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위메뉴 바로가기

세계 孝 중심지 향한 첫 발, 인성교육과 뿌리의식 - 孝 !World

성씨유래검색

  • 성씨

    조(曺)

    문중

    조(曺)

  • 유래

    전군의 통솔권자 조민수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신라 고려조에 현관(顯官).명신들이 많았고 조선시대에는 절개 높은 선비 문중.두시언해(杜詩諺解)의 저자로 성리학에도 통달한 학자 조 위(曺偉)근세의 거목(巨木)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경남 창녕(昌寧)지방에는 전해 내려오는 조씨 득성(得姓)과 시조 태사공(太師公)조계룡의 탄생설화가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때의 한림학사(翰林學士:임금의 교서를 짓는일을 맡아봄 고려때는 정4품,중국에서는 한림원에 속하여 조칙의 기초를 맡아보던 벼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혼기(婚期)에 이르렀을때 병을 앓게 되어 백약이 무효했다.학사인 이광옥이 크게 염려하던 중 어느 신승(神僧)의 말에 따라 창녕의 화왕산(火旺山) 정상에 있는 용지(龍池)라는 연못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목욕기도를 하자 병이 완쾌되면서 태기가 있었는데 어느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옥대를 두른 남자가 나타나더니,"그대는 이 아이의 아비를 아는가 나는 동해신룡(東海神龍)의 아들 옥결인데 이 아이의 아비이다. 이 아이를 잘 기르면 크게는 공후(公侯)가 될것이고 적어도 경상(卿相)은 틀림없을 것이다."하고 사라졌다.그후 10달이 지난 진평왕 48년에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붉게 새겨져 있었다.이를 이상히 여긴 학사 이광옥(李光玉)이 진평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자 왕도 이를 신기하게 여겨 아기에게 조(曺)성을 내리고 계룡(繼龍)이라고 특사(特賜)하였다.계룡(繼龍)은 자라나면서 매우 총명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여러 관직을 내리고 드디어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부마도위의 약자)를 삼으니 그가 곧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이다.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은 나라에 공을 세워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창성은 창녕의 고호)에 봉해졌고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 대도독 총지휘제군사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總指揮諸軍事金紫光祿大夫 太子太師)에 이르렀다.<품계설명:보국대장군(정2품의 무산계),상주국(上柱國:국가 최고의 훈호),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문관의 종2품 품계로 고려때는 1076년(문종 30)문산계 29계중 제3계로 정했음,1275년(충렬왕 1년) 명칭이 광정대부(匡靖大夫)로 바뀌었다가 1361년에는 정2품대부로 되었음),태자태사(太子太師:3공(태자.태부.태보)이 공히 (정1품)이나,태사(太師)를 서열으뜸으로 여김>그는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고려때는 정2품의 무산계)으로 이를 물리쳤고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 등을 배후에서 지도한 인물이었다고 창녕조씨시조기(昌寧曺氏始祖記)는 전한다.시조 태사공 조계룡묘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노당2리 초제에 소재한다.한편 <창녕조씨 득성설화지>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에 있다.화왕산은 창녕조씨 성(姓)이 생겨난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본래 화왕산 정상에 설화가 깃들어 있는 연못인 용지(龍池) 3곳을 억새밭 가운데에 작은 저수지로 꾸며놓았다.이 득성설화는 조선 영조때인 1760년대에 제작된 <여지도서 輿地圖書> ‘창녕條’와 1832년 작성된 <경상도읍지> ‘창녕조’, 1895년 작성된 <영남읍지> ‘창녕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 182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신라선보 新羅璿譜>의 ‘진평여왕식조’에 태종무열왕의 모친 천명부인의 여동생이 태사 조계룡(曺繼龍)에게 출가했다는 내용이 나오며, 그밖에 <창녕조시대동보>, <창녕조씨천성공파보>, <명미당문집> 등에도 이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또한 <창녕조씨득성지지>표비도 서기1897(광무 원년)에 자연석으로 음각되어 문화재 246호 지정되어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에 있다.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신라.고려조에 걸쳐 현관(顯官).명신들이 많았고 조선시대에는 절개 높은 선비를 많이 배출했다.