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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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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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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씨출우대방국야(廉氏 出于 帶方國也)"염씨(廉氏)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토착민파주염씨(坡州廉氏)는 고려 개국후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940년에 고려 태조가 후삼국의 통일에 공이 큰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면서 제정되었으며 940년 신흥사를 중수할 때 공신당을 세우고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는데 이 벽에 그려진 공신을 말함)에 책록된 염형명(廉邢明:대사도(大司徒)를 지냄)을 시조로 받든다.시조 이전의 인물 중에도 염씨廉氏)가 문헌에 나타나는데 국보 제104호인 "염거화상탑"의 장본인인 고승 "염거"와 서기 647년(선덕여왕16)에 국정에 참여했던 염종,그리고 648년(진덕여왕1) 6공(六公)중 한사람으로 청해진의 장보고를 살해하고 대신을 지낸 '염장'등이 있으나 이들의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고려 초에 활동하여 염씨(廉氏)가문을 일으킨 염형명(廉邢明)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염거[廉居: ~844(문성왕 6)]는 신라 말의 선승으로 염거(廉巨)라고도 하며 가지산파의 2대 조사이다. 도의의 제자로서 도의가 진전사에서 입적할때 오직 그에게 전심하고 선을 널리 펼 것을 당부하였다.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무르면서 선법의 홍포에 주력하였고 사교를 배척하였다.항상 일심을 닦고 밝혀서 삼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선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시대에 오직 일념무주(一念無住)만을 의지하고 지내다가 체징에게 법맥을 전하여 가지산파를 대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뒤 입적하였다.탑은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법흥사지에 있었으나 국보 제104호로 지정되어 경복궁 경내에 있으며,이전에 발견된 지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부도는 원래의 위치에서 서울로 옮겨진 후에도 탑골공원에 놓여지는 등 여러 곳을 옮겨다니다 현재의 위치에 안치되었다. 이전 당시에 탑 안에서 금동탑지판이 발견되어 844년(신라 문성왕 6년,당 회창 4)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명문은 다음과 같다.(會昌四年歲次甲子秀秋之月兩旬九日遷化 廉居和尙塔去釋迦牟 尼佛入涅槃一千八百四年牟 當比國慶應大王之時) 회창 4년 갑자년 늦가을 29일 세상을 뜨다. 염거화상탑은 석가모니불이 돌아가신지 1804년에 세우니 이는 신라 문성왕 때다.시조 염형명(廉邢明)은 후삼국 말에 출생하여 고려 초까지 봉성현(지금의 파주)에 살았으며 고려의 개국과 후삼국의 통일 과정의 공적으로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고 대사도(大司徒조선조에서는 호조판서를 대사도라 함)에 올랐다.염씨(廉氏)의 중시조는 고려때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던 종1품 정승)을 지내고 곡성부원군에 봉해진 염제신(廉悌臣:1304년 출생~1382년,호는 매헌(梅軒),시호는 충경공 忠敬公)이다.중시조(中始祖)염제신은 시조의 13세손으로 1304년에 출생하였으며 일찌기 아버지 염세충(廉世忠)를 여의고 11세 때에 원나라에 들어가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고려의 품계로는 정2품 부총리)를 지낸 고모부 말길 집에서 10년 동안 수학하였다고 하며,원나라의 태정(泰定)왕에게 발탁되어 숙위(宿衛)로 있던 중 태정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고려에 있는 어머니를 잊지 못해 왕에게 간청하여 정동성의 낭중(?中:고려에서는 6부와 6조의 정5품)이었을때 돌아온 후 고려의 다섯왕(충숙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우왕)을 30여년간 섬겼다.그는 충목왕때 익대공신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고려때 돈과 곡식의 출납 회계에 관한 일을 맡아본 관청의 정3품,공민왕때는 정2품으로 승격),도첨의평리(評理:첨의부의 종2품 재신),찬성사(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부총리)를 역임하고,공민왕때 상호군(上護軍:정3품 상장군),도총도감을 거쳐 영삼사사(領三司事),춘추관사(春秋館事:시정의기록을 맡아본관아로 충숙왕 12년에 예문.