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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씨(車氏)는연안차씨(인구161,325명).경주차씨(6,294명).고령차씨(1,772명).광산(836명).나주차씨(1,235명).남해차씨(394명).대구차씨(1명).대전차씨(169명).문화차씨(613명).밀양차씨(759명).송림차씨(198명).수원차씨(1,591명).안성차씨(698명).영월차씨(743명).영일차씨(334명).용성차씨(359명).원주차씨(1명).전주차씨(605명).정안차씨(274명).진주차씨(538명).천안차씨(446명).초계차씨(1명).평강차씨(3명).평산차씨(276명).평택차씨(256명).해주차씨(623명)등 총 26본관에 2000년조사에서 180,589명이었다.우리나라 차씨(車氏)의 본관은 연안(延安)차씨와 용성(龍城).남해(南海).평산(平山)차씨 등이 문헌에 전해지나 <연안차씨>단본이며 나머지는 분파 세거지(世居地)라고 한다.연안차씨(延安車氏)는 문헌과 <연안차씨 대종회>에 따르면 고대중국의 황제(黃帝) 희헌원(姬軒轅)의 후손인 사신갑( 辛甲)이 고조선때 평양의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하여 살면서 성(姓)은 왕씨(王氏)로 이름은 조명(祖明)으로 하고 살았다고 한다. 고조선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7남 림(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다.이때 왕몽은 자손번창을 이유로 왕씨(王氏) 성자(姓字)를 전자(田字), 신자(申字)로 개성(改姓)하다 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을 차무일(車無一)로 하여 차씨(車氏)의 시원을 이루었다고 한다.신라가 경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차무일(車無一)은 나라에 공을 세워 그 공훈(功勳)으로 시중(侍中:정승)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차씨(車氏) 성을 받아 차씨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으며,차무일의 8형제 중 일곱째인 차신을(車神乙,왕림)이 차씨(車氏)의 성(姓)을 계승하여 후손대(代)에서 25명의 승상이 배출되어 <명문대가>의 기틀을 다졌다.차무일의 32세손인 차건갑(車建甲)은 신라 39대 소성왕때 승상(丞相:왕조시대에 왕을 보필하던 최고관직으로 정승에 해당하며,우리나라에서는 서기1280년(충렬왕6)원나라에서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의 최고관직을 승상이라 함)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이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이에 따라 차건갑은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로 왕위에 오른 애장왕을 보필하다가 아들인 차승색(車承穡)에게 다시 왕을 보필 할 것을 부탁하고 죽자 애장왕이 왕례로서 부산시 기장군 만화동에 그를 예장(禮葬:조선때 예도를 갖추어 치르는 장례.국장 國葬)토록 하였다.이때부터 이곳을 차릉(車陵,승상 차건갑의 묘,부산시 기장군 만화동)이라 하게 되었으며 기장현도 차성(車姓)이라 불렀다. 또 신위도 소성왕 종묘에 배향 하였다.이때 애장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헌덕왕이라 하였다.차승색(車承穡)은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유주(문화의 당시 지명)의 <구월산 목방동>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성(姓)을 할머니 성을 따라 양씨(楊氏)로 고치려다 변양위류(變楊爲柳:양씨의 성을 모방하여 류씨로 만듬)하여 류씨(柳氏)로 성을 바꾸고 이름도 색(穡)으로 고쳤으며 아들 공숙도 숙(淑)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차달에 이르러 그 지방의 호부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이후 차달(류차달)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정벌할 때 군량보급이 어려움을 알고 재산을 털어 수레 1천량을 제작하여 군량을 보급해준 공으로 익찬벽상공신에 서훈되고 벼슬이 대승(大丞)에 올랐으며 차달(車達)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대승(大丞)은 고려초기 문.무관 16관계 중 제5위에 해당하는 향직 3품으로 지방호족에게 수여되었으며 후에 흥록대부로 고쳐졌다.그의 조상에서 성을 바꾼 사실을 안 고려 태조가 "차씨의 공을 잊을 수 없고 류씨로 성을 바꾼지 6세가 지났으니 류씨도 없앨 수없다."하며 차달(류차달)의 아들 차효전에게는 대광백에 봉하고 연안(延安)을 식읍(食邑:고을의 조세를 받아쓰게 하는것)으로 하사(下賜)하고 차씨(車氏)를 계승하게 하여 <연안 차씨>의 시조가 되었다.