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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조선 왕조의 가문오리정승(梧里政丞) 이원익(李元翼),흥선대원군 이하응 초대대통령 이승만실학의 선구자 이수광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 등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거목 배출 문과(文科대과)에만 785명총 4,331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여 모든 성씨(姓氏) 중 단연 1위전주이씨(全州李氏)는 조선 500년의 왕가(王家)이다.전주이씨 유래전주이씨(全州李氏)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첫째는 중국(中國)에서의 귀화설(歸化說)이다.연대와 작자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전주이씨 시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야사(野史) 실록(實錄)을 참고하면,시조 사공 공의 휘는 한(翰)이요,자는 견성(甄城)이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중국)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이 과인하시고 재질이 특이하여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시었다. 공의 나이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시고,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납고 악했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을 받아 공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 약관도 되지 않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여 인자한 기풍을 크게 떨쳤다. 불과 수년에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가 조정까지 들려, 신라의 문성왕(文聖王)이 불러 사공 벼슬에 임명하였고, 1년 남짓 다스리매 국정이 공평하여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래서 태종(太宗)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사공(司空) 공(公)은 중국인으로 배씨의 모함을 받아 신라로 들어와 사공 벼슬에 올라 김씨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출처 미상의 <이씨 득성의 유래(李氏得姓之由來)>란 글에서는 중국 이씨의 역사를 약술하고서 끝 부분에 「우리 전주이씨(全州李씨)가 본래 중국 당(唐)나라 황실의 후예라 하나, 그 파계와 원류를 밝힐 분명한 근거가 없고, 우리 시조 휘 한(翰)으로부터 대대로 완산인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둘째는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설(分籍說)이다.경주이씨는 신라 육성(六姓:李.崔.鄭.孫.裵.薛)의 하나로,우리나라 이씨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씨족이다. <경주이씨대동보>에는 경주이씨의 유래가 나온다. 신라 6성(六姓)의 시조 6명은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곧 6인천강설(六人天降說)이다. 경주이씨 시조 알평(謁平)은 처음에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로 내려왔다. 이곳은 6촌(六村)중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인데, 나중에 급량부(及梁部)로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었다. 기원전 69년(前漢 宣帝 地節 元) 3월 초하루에, 이 6촌장이 알천(閼川)의 바위위에 모여 양산(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번개 빛 같고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여, 찾아가 보니 검붉은 알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래서 6촌장이 그 알을 깨 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그 아이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불렀다. 이 혁거세가 13세가 되자 기원전 57년(前漢 宣帝 五鳳 元)에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라를 건국한 공로로 알평은 아찬(阿餐)의 벼슬에 오르고, 기원전 32년(유리왕 9)에 이씨(李氏)를 사성(賜姓) 받았다는 것이다. 이알평(李謁平)이 경주이씨의 시조인데, 과거의 <경주이씨족보>에는 이알평의 먼후손 이거명(李居明:소판공蘇判公)을 중흥1세조로 삼아 계대수(系代數)를 따져왔다. 그러다가 2백여년전 조선 말기에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부터 이거명까지의 대수(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대의 명단을 찾아냈다고 한다. (1세)알평(謁平)- (2) 유 - (3) 타 - (4)중가 - (5) 석 - (6)문상- (7)방 - (8)수장 - (9) 수 - (10)기정 - (11)미선 - (12)성립 -(13)서 - (14)계환 - (15) 걸 - (16)선장 - (17)기담 - (18)인흥 - (19) 확 - (20)선정 - (21) 체 - (22)태휘 - (23)우영 - (24) 준 - (25) 소 - (26)경지 - (27) 욱 - (28)원장 - (29)한로 - (30)계탕 -(31) 도 - (32)사언 - (33) 기 → (34)희두 - (35) 계 - (36)거명 ↘ (34)진두 - (35)백전 →(36) 공 ↘(36세) 한(翰) 이상에서 보면 시조 이알평부터 36세손 이거명까지의 계통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이거명을 중시조 1세(世)로 따져온 것이다. 여기서 전주이씨(全州李氏)와의 문제는 34세 희두(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손자인 한(翰)이 관계되는 것이다. 여기서 34세 진두의 기록을 보면,"공도 문장가로서 경문왕 때 임오년에 형 시중공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랑(侍郞:정4품차관),평장사(平章事:평장사는 고려때 관직으로 정2품부총리),병부령(兵部令:병부의 으뜸으로 재신이 겸임)에 이르렀다.