춘추관을 두 기관으로 나눈것)를 지냈다.이어 도첨의 좌우정승(都僉議 左.右政丞:백관을 통솔하던 최고행정기관의 종1품 정승)에 올랐으며,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忠誠守義 同德論道 輔理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이르러 곡성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염제신은 관직으로 있을때 30년동안 왜구의 침입을 평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공민왕은 그의 공을 높이사 친히 유상(遺像:초상화)을 그려 하사 하였는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염제신(廉悌臣)(1304∼1382,시호 충경)의 초상화(보물 1097호)는 가로 42.1㎝, 세로 53.7㎝이다.염제신(廉悌臣)은 고려의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등 5왕을 섬긴 중신(重臣)으로 충성수의동덕론도보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곡성부원군(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충경(忠敬)이다.초상화는 머리에 두건을 쓰고 오른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안면은 회색빛을 띠며, 눈썹과 모발, 수염은 흑·백의 가는 선을 이용하여 묘사하였다. 눈시울은 붉은색으로 명암을 넣었고,눈꺼풀은 가는 먹선으로 처리한 후 속눈썹을 일일이 그렸다. 옷은 연보라색 바탕에 보라색 선으로 덩굴무늬가 그려져 있다.목은문고(牧隱文藁) 권(卷)15의 염제신(廉悌臣) 비명(碑銘)에 보이는 "(공민왕이) 친히 얼굴을 그려 하사했다[친도형사지(親圖形賜之)]""현릉께서 친히 초상화를 그려주니 위대한 공덕이 단청에 빛나도다[현릉친도기형풍공성덕환호단청(玄陵親圖其形豊功盛德煥乎丹靑)]"라는 기록이 있다.염제신은 부인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婦人)안동권씨와의 사이에 3남5녀를 두었으며,3남인 염국보,염흥방,염정수가 모두 과거에 급제 하였고,서출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염혜주는 통제원 주지,염광원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궁중의 수레와 마필을 관리하던 관아의 벼슬)를 지냈다.염제신(廉悌臣)은 1382년 3월 18일 79세로 죽었으며 묘는 북한의 장단군 강남면 대곡에 있다. 목은 이색이 찬(撰:지음)하고 청성공 한수가 글을 쓴 신도비(神道碑:정2품 이상을 지낸 사람의 묘소 앞에 세우는 비)가 묘소앞에 세워져 있다.염씨(廉氏) 유래에 대해서는 <파주염씨 전자족보>에 의하면"염씨는 대방국(帶方國)에서 부터 왔다"는 것이다.조선 선조때부터 인조때까지 활동한 조여적(趙汝籍)이 쓴 청학집(靑學集)에 "염씨출우대방국야(廉氏 出于 帶方國也)"라고 기록되어 있다.따라서 이 문헌을 근거로 "염씨"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토착민"이며 토착성씨로 본다는 것이다.한편 파주염씨는 서기 25년경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였던 <염사치>가 살기 좋다고 하는 낙랑(樂浪)으로 무리를 이끌고 이주한 후 공을 세워 성씨(姓氏)와 관모(冠帽)및 전택(田宅)을 하사받았다는 위략(魏略)과 해동역사(海東繹史)를 근거로 <염사치>를 최초의 득성조(得姓祖:성을 처음 갖게된 조상)라고 보고 있다.파주염씨는 파(派)를 구분하지 않는데 이는 타 성씨에 비해 인구수가 많지 않기에 분파의 구분이나 그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굳이 분류 한다면 국파공파(菊坡公派),동정공파(東亭公派),청강공파(淸江公派)의 3파로 나눌수있다..파주염씨는 조선시대에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1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파주염씨는1985년에는 12,108가구 51,189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6,628가구 53,539명이었다.파주는 경기도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각각 파평현(坡平縣)과 봉성현(峰城縣)으로 각각 개칭하였다.1018년(고려 현종9)에 파평현을 장단현(長端縣)으로 바꾸었고,1172년(명종2)에 감무(監務:작은 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설치되면서 독립하였고,1506년(중종1)에는 파주목으로 복귀되었으며,파주는 예전에 영평(領平)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교하군이 폐지되어 파주에 병합되었다.196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단군(長湍郡) 군내면(郡內面) 조산리(造山里)가 파주군에 편입되었고 1996년 파주군이 시(市)로 승격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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