차승색의 둘째아들 차공도(車恭道)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구성(舊姓)인 왕씨로 복성 하였는데 이 차공도가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증조부인 원덕대왕(元德大王)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차씨는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고려시대의 차씨(車氏)는 왕씨(王氏)와 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차원부설원기(車原 雪寃記)이 차원부설원기는 고려말의 충신이며 성리학의 대가였던 운암공(雲巖公)차원부의 억울한 죽음을 씻어 주기 위하여 조선왕조 집현전 출신인 박팽년공이 어명에 의하여 찬술한 기록이다.운암공은 고려말인 1320년(충숙왕7년)에 때어났다.자는 사평(事平) 호는 운암(雲巖) 그리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공민왕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요직을 두루거쳐 문하부(門下府)의 간의대부(諫議大夫:간쟁과 봉박을 맡아하던 종3품,전에는 종4품이었으나 1356년(공민왕5)에 종3품으로 승격됨)에 이르렀다.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경사에 두루 통달하였다고 하며, 성리학의 핵인 정통의식 및 대의명분의식에 투철하여 당대의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등의 후배들과 교류하였으며 또한 무장 세력을 대표하였던 이성계등과도 친명대의(親命大義)라는 면에서는 서로 뜻을 같이 하기도 하였다.그림에도 능하여 특히 매화를 잘 그렸다고 한다.운암공 차원부(車元 ,1320~1398,려말선초 학자.화가)의 묘는 경기도 평택시 장안동 월윤산에 있다. <차문문헌편찬위원회 위원장 차문섭(車文燮) 인용>설원기 추천문(雪寃記 推薦文)이번 우리 연안차씨 문중종친회중앙총본부에서는 우리 문중의 가장 오래된 문헌(文獻)이며 우리나라 혈통사血統史(族譜)의 시원(始源)이라 할 수있는 운암공 설원기(雲嚴公 雪寃記) (原名:차원부설원기車原 雪寃記)가 1980年 원문原文(漢文)으로 복사(複寫)되어 발간되었으나 20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후손들이 보고자 하나 어려운 한문漢文으로 되어있어 선조님들의 위대한 업적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그리하여 1996年 9月부터 이에 대한 국역사업을 벌여 우리 차문이 태종 방원과 하륜河崙등 일당一黨에 의해 학살(虐殺)된지 600年이 되는 1998년에 완간完刊을 보아 이를 배포配布케 되었습니다.우리가 지금까지 이렇게 중요한 내용들이 이 문헌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음에 심히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생각컨데 우리는 신라와 고려조를 통하여 28대(代) 나 승상(丞相)을 배출(配出)했다거나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하여 자존심自存心을 가지고는 있어도 막상 이를 확인시켜줄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를 대지 못하고 그저 객관적인 증거가 희박한 족보族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우리의 실정이었습니다.참으로 오랜 기간 고난을 겪었습니다.이제는 우리가 큰 기침하며 그 어떤 문중門中보다도 그 어떤 명문名門의 집안과도 떳떳하게 내어 놓고 한판 따져볼 수있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을 선언(宣言)합니다.왜냐하면 이 설원기雪寃記는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요 우리 역사상 절신중(節臣)中에 절신節臣인 박팽년공朴彭年公께서 죽음을 각오(覺悟)하고 쓴 책이며 마찬가지로 사육신중死六臣中의 우두머리인 성삼문成三門,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류성원공柳誠源公을 비롯한 조선초기의 쟁쟁한 48人의 명신名臣들이 응제시(應製時) 등을 통한 공동참여하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역사실록(歷史實錄)을 쓰는 춘추정신(春秋精神)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더 큰 뜻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모든 기록은 춘추사관(春秋史官)들이 쓴 정사(正史)의 기록보다도 더 신빙성(信憑性)과 정확성(正確性)이 있다는 것입니다.