신라말기 아간(阿干:신라17관등중 제6품인 아찬 阿飡) 조흠(曺欽)은 신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토함산에 들어가"천년왕업일조진(千年王業一朝塵) 백수고신루만중(白首孤臣淚滿中) 차문수양하처시(借問首陽何處是) 토극명월자상친(吐 明月自相親)"이란 시문을 남기고 여생을 보냄으로서 신라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그런데 조 흠(曺欽)의 아들 조 겸(曺謙)은 고려태조 왕건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결혼하여 태조의 부마(駙馬:사위로 부마도위의 줄임말)가 되었고 대악서승(大樂暑丞)의 벼슬을 지냈는데 그가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중흥시조이다.이후 조겸(曺謙)의 손자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를 지냈고 다시 6대 뒤에 조송무(曺松茂).조송군(曺松君).조송학(曺松鶴)의 3형제를 비롯하여 6대에 걸쳐 소감(少監:비서성의 종4품)을 배출하여 창녕조씨(昌寧曺氏)문중이 크게 중흥되었다.특히 조자기(曺自奇)는 고려 현종조에 거란과 여진족의 침입을 여러차례 토벌한 명장(名將)으로 고려말에 활약했던 무장(武將) 조민수(曺敏修)와 더불어 창녕조문(昌寧曺門)이 자랑하는 큰 인물이다.조민수(曺敏修)는 공민왕 때에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맞아 이를 섬멸하였고 우왕 초에는 경상도 순문사(巡問使:순문사는 고려말에 설치된 양계(서북면,동북면)지역의 장관,1389년(공양왕1)에 도순문사를 절제사로 고쳐 재추로서 맡겼음)로도처에 들끓던 왜구(倭寇)를 토벌한 명장(名將)이었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으뜸벼슬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정승)에 이르렀다.뒤에 정권을 장악하려는 이성계일파의 야심에 반기를 들었다가 창녕(昌寧)으로 귀양가서 죽은 지조있는 장군으로 유명하다.창성부원군 조민수(曺敏修) 장군의 아버지는 역시 창성부원군에 봉군된 조우희(曺遇禧)이며 조익수(曺益修)는 조민수 장군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조선초에 병마절제사를 지냈고 조민수장군의 할아버지는 조원주(曺元柱)이다.창성부원군 조우희의 묘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60호에 지정되어 경남 창녕군 남지읍 성사리(관동) 산172-1번지에 있는데 조우희 장군의 묘는 봉분(封墳)이 특이하고 거대하여 인근에서는 조능(曺陵) 또는 왕능이라 불린다. 이 분묘는 고려시대의 형식을 가지고 있어 당시의 묘제(墓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조민수의 아들 조린(曺璘) 역시 조선 태종이 한성부윤(漢城府尹:종2품 서울시부시장)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불응하여 고려에 대한 절개를 아버지와 같이 지켰다.창녕조문(昌寧曺門)이 내세우는 고려조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벼슬이 좌정승(左政丞:문하시중이 바뀌어 좌.우정승으로 나뉜 종1품)에 이르렀던 양평공(襄平公) 조익청(曺益淸)을 빼놓을 수 없다.그는 충숙왕 때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3대의 왕에 걸쳐 사직(社稷)을 보필한 공으로 창녕조씨에서는 유일하게 왕묘(공민왕 恭愍王)에 함께 배향(配享)되었다.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조민수(曺敏修) 장군의 영향으로 자손들이 벼슬을 멀리하고 초야(草野)로 많이 돌아갔다고는 하나 조석문(曺錫文)은 세조때 영의정(領議政:정1품정승)까지 지낸 명신(名臣)이었다.그는 세종 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여 여러벼슬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정3품 왕의 비서실장)가 되었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뒤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그는 청렴한 대신으로 알려졌으며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았다.성종때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널리 알려진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당시 사림(士林)의 거유(巨儒)인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처남이며 수제자(首弟子)로서 두시언해(杜詩諺解),유배가사(流配歌辭),만분가(晩憤歌)를 지었으며 성리학에도 통달한 대표적인 학자이다.조위(曺偉)의 동생인 적암(適庵),조신(曺伸) 역시 문장가(文章家)로서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역관(譯官)으로 10여 차례 일본.연경(燕京) 등지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외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한편 조선조유학의 대표적인 석학(碩學)으로 추앙받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시호 문정 文貞)은 창녕조씨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남명은 영남학파의 태두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으며,낙동강 이남은 남명,낙동강 이북은 퇴계의 학풍으로 학파가 양분 공존하였다.