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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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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도씨(星州都氏)의 시조에 대해서 "경술보(庚戌譜)"수성시조(受姓始祖)편에 보면,시조가 도계(都稽)라고 한다.그는 기원전 110년 한무제때,중국 남월(南越)의 재상인 여가(呂嘉)가 왕건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을 때,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여가를 사로잡고 반란을 토평한 공으로, 임채후(臨蔡侯)에 봉해지고, 도씨(都氏)로 수성(受姓)함으로써 도씨(都氏)가 비롯되었다고 한다.시조 도계의 후손으로 도조(都祖)가 한나라 성제때 사람인데,고구려로 건너와 유리왕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착하면서, 우리나라 도씨(都氏)의 가계가 시작되었다.우리나라 도씨의 시조 도조의 후손으로,백제 개루왕때의 재상 도미(都彌),그리고 통일신라 때의 도유(都儒)는 신라에서 김유신을 도와 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공을 세워 상천후(尙川侯)에 봉해졌다고 한다.후손 도진(都陳)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우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성주(星州)가 도씨의 관향이 되었다.그러나 중시조 도 순(都順) 이전 선대의 세대(世代)는 문헌의 유실로, 정확하게 밝힐 수 없어 고려중기에 전리상서(典理尙書:정3품 장관)를 지낸 도순(都順)을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도씨(都氏)는 성산도씨(星山都氏).성주도씨(星州都氏).팔거도씨(현재의 칠곡 漆谷)등 몇 본이 있지만, 모두 같은 뿌리이다. 성산(星山)은 성주(星州)의 옛이름이고,팔거는 옛날 성주(星州)의 속현(屬縣)이다.도씨는 1752년 대동보를 편찬할 때 종회의 결의로써,당시 팔거현이 속한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서성주도씨로 개칭하였다.삼국사기 동사열전(東史列傳),동국통감(東國通鑑),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등의 문헌에는 도순(都順)이전 인물로,도도(都刀).도두(都頭).도공(都功).도비(都非).도눌최(都訥催).도유(都儒),도조(都祖).도미(都彌).도진(都陳)등의 도씨성(都氏姓)이 등장한다.도조(都祖)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큰아들 유리(琉璃)가 이복동생 비류(比流).온조(溫祚)와 왕권쟁탈전을 벌일때 유리(琉璃)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이라고 한다.백제 개루왕때 사람인 도미(都彌)는 부인이 아름답고 정숙하기로 소문이 났기에 개루왕이 그 소문을 듣고 그의 아내를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미(都彌)의 두 눈을 뺀 다음 배에 태워 한강에 띄워버렸다.그러나 도미(都彌)의 아내는 잠자리를 강요하는 왕을 속인 뒤,남편을 뒤쫓아 하류의 천성도(泉城島)에서 해후하고 고구려 땅에서 나물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씨족통보.전고대방(典故大方)등에 전함>“도미(都彌) 부인 '아랑'의 정절은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女節婦德)의 상징”도미(都彌)의 무덤은 경남 웅천(熊川)에 있는데, 이 지방에서는 누구든 8월 초하룻날에 제일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도미(都彌)부인 아랑의 정절은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여절부덕(女節婦德)의 상징으로 1984년 5월 창작 무용극 [도미 부인]으로 꾸며져,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문화 행사 무대에 올려졌고, 그 후 여러나라에서 1백 수십여회의 공연을 가졌으며, 도미부인을 기리는 동상이 "서울시 강동구 천호1동 천일어린이공원내"에 세워져있다.1세조 도순(都順)의 아들 도충박(都忠朴)은 고려 원종 때 전리상서(典理尙書:정3품 장관)를 지냈으며,3세 도유도(都有道).도유덕(都有德)등 형제도, 공조전서(工曹典書:정3품장관)와 명경진사(明經進士)에 각각 올라 명성을 떨쳤다.4세손 도효원(都孝源)이 전객령(典客令),도효신(都孝臣)이 판서(判書:정2품장관),도효안(都孝安)이 동양창 판관(東陽倉判官:종5품) 등을 지냈고,도효정(都孝貞)의 손자 도천우(都千遇)는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이 되었다.전국의 도씨(都氏)들은 모두 이들의 후손으로 대구 달성.경북 울진.군위.성주.청도(淸道).경주(慶州).예천(醴泉),경남고성(固城).산청(山淸).거창(居昌).청주(淸州).청산(靑山),충남 천안,논산시 연산(連山)등이 집성촌이다.고려 때의 도씨(都氏)인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도효안(都孝安)의 아들 도홍정(都洪正)이다. 그는 공민왕때 시중(侍中:고려때 국정을 총괄하던 대신으로 종1품 정승)에 오르면서 정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그의 아들 도길부(都吉敷)는 우왕 때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를 역임한 무신으로 당시 세도가 이인임(李仁任)의 인척이었다.도길부(都吉敷)는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 해 충청.전라도지방이 큰 화를 입게 되자 이성계등과 함께 충청도에서 전투를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왜구를 완전히 격퇴했다.이것이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그러나 이인임(李仁任)이 실각하는 정변에서 그 일파로 몰린 그는 죽음을 당하고 일족은 풍비박산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도(都)씨들은 이 참변을 <기사화변(己巳禍變)>이라 부르고 있다.도길부(都吉敷)의 아들 청송당(靑松堂) 도응(都膺)은 고려말을 대표하는 도(都)씨의 인물로 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부총리)를 지낸 그는 이성계와 가까운 사이였다.기사화변(己巳禍變)때 장인 우인열(禹仁烈)의 덕으로 화를 면하였고,고려가 망한 후에는 홍주 노은동(魯隱洞)에 은거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상장군(上將軍정3품)에 임명하고, 두 번이나 예물을 보내 출사를 권했으나 뿌리쳤다.그 뒤에도 이성계가 다섯 차례나 불렀지만 끝내 응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지조를 지켰다. 이에 감복한 이성계는 청송당(靑松堂)이라는 호와 송절시(頌節詩)를 내려 그의 절의를 기렸다고 한다.이때의 왕지(王旨) 4점과 왕명 1점이 보물 724호로 지정돼 충남 연산의 보호각에 소장되어 있다. 도 응은 고려말에 절의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사람이다.