(代言:왕명의 하달을 맡아보던정3품)이 되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외교수완을 발휘하여 행성(行省:원의 우리나라 내정 간섭청)의 설치를 못하게 하여,1등공신이 되어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다.4세손 문영공(文英公) 윤지현(尹之賢)은 문신으로 정치와 문학에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일찍이 문과에 올라 삼사(三司재정기관으로,1405년 6조 중심의 국정운영체제를 정비할 때 호조에 병합되어 소멸)의 판관(判官:종5품)을 거쳐 우윤(右尹:3사의 종3품).지신사(知申事:왕명을 출납하던 정3품으로 1433년 도승지로 고침)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고려때 재능 있는 문신(文臣)이 모여 임금을 시종(侍從)하던 관아의 정.종2품 문형) 춘추관지관사(春秋館知館事:시정(時政)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의 지춘추관사로 2품이상의 재신이 겸임)등을 역임한 뒤 광정대부(匡靖大夫:고려시대 문관의 품계로 '금자광록대부'를 고친것,1308년 정2품)에 이르렀다.충혜왕의 복위에 힘쓴 공으로 좌정승(左政丞:종1품재상)에 제수되었고, 공민왕초에는 다시 정당문학(政堂文學)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종2품문형)으로 특제되기도 했다.특히 그는 국고출납에 엄격하였다고 하며,정방(政房:고려때 정무를 집행하던 관청)에서는 엄정한 인사에 힘썼고 몸가짐도 사대부(士大夫)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충간공(忠簡公) 윤지표(尹之彪:시호는 충간 忠簡)는 19세에 호군(護軍:고려말에 '장군'의 고쳐진 이름)이 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충혜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갔을때 수행하여 그의 목숨을 지킨 공으로 공신철권(功臣鐵券)을 받았다.충혜왕이 복위되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궁중의 수레와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3품),충목왕때는 상호군(上護軍:고려후기 조선초 중앙군의 최고지휘관 정3품 상장군이 고쳐진것)으로 시독(侍讀:태자궁 시강원의 벼슬로 조선때는 5품 시독관)에 참여했고,이어 전리판서(典理判書:문관의 선임.공훈.제향.학교일을 관장한 조선때의 이조판서)가 되었으며,평양윤(平壤尹)과 서북면존무사(西北面存撫使도에 파견한 지방관으로 그간의 안렴사를 제찰사로 바꾸고 강릉도,평양도에 존무사를 설치함)를 역임했다.공민왕 18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다음 해에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종2품) 상의회의감사(商議會議監事)가 되었으며,평리(評理:첨의부의 종2품),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으며, 기로소(耆老所:임금이나 정2품 이상의 70세가 넘은 문관을 예우하기 위한 시설로 태조3년(1394)에 설치됨)에 들어갔다.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 윤방안(尹邦晏)은 익재(益齋) 이재현(李齋賢)의 문인(門人)으로 공민왕 때 출사(出仕)하여 홍건적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전의시(典儀寺:증시(贈諡)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충렬왕 때 봉상시로 바뀜)가 된 뒤에는 신돈(辛旽)의 전횡을 막았다고 한다.문평공(文平公) 윤 진(尹珍:시호 문평)은 문과에 급제하고,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제찬과 사명을 맡아보던 관청의 종2품문형)에 올랐으며,우왕14년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첨의부를 고친 문하부의정2품부총리)에 승진,조반(趙 )의 문죄(問罪) 때에 공정을 기했다고 전해지며,문학과 덕망이 높아 해평군(海平君)에 봉해졌다.해평윤씨가 배출한 조선의 상신(相臣: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 정1품 정승) 6명,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 3명,중종 때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윤은보(尹殷輔)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승훈(尹承勳)만이 문영공파에 속하고 나머지는 모두 충간공파에서 나왔다.충간공파에서도 선조때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 윤두수(尹斗壽)의 후손인 오음공파(梧陰公派)와 그의 아우로 선조때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지낸 윤근수(尹根壽)의 후손인 월정공파(月汀公派) 양파가 번창하여,이들 후손이 해평윤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윤두수의 다섯 아들 윤방(尹昉).윤흔(尹昕).윤휘(尹暉).윤훤(尹暄).윤오(尹旿) 등이 모두 현달하였다.그 중에서도 윤방이 인조 때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을 지냄으로써 부자(父子) 영의정으로 명성을 떨쳤다.윤방은 도승지(都承旨:정3품 왕의 비서실장).한성판윤(判尹:정2품 서울특별시장).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법무장관)등을 역임하고,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에 반대하여 은퇴하였으나,인조반정으로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에 등용되었고,이어 우의정(右議政:정1품정승).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올랐다. 윤흔은 우부승지(右副承旨: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를 지내고 계축옥사로 파직 되었다가 인조반정 뒤 예조참판(參判:종2품차관)을 거쳐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일을 맡아하던 중추부의 정2품)를 지냈다.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윤휘는 인조를 호종(扈從:왕가를 모시고 따르던 일)하여 적진을 왕래하면서 화의를 교섭하였고,뒤에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의정부 종1품)에 이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또 윤훤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국방장관),윤 오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조선때 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를 지냈다.2000년 인구조사에서 해평윤씨는 8,225가구에 총 26,341명이었다.한편,계해보(癸亥譜)에 의하면,관향인 경북 선산군 해평(海平)에는 3세손 윤석(尹碩)의 대(代) 이후로 10여대 이상의 묘영(墓塋)이 있어 많은 후손들이 이곳에 세거했었다. 6세손 윤창(尹彰) 대(代)에 이르러서 일부 후손들이 경기도 장단(長湍)으로 이거했으며,시흥(始興), 여주(驪州), 양주(楊州) 등 경기도 일원에 산거했다.8세손 윤제(尹濟)의 묘가 충북 청주(淸州)에 있고, 괴산군(槐山郡) 일원에 세천지(世阡地)를 두고 있다. 그리고 8세손 윤광필(尹光弼)의 대를 전후로 황해도 해주(海州), 재령(再寧) 등지에 자리잡았고,특히 12세손 윤승상(尹承祥) 이후로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많은 후손들이 살았다. 후대에 전남 보성.화순,충남 연기.아산(牙山).공주(公州).보령 등지에 산거했다. 일제강점기때인 1930년대에 해평윤씨 후손들은 충북 괴산군 사리면(沙梨面),충남 청양군 적곡면(赤谷面),황해도 금천군(金川郡) 고동면(古東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해평윤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11명,무과(武科:무관을 뽑아쓰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10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74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2명,의과에 2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에 3명,주학 7명 등 428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여 명문의 가통을 이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해평윤씨는1985년에는 5,489가구에, 22,758명,2000년에는 8,225가구에, 26,341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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