지난 2001년에는 남명 탄생 500주년 기념 세미나가 전국 각지에서 열렸으며 남명의 경사상(敬思想)은 퇴계 사상과의 비교연구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그는 학문이 뛰어났으나 벼슬을 탐하지 않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사림(士林)들에게 불의(不義)에 항거(抗拒)할 줄 아는 선비정신을 심어 주었으니 그가 죽은 지 5년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제자였던 홍의(紅衣)장군 곽재우(郭再祐)를 위시한 57명의 문하생(門下生)이 의병을 일으켰던 것도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남명(南冥)은 조정(朝廷)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고 경남 산청(山淸)의 두류산(頭流山) 기슭에 있는 속칭 덕산(德山)마을에 은거 후학들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사후(死後) 선조 때에 대사간(大司諫:왕의 잘못을 간하여 바로잡던 사간원의 정3품)에 광해군 때는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추증되었다.그밖에도 많은 자손들이 창녕조문(昌寧曺門)의 정신을 이어받아 문중을 빛냈다. 양평공(襄平公) 조익청(曺益淸)의 맏아들 조의충(曺義忠)이 상호군(上護軍:정3품)을 둘째아들 조신충(曺信忠)은 희천군수(熙川郡守:종4품)를 지냈으며,조신충(曺信忠)의 다섯 아들 가운데 조상보(曺尙保)가 사의(司議)였고 조상정(曺尙貞)이 현감(縣監:종6품),조상치(曺尙治)가 부제학(副提學:홍문관의 정3품)의 벼슬을 지냈다.특히 조상치(曺尙治:시호 충정 忠貞)는 세종.문종.단종조에 걸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영천(永川)으로 은거하였으며 노산조부제학보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는,<즉, 노산조(단종때)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조상치의 묘>묘비를 미리 써놓고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스스로 밝혀 절의를 지켰다. 조선후기 정조때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려졌다.또한 조상치(曺尙治)의 증손 조계은(曺繼殷).조계상(曺繼商)형제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으로 창산군(昌山君),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창녕군(昌寧君)에 각각 봉해져 명성을 떨쳤는데,창산군 조계은(曺繼殷,자는 준성遵聖)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조구서(曺九敍)의 아들이며 판중추부사 조계상(曺繼商)의 형이다.조계은형제는 1506년(중종 1)연산군의 폐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4등에 책록되었다. 1511년 별시문과(別視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보던 대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목사(牧使:정3품).종부시 정(宗簿寺正: 종부시는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을 편집 기록하고 종실(宗室)의 잘못을 조사 규탄하는 임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며 정(正)은 정3품)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에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한것으로 전해진다.창산군(昌山君)에 봉하여졌다.동생인 조계상(曺繼商)은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감사원 감사위원)을 거쳐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중추부의 종1품)에 이르렀다.중종반정(1506년9월2일)은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으로 옹립된 사건을 말한다.성희안과 박원종,유순정,조계은.조계상 형제등은 밤에 궁궐로 진격하고, 군자감부정 신윤무와 훈련원에 장사(壯士)를 모아 광화문 밖에 있던 임사홍(任士英)등을 살해하고 궁중의 측근자를 없앤 다음 성희안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자순왕대비'의 하명을 받고 자고 있던 연산군을 습격해 옥새를 빼앗아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喬桐)에 안치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중종이다.그리고 중종은 반정에 공을 세우거나 가담한 사람들 169명을 "정국공신"에 책록하고 벼슬을 내렸다.연산군은 강화도에 귀양을 가 3개월 후인 12월에 사망하였다.특히 조계상(曺繼商)의 후손들 가운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조계상(曺繼商)의 아들 조광원(曺光遠)이 명종 때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을 역임했고 증손 조문수(曺文秀)는 시문(詩文)과 글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조문수(曺文秀)의 아들인 회곡(晦谷) 조한영(曺漢英)은 인조 때 배청파(排淸派)로 지목되어 김상헌(金尙憲).