여하튼 모든 내용은 이제 이 책안에 있으므로 자존의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는 구차하게 설명說明하지 말고 버티고 앉아서 슬그머니 이 책을 내어 놓으면서 한 번 읽어보고 이야기 하자고 하면 아무리 자기집안이 명문名門집안이라고 소위 왕족王族이라고 떠든다 하더라도 슬그머니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연안차씨종친중앙총본부>한편 <문화류씨대종회>는 문화류씨 유래와 역사에 대해서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조상이 하나라는 류차동원(柳車同源)에 입각한 묘사는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며, 류차동원은 그 출처를 추적해보면 조선 중기에 비로소 조작되어 세상에 나온것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문화류씨대종회는 "문화류씨는 그 자출(自出:근원)이 신라말~고려초에 황해도 구월산아래에서 류씨가문을 처음 일으키신 시조 대승공 류차달이며,"대승공은 아들이 류효금(柳孝金) 한분"이라고 천명하고 있다.또한 <류차동원설:류차동원설은 류주환교수 명명>을 다년간 연구해온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류주환교수는 "차원부설원기" 자체가 위작(僞作)이고 그 내용도 전부 믿을 수 없음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며, 이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이나 여러 역사학자들의 공식 반응들이 근거"라면서 "그런 거짓 책에서 비로소 시작된 얘기를 진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류주환교수는..<중략>..."저는 이런 사전류, 특히 인터넷 사전류의 정정이 급선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우선 대상으로 선정하고 그곳의 차원부 및 관련 항목들을 삭제 혹은 최소한 수정하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이 사전은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라는 기관에서 발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설원기가 위작임을 증명하는 글을 작성해서 2008년 7월 1일자로 정정 요청을 송부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요구한 것은 차원부 및 설원기 관련 항목의 내용에서 사실이 아닌 것들은 삭제해달라는 것과, 나아가서 그렇게 되면 해당 항목들이 표제어로 올라 있을 가치가 없기 때문에 아예 항목 자체를 삭제하는 것을 검토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8월 5일자로 그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에 관한 사항임을 생각하면 무척 신속한 답변을 받은 것이라 생각됩니다.답변 내용은 저의 요구 사항의 전적인 수용입니다. (실질적인 변경은 일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2011년에 반영될 예정이라 합니다.) 저의 심정으로는 하루 빨리 그 거짓 정보들이 삭제되기를 바라지만 설원기가 권위 있는 책으로 인식되어 내려온 것이 무려 수백 년입니다. 지금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설원기가 위작임을 인정했다는 사실 자체만도 실제 아주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충남대학교 교수 류주환>차씨(車氏)는 고려 말기부터 가문이 번창하여 대대로 벼슬에 올랐는데 17세손으로 사관직사(史館直事:사관은 고려때 시정의 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이며 원나라의 간섭으로 예문관과 합해지기도 하였는데 사관은 조선때의 춘추관과 같음)를 지낸 차거수(車擧首)는 병부시랑(兵部侍郞:정4품 국방부 차관)을 지낸 차약춘(車若春)과 수태위(守太尉:국가의 최고원로에게 내리는 왕의 자문역으로 명예직)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부총리)에 오른 차약송(車若松)두 형제를 두었다.16세인 차송우(車松祐)는 고려 고종때의 공신으로 그의 후손에서 연안차씨(延安車氏)는 문학공파(文學公派:차수동 車壽童).전서공파(典書公派:차명동 車命童).월파공파(月波公派:차종노 車宗老).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차덕규 車德珪)의 4파로 크게 갈라진다.그중 월파공파(차종노)가 주축으로 다시 17파(派)로 분파한다.고려 공민왕때 군부판서(軍部判書:정3품 장관)로 용산군(龍山君)에 봉해진 차포온(車浦溫)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때 국방 및 외교가로 뛰어난 활약을 한 고려의 명신으로 연안차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또한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로 고려조에서 간의대부(諫議大夫고려 문하부의 벼슬로 봉박과 간쟁을 맡아하던 3품 간관)를 지낸 운암공 (雲巖公) 차원부(車原 :시호 문절)는 월파공 차종노의 셋째아들인데 포은 정몽주 등과 같이 교유하였으며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절신으로 유명하다.그는 정도전,하륜 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되었다고 하며 차씨문중도 멸족지화를 당하였다.