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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이태백 이규보,무인정권시대에 붓으로 나라를 움직여이규보<마음의눈물>에서....눈물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랍니다"동방 4현 이언적 성 호 이 익 택리지 이중환신유박해의 이승훈.이가환과, 336명의 과거급제자 배출삼한갑족(三韓甲族: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의 명문여주이씨(驪州 李氏)는 고려의 인용교위(仁勇校尉:고려시대 무산계 武散階 정9품(上) 관직으로 전(田) 20결 하사받음)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받드는 파(派)와 낭중(?中:고려때 6조와 6부의 정5품)을 지내고 호부시랑(戶部侍郞:정4품차관)에 오른 이윤수(李允綏)를 시조로 받드는 파(派),그리고 이언적(李彦迪:시호는 문원 文元)의 선조로서 진사(進士:조선시대에 소과(小科)와 진사(進士)과에 급제한 사람)를 지낸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받드는 파(派)등 3파(派)가 있다.문헌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문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를 비롯하여 조선초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이언적(李彦迪),실학(實學)의 중조격인 학자 성호 이익(李瀷),종교운동에 헌신하다가 신유교란(辛酉敎難:1801년(순조1)에 발생한 조선의 천주교회 박해 사건으로,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 신유박해)때 이승훈(李承薰) 등과 함께 순교한 이가환(李家煥),지리학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일명 팔역지(八域志)를 저술한 이중환(李中煥) 등의 유명한 문신(文臣)과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밖에도 공양왕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고려때는 제찬(制撰)과 사명(辭命)을 맡아보던 관청의 종2품문형)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장관)를 지낸 이행(李行), 세조때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를 지낸 이몽가(李蒙哥)와 선조때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법무장관).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의정부의 정2품)에 올라 청백리(淸白吏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도덕.경효(敬孝).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 이상적(理想的)인 관료상으로 의정부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며 총 217명 배출)에 녹선된 이우직(李友直) 등이 여주이씨를 크게 빛냈다.교위공파(校尉公派) 고려때에 인용교위(仁勇校尉:고려시대 무산계(武散階) 정9품 상(上)의 벼슬로 전(田) 20결 하사 받음)를 지낸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받든다.고려때는 황려(黃驪)로 조선시대에는 여흥(驪興) 또는 여주(驪州)로 사용하였으며, 간혹 본관을 영의(永義)로 사용하는 지파(支派)도 있었다.문순공파(文順公派) 중윤(中尹:고려때 향직(鄕職)의 하나로 9품 하 下)를 지낸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받들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시조로 받든다. 하음(河陰:현재의 강화)을 본관으로 사용한 지파도 있었다. 경주파(慶州派) 고려때의 진사(進士:소과와 진사과를 급제한 사람)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받들며, 여강(驪江)을 본관으로 사용해 왔었다.여주이씨(驪州李氏) '3파 시조'들은 고려 중엽부터 경기도 여주(驪州)에 자리잡고 세력을 떨치던 호족들이며, 후손들은 시조는 다르면서도 오래전부터 한 뿌리라는데 의견을 같이해, 조선시대부터 대동보(大同譜)를 함께 만들어 왔다.이들 3파는 경기도 여주를 근거지로 하였기에, 후손들은 여주를 본관으로 삼고 있다.여주(驪州)는 경기도 여주시의 옛 지명으로, 서기 940년(태조 23)에 황려현(黃驪縣:황리현 黃利縣)으로 바뀌었다.서기1388년(우왕14)에는 황려부(黃驪府)로 다시 승격하였다가, 1389년(공양왕 1)에는 여흥군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401년(태종 1)에 음죽현(陰竹縣)의 북부를 편입하여, 여흥부(驪興府)로 승격되면서 관할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변경되었다.1413년(태종 13)에는 도호부(都護府지방행정기관과 한가지로 75개 지방에까지 설치되었음)가 설치되었고, 1469년(예종 1)에 세종대왕 능인 영릉(英陵)을 왕대리(旺垈里)로 옮기면서 천령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驪州牧:목은 정3품이 다스림)으로 승격하였으며, 1501년(연산군 7)에 여주목을 폐하고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두었다.여주는 여성(驪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1941년 여주면이 여주읍으로 승격하였다.여주이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기위하여 보던 과거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3년마다 시행됨.