<세장보(世藏譜)>를 참고 하면, 손자 한(翰)이 완산이씨(完山 李氏,전주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더라."이 기록에 의하여 이진두의 둘째 손자 한(翰)이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 사공공(司空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상서공파세보(尙書公派世譜)>에는 (34세)진두(辰斗)-(35)백전(白全)-(36) 공(恭)-(37) 한(翰)으로 세계(世系)를 꾸며 놓고 이한(李翰)의 약력에 "대사공 은상서.어사중승.상주국(上柱國:국가최고훈호)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 김은의의 딸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다" 라고 적어 놓았다. 여기서도 한(翰)이 전주이씨(全州李씨)의 시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나, 경주이씨 족보와 다른 점은 공(恭)과 한(翰)을 형제가 아닌 부자(父子) 사이로 바꾸어 놓았다.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으로 경주이씨 족보에 분명히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재령이씨(載寧李氏).아산이씨(牙山李氏).우계이씨(羽溪李氏) 등으로 분적(分籍)된 기록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주이씨(全州李氏)가 경주이씨에게서 갈라져 나갔다는 기록은 위에서와 같이 애매하고, 그 기록이 한(翰)의 약력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 조부의 약력에 기재되어 있는 점이다. 따라서 전주이씨 시조인 사공(司空정1품)공(公) 이한(李翰)의 선계(先系)는 현재로서는 단언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 규명될 수 있는 후일을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다.<전주이씨종인 기록 참조>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는 신라때 사공(司空:고려때는 3공의 하나 조선때는 공조판서)을 지낸 이 한(李翰: 호는 견성 甄城)이다.시조 이 한(李翰)은 전주(全州)에서 대대로 살아왔다고 하며 덕망이 높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사공(司空:신라.고려때는 정1품)에 이르렀으며, 태종무열왕의 10세손으로 군윤(軍尹:궁예의 태봉때는 보윤(甫尹)다음의 벼슬 고려때는 9품으로 첫째 가던 향직 鄕職)을 지낸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였다.시조 이한(李翰)의 후손들이 신라 왕조에서 누대에 걸쳐 벼슬을 해 왔고,시조의 6세손인 이긍휴(李兢休)에 이르러 고려때도 사공(司空:삼공의 하나로 정1품)에 이르렀다.시조의 18세(世)는 목조(穆祖)대왕 이안사(李安社)이다. 목조는 처음 전주의 호족(豪族중앙의 귀족과 대비되는 용어로 지방의 토착세력)으로 살았다. 성격이 호방하고 용기와 지략이 남과 달랐다. 그러나 새로 부임해온 지주사(知州事:지방장관.수령)의 탐욕과 포악함을 규탄하자,지주사는 이를 보복하려 하였으며,이를 피하여 강원도 삼척으로 이주하였으나, 그 지주사가 안렴사(按廉使:고려 최고 지방행정구획인 5도의 장관으로 고려사(高麗史) 백관지 외직 안렴사조에는 현종3년(1012)절도사(節度使)가 혁파된 후 안찰사가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있음)가 되어 온다는 소문을 듣고,이를 꺼려 다시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철령 이북은 원나라의 영토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1258년 원나라가 함경남도 화주(和州 :영흥)에 설치한 통치기구로 쌍성총관부는 동녕부와 함께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에 귀속된 영토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통치 기간이 100여년이었음)이므로, 목조는 원나라로 남경(南京) 5천호소(五千戶所)의 장관인 다루하치(達魯花赤:몽고의 관직으로서 각 관서(官署)의 장(長)을 칭함.다루가치가 최초로 고려에 배치된 것은 제1차 몽고 침입때의 일로 몽고는 군대 철수의 조건으로 서북면 지방 14개 성(城)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두고 민정담당함)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아들 이행리(李行里,익조 翼祖),손자 이춘(李椿,도조(度祖),증손 이자춘(李子春,환조 桓祖)이 모두 천호(千戶:고려때 순군만호부 등에 설치된벼슬)의 벼슬을 세습하였다.21세(世)이자춘(환조桓祖)는 공민왕때 북강회수운동(쌍성수복)에 큰 공을 세워,대중대부(大中大夫:고려때의 문산계로 중정대부라 하다가 1356년(공민왕5)대중대부로 고친 종3품 품계)로 사복경(司僕卿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마구.말.목축에 대한 일을 담당하던 국가기관인 사복시벼슬)이 되고,영록대부판장작감사(榮祿大夫判將作監事),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고려때 군직,조선때는 진(鎭)에 배치된 종4품)겸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병마를 지휘하던 외직무관으로 2품)로 임명되었다.환조가 사망후 고려조에서는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던 종1품정승)에 추증했다.이성계는 영흥태생으로 22세에 처음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동북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2품 병사.절도사)가 되었으며,원나라와 왜구토벌에 공을 세우고 여러벼슬을 거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고려때 문하부의 대신공민왕 5년에 좌정승을 문하시중, 우정승을 '수문하시중' 이라 했음)에 올라 고려말 중앙정권의 중추(中樞)로 등장하였다.시조 이한(李翰)의 22세손인 이성계는 고려말의 혼란스런 국정을 바로잡고 민심을 수습하여 좌시중(左侍中:종1품정승)배극렴 등 52인의 추대에 의해 왕위(王位)에 오르니, 이씨조선왕조(李氏朝鮮王朝)의 시작이었다.태조에 이어 정종(正宗),태종(太宗),세종(世宗)등 열성조(列聖朝)를 거쳐 27왕이 상계하였으며, 519년으로 종지부를 맺게 되었다.<참고사항-중국은 왕조의 평균 존속시기가 우리나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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