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태조의 질책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차원부의 영혼을 위로하는 치제(致祭)를 명하였으며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종1품 벼슬) 벼슬을 추증했다.그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정승으로 고려부터 조선초기까지의 관직)에 증직되었으며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세조2년에 왕명으로 박팽년(朴彭年) 외 5인의 기문(記文)과 유신석학(儒臣碩學) 48인의 응제시를 모아 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가 서문을 지어 엮은 "차운암 선생 설원기(車雲巖先生 雪寃記)"에 의하여 억울한 사실이 소명되어 광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차씨문중에 대한 수난은 계속 되었다.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를 맡아보던 추밀원의 정3품 벼슬로 1095년(헌종1)에 중추원부사를 고친것)와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벼슬)를 거쳐,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낸 차약송이 가문을 빛냈으며,병마사(兵馬使: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의 무관)를 지낸 차덕위의 아들 차치척이 고종때 어사대부(御使大夫:정3품 어사대의 장관으로 어사대는 시정(時政)에 대한 논술,풍속의 교정,관리들에 대한 규찰을 맡아보던 관청)와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벼슬)를 역임하여 가세를 크게 중흥시켰다.차원부의 조카 차운혁은 "이시애의 난"때 순절하여 적개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삼강행실록"에 기록되었다.서경덕의 문인으로 문명을 떨친 차천로(車天輅:호는 오산)는 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왕이 성균관에 거둥한 후 보던 과거시험)에 급제하고 개성교수와 정자(正字:문서의 교정등을 맡아보던 정9품벼슬)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그는 고향사람 여계선이 과거를 볼때 표문(表文:임금에게 표로 올리던 글)을 대신 지어줘 장원급제시킨 일로 유배되었으나,문재(文才)가 뛰어나 풀려나왔으며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담당하여 <동방문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임진왜란때는 평양성 수복의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문장가로 당대의 거성이었다.차천로는 문장력과 성품으로 한석봉의 글씨,최립의 문장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 졌으며 가사(佳詞:좋은 말,아름다운 글귀)와 글씨에도 뛰어났다.또한 아우인 차운로(車雲輅)는 서기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謁聖文科:성균관에 왕이 거둥한 후에 보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이름을 날렸고 여러벼슬을 거쳐,봉상시 판관(奉常寺 判官:제사와 시호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종5품)을 지냈으며,명사였던 마상원과 함께 양차일마(兩車一馬)로 불리워졌고,차천로의 형 차은로(車殷輅)도 문장(文章)에 뛰어나 3형제가 차문(車門)의 명예를 드높였다.문학공파의 인물로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절한 차충량(車忠亮)과 차예량(車禮亮) 형제 그리고 종제인 차원철(車元轍),차충량의 아들 차맹윤(車孟胤)이 있는데 이들을 가리켜 <차문 4의사(車門 四義士)>라고 한다.연안차씨는 임진왜란때에도 많은 의사와 열사가 나왔는데 함경도일대에서 의병으로 싸운 차득도(車得道).차응린(車應麟).차덕홍(車德弘)의 3의사(義士),평안도 등의 일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운 차은진(車殷軫).차은로(車殷輅)의 쌍의사(雙義士)가 유명하다.이밖에 광해군때 요동 출병에 선천부사(宣川府使:정3품 외관직) 김응하(金應河)의 휘하에서 순절한 차재중(車載重) 등 <육절사>가 있다.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차운혁(車云革)과 조선후기 헌종 때 서예가로 이름난 차헌규(車憲奎) 등이 가문을 크게 빛냈다.이밖에 조선 순조때 시문가(詩文家)로 이름을 날린 차좌일(車佐一)은 차천로의 6대손으로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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