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심양(瀋陽)까지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고초를 겪었으며 조한영(曺漢英)의 현손 동포(東浦) 조윤대(曺允大)는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냈고 명필가(名筆家)로 이름을 떨쳤다.조윤대(曺允大)의 아들 신암(愼庵) 조봉진(曺鳳振)과 조봉진의 조카 연암(烟岩) 조석우(曺錫雨).하강(荷江) 조석여(曺錫輿) 등이 모두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중종때 대구부사(大邱府使:정3품 외관직)를 지낸 조치우(曺致虞)는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이름이 났다.조치우(曺致虞)의 증손 조광익(曺光益)과 조호익(曺好益)이 모두 성리학에 통달한 대가(大家)로서 특히 조호익(曺好益)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을 연구 관서(關西)지방의 학풍진작(學風振作)에 기여하였다.공민왕 때 예조참판(禮曹參判:종2품 차관)이던 조서(曺庶)는 태조 때 홍범대전(洪範大全)을 써올려 나라의 규범을 바로잡고 태종 때 왕명으로 명나라에 들어가 명제(明帝)로부터 도해배(桃亥盃)를 하사받아 지금도 전북 고창의 정산사(鼎山祠)에 보존되어 있다.역시 중종때 성주목사(星州牧使:정3품)를 역임한 조세우(曺世虞)는 일찍이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당시에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 김안로(金安老)와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세도를 앞세워 갖은 비리와 폭정을 일삼는 것을 목격하고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들과 뜻을 모아 거듭 상소한 끝에 그 일당을 몰아내고 기강을 바로 잡았다.또 재종손(再從孫)인 조응남(曺應南).조진남(曺鎭南) 형제와 종손인 조 열(曺悅)은 임진왜란 때 창녕 대산진(臺山陣)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뒤 형제가 순절(殉節:나라위해 목숨을 바침)하여 그 충공(忠功)으로 정려(旌閭:충신.효자 등에 대하여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워 기리던 일)되었으며 조 열(曺悅)은 훈정(訓正)에 서수(除授)되었다.연산군 때 사헌(司憲)을 지낸 조숙소(曺淑 )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조에 왜구와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종1품 정승반열)에 이르렀다.조몽정(曺夢禎)의 아들 조탁(曺倬)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모시고 따르던 일), 정난선무공신(靖難宣武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왕에게 부흥책십조(復興策十條)를 올려 국무(國務)에 실시케 하였으며 광해군 때 그가 소장했던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 왕조에서 뛰어난 치적을 기록한 책)을 진헌(進獻임금에게 예물을 바침)하여 이 책을 대본(臺本:어떤 토대가 되는 책.저본) 삼아 다시 간행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데 공헌을 했다. 조숙소(曺淑 )의 손자인 장호공(莊湖公) 조윤손(曺潤孫),중종반정 때의 공신 조계형(曺繼衡), 인조 때에 우부승지(右副承旨:승정원의 정3품)를 지내고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으로 불리웠던 매호(梅湖) 조우인(曺友仁) 등도 두드러진 인물들이다.또한 소감(少監) 조송학(曺松鶴)의 증손이며 진사(進士) 조적(曺適)의 아들인 조익순(曺益順)은 고려조에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문관 품계)의 품계에 이르러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조광한(調匡漢).직제학(直提學:예문관.홍문관 3품) 청구당(靑邱堂) 조계방(曺繼芳)이 배출되었다.그리고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을 지낸 조박(曺珀)의 아들로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에 오른 조수익(曺受益)과 역시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로도 이름이 났던 조문택(曺文澤),시중(侍中:종1품 정승) 조목남(曺目南)의 손자이며 고려말에 신돈(辛旽)을 탄핵했던 철야군(鐵冶君) 조정통(曺精通)이 명성을 떨쳤다.조정통의 다섯 아들인 조경룡(曺慶龍).조응룡(曺應龍).조한용(曺漢龍).조변용(曺變龍).조견용(曺見龍) 등이 모두 두드러진 인물들이며 이들에게서 비롯된 자손들이 번창하였다.감무공(監務公) 조신의(曺臣義)의 증손 조유인(曺由仁)은 판부사(判府事)로 대과(大科:문과)급제하여 문중을 빛냈으며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 조용기(曺用奇)의 후손인 상서(尙書:정3품벼슬. 장관) 조희우(曺希遇)에게 6대손이 되는 조홍립(曺弘立)은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형조정랑(兵曹.刑曹正郞:정5품)을 거쳐 여주목사(驪州牧使:정3품)를 지냈고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품계)에 올랐다.

목록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자료관리 담당부서 : 효문화마을관리원 > 뿌리공원과 > 뿌리공원담당 연락처 : 042-288-831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