대과)에 56명 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하여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시행됨)에 31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47명 의과에 1명 주학에 1명 등 33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선비가문으로서의 명성을 지켰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여주이씨는 1985년에는 15,288가구에 인구는 61,907명이었으며2000년에는 22,517가구에 인구는 71,711명으로 조사되었다. [동국이상국집]<동국이상국집>은 53권 13책의 시문집으로 이규보의 아들 이 함(李 涵)이 1241년 전집(全集) 41권을 그 이듬해에 후집12권을 편집하여 간행하였으며 1251년에 고종의 명령으로 손자 이 익배(李益培)가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증보판을 간행하였고 조선때에 여러번 간행했다고 하며 영조때에 복각된 것이 완본으로 전해진다. 전집은 시.부(賦).전(傳)을 비롯한 각종의 문학적인 글들이 25권을 이루고 나머지는 서(書).장(狀).표(表) 등 편지 및 관원으로서 나라에 바친 글,교서.비답.조서 등 임금을 대신해 작성한 글과 비명.뇌문.제축(祭祝) 등 장례나 제사 불교행사에 쓰인 글들이 담겨 있다.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자는 자신 子新)이익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여주이씨(驪州李氏)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이다.그의 아버지는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으뜸벼슬로 현재의 검찰총장)을 지낸 이하진(李夏鎭)이고 어머니는 권씨이다.아버지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이익을 낳았으며 1682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일찍 홀로되어 어머니와 함께 선산이 있는 경기도 광주 첨성리(瞻星里, 현재 안산시 성포동)에서 살았으며 몸이 약해 10세까지도 글을 배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형 이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워 25세가 되던 해인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기념으로 보던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듬해 형 이 잠(李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杖殺)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첨성리로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였으나 경직화된 학풍에서 벗어나 사회실정에 맞는 실용적인 학문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이이(李珥)와 반계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에 심취하였고 특히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여 천문.지리.율산(律算).의학(醫學)에 이르기까지 능통하였다. 1727년 그의 학문이 높다는 명성을 듣고, 조정에서 선공감(繕工監:토목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가감역(假監役:토목 영선(營繕)을 맡아보던 종9품)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763년(영조 39) 83세 때 노인을 우대하는 예에 따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3품 당상관)의 자급(資級)을 내렸으나 그 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에 추증되었다.성호 이 익은 투철한 주체의식과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주요 저서인 성호사설(星湖僿說)과 곽우록(藿憂錄)을 통해 당시의 사회제도를 실증적으로 분석 비판하여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농사상(重農思想)에 입각하여 전제개혁(田制改革)의 방향을 개인의 토지점유를 제한하여 전주(田主)의 몰락을 방지하려는 한전론(限田論)에서 찾았으며 사회신분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노비를 점차적으로 해방시켜 양천합일(良賤合一)을 주장하였고 당쟁이 발생하는 것은 이해(利害)가 서로 상반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분석 양반도 산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이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인재등용은 과거제도에만 의존하지 말고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서 채용하는 공거제(貢擧制)를 실시할 것과 병역문제는 향병제(鄕兵制)를 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무기의 개발과 군마(軍馬) 양성 성지수축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등 여려 방면에 걸친 일대 혁신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손으로 종자(從子)인 이병휴(李秉休)와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이가환 등으로 이어졌고 문인으로는 안정복(安鼎福).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권철신(權哲身).정약용(丁若鏞)으로 계승되었다. 저서로는<성호사설>과<곽우록> 이외에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사서삼경.근사록(近史錄)이있고 편저에 사칠신편(四七新編).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자복편(自卜編).관물편(觀物編).백언해(百諺解) 등이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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