도흥(都興)은 공민왕때의 무신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상원수(上元帥)로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門使)가 되어 재직중에 왜구의 침입을 잘 막지 못해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1392년 정몽주가 이방원 등에 의해 살해된 뒤 그의 일파로 몰려 유배를 당했다.도 연(都衍)은 고려말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공민왕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을 지냈다.조선 초기에 도(都)씨 들은 고려말의 시련 때문에 출사(出仕)를 꺼려하였으며, 세조때 도하(都夏)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정언(正言: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은 사간원의 정6품).교리(校理:홍문관.승문원의 정5품)를 거쳐,부사(府使:정3품수령)를 지냈다.조선 중.후기에 이르러는 15명의 문과(文科대과) 급제자와 무과급제자를 배출했다.특히 도성유(都聖兪).도여유(都汝兪).도응유(都應兪).도경유(都慶兪).도신수(都愼修).도신징(都愼徵).도형(都衡).도균(都勻)등 이름난 학자가 많다.도성유(都聖兪)는 성리학자로 임진란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 오경체용합일도(五經體用合一圖)와 체용각분도(體用各分圖)를 만들었으며,성리지학(性理之學)등을 저술했다.도여유(都汝兪).도신수(都愼修)와 더불어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서재(鋤齋)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됐다.도여유(都汝兪)는 이괄의 난 때 의병을 모집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고 병자호란 후에는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도응유(都應兪)는 '이괄의 난'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정묘호란때는 창의상장(倡義上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조정에 축성선장(築城選將)의 소(疏)를 올리는 등 국방 책략에 조예가 깊었다.또 예문에도 밝아 오현예설(五賢禮設)을 편찬하였으며,동생 도경유(都慶兪)와 함께 대구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배향됐다.도경유(都慶兪)는 인조때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하고,1627년 정묘(丁卯)호란때 세자를 남원으로 호종(扈從:왕가를 모시고 따르는것)하였고,병자호란때는 조령(鳥嶺) 전투에서 대승했으나, 쌍령(雙嶺) 전투에서 화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패배해 그 죄로 유배되던 도중에 죽었다.그러나 후에 화약고 폭발이 군율을 어겨 그에게 처형당한 비장의 아들이 분풀이로 한 것임이 밝혀져 승지(承旨:정3품)로 추증됐다.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의 아들 도신수(都愼修).도신여(都愼與).도신행(都愼行).도신징(都愼徵)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5부자가 당대의 성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맏아들 도신수(都愼修)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여러 관직을 거쳐 함흥부사로 선정을 베풀었고, 말년에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전념했다. 함흥부사로 부임했을 때 억울하게 투옥된 백성을 모두 방면하자, 밝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내렸고, 세인들은 이를 <설원우(雪寃雨)>라고 칭송했다고 한다.둘째 도신여(都愼與)는 효종 때 문과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정4품)를 지냈으나 재임중에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한 사람의 동량을 잃었다고 아쉬워하며, 영이(요즘의 영구차)까지 내렸다고 한다.넷째 도신징(都愼徵)은 현종.숙종 때 활약한 학자로 유림에서 명망이 높았으며,특히 예제(禮制)에 밝았다.그는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효종 비)가 죽어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의 복상(服喪) 문제가 일어났을 때 대공설(大功說)로 예론(禮論)이 기울어지자,상소를 통해 이를 반대하고 기년설(朞年說:만1년)을 주장 결국 이를 관철했다.그 뒤 강릉참봉(參奉:종9품),주부(主簿:종6품)를 거쳐,용궁현감(縣監:종6품)으로 나가 치적을 쌓고,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당하관)가 되었다.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에는 <용호서원>이 있다.이 서원은 1708년(숙종 34)에 건립하였으며,도성유, 도여유, 도신수 3현을 병향하고 있다.이 서원은 정면 5간,측면 1간반의 팔작지붕이다.도성유(자는 정언,호는 양직당)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스승인 서사원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군량을 모았고,오경체용 합일도와 체용각분도를 만들었다. 도여유는 도성유의 종제인데 자는 해중, 호는 서재로 일찌기 한강 정구와 낙제 서사원에게서 수학하였으며, 덕업으로 세인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인조 2년(1623)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향병을 모집하여 모당 손처눌과 함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도신수는 도여유의 장남으로 호는 지암이다. 인조4년(1626)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부사를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올려 왕으로부터 내구마를 하사받았다. 저서로 지암문집이 있다.또한 도형(都衡)과 도균(都勻)형제는 성주(星州)에서 후진양성에 힘써,성향선정(星鄕先正)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형 도형(都衡)은 중종때 현량과에 천거되어,정언(正言:왕에게 간하던 관청인 사간원의 정6품)등을 지내다 공조좌랑(工曹佐郞:정6품)재임 중,조광조(趙光祖:기묘명현으로 지치주의를 실천하려다 사사됨) 일파로 몰려 파직됐다. 낙향후 아우 도균(都勻)과 함께 후진양성에 전념하며,성리회찬(性理會纂),효경집해(孝經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밖에 도인엽(都寅燁),도석훈(都錫壎),도진삼(都鎭三)등의 학자들이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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