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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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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대의 벌족(閥族), 문과급제자 261명, 궁정음악 개혁한 박연실학의 태두 박제가 등 현달한 인물밀양박씨(密陽朴氏)는 모든 박씨(朴氏)의 종가이며, 밀양박씨에서 10여개의 본관으로 나뉘어지고 밀양박씨 내에서도 여러개로 분파되었으며,이들은 또 여러파로 다시 나뉘어져 있다.본관별 인구에서는 300여만명으로 김해김씨(가락종친회)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박씨 전체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어 그 계보도 상당히 복잡하다.밀양박씨(密陽朴氏)는 신라의 건국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박승영 朴昇英,제54대왕,재위:917~924)의 8대군(大君)중 세자(世子)인 박언침으로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지며,단일 본관으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閥族: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이 많은 집안으로 벌열)임을 자랑한다.밀양박씨는 경명왕의 첫째왕자 박언침(朴彦 ,어머니는 석(昔)씨)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해져 본관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다.밀성대군은 경명왕의 첫째 왕자로서 밀양 땅을 분봉 받은 시조박혁거세의 30세손으로 밀양 박씨의 관조(貫祖)이고 아들 박욱(朴郁)은 신라말 고려초의 인물로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사업에 공이 많아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종3품)에 오른인물이다. 경상남도밀양시 내일동에는 경남도지정 문화재자료 제213호로 지정된 목상(木像)이 있다.이 목상(木像)은 밀양박씨 박욱(朴郁)의 상(像)으로 목상이 만들어진 연대는 알수 없으나 원래 밀양부의 추화산성에 있던 성황사에서 성황신으로 받들던 것인데,밀양박씨 후손들이 1894년(고종 31)에 익성사를 창건하여 옮기고 그의 아들인 요동독포사(遙東督捕使) 박란의 위패와 함께 봉안하고 있다.문헌에는 "밀양의 박씨는 파(派)의 흐름이 심히 번성하나, 그 근본은 곧 공으로 부터라" 하였으며 후손 중 이름난 12명의 중시조가 계파를 이루고 있다.8세손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던 종1품 정승)을 지내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진 박언부(朴彦孚)를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8세손박언상).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8세손박언인).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8세손박양언).판도공파(版圖公派:8세손박천익).좌윤공파(左尹公派:8세손 박을재).진사공파(進士公派:10세손 박원).밀성군파(密城郡派:13세손 박 척).동정공파(同正公派:13세손박원광).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15세손박중미).정국공파(靖國公派:15세손 박위).규정공파(糾正公派:16세박현)등 크게 12파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고,10세손 박환(朴桓)이 영암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개 본관으로 갈라졌다.각 계통별로 인맥을 보면 종파(宗派)인 8세손 박언부가 고려 문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권신(權臣)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정1품)에 올랐으며,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벼슬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정승)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그의 후손에서 은산군(銀山君) 박영균(朴永均)을 비롯한 13개 파로 나뉘어 졌다.밀성부원군 박언부의 둘째 아들로 인종 때 공부상서(工部尙書:정3품장관)를 지낸 박의신(朴義臣)의 후손에서는 사문진사(四門進士) 박원(朴元)의 계통과 의흥위(義興衛:오위의 하나인 중위 中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박척(朴陟)의 인맥이 두드러진다.박원(朴元)의 8세손 박의중(朴宜中)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대과)에 장원급제하고,우왕(禑王)때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정3품)과 밀직제학(密直提學:정령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맡던 밀직사의 벼슬)을 거쳐, 뒤에 공신(功臣)에 올랐으며,조선이 개국되자 조 준.정도전(鄭道傳)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했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우아한 문장(文章)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문종때 경흥부사(慶興府使:정3품수령)로 재직 중 야인(野人)토벌에 공을 세웠던 박거겸(朴居兼)은 박의중의 손자이며, 판서(判書:정2품 6조의 장관)에 추증된 박경빈(朴景斌)의 아들로 성종 때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고려 충목왕때 문과에 급제한 박중미(朴中美)는 공민왕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품계)에 올라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해졌다.그의 8세손인 생원(生員,초시의 종장에 합격한 선비) 박사눌(朴思訥)의 아들 박성(朴惺)이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글을 배우고, 선조때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들어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고,정유재란 때는 체찰사(體察使:전시에 재상급이 왕을 대신하여 겸임하던 군직의 하나) 이원익(李元翼)의 막료로 종군하고, 주왕산성(周王山城)의 대장(大長)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뒤에 왕자사부(王子師傅:시강원의 정1품으로 부(傅)는 좌.우의정이 겸임 함,또는 종9품으로 왕자의 교육을 담당함)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했다고 한다.임진왜란 때 상주(尙州) 싸움에서 순절한 박 호의 아들 박종남(朴宗男)은 선조때 상주와 광주(廣州)의 목사(牧使:정3품 목관)를 거쳐 회령부사(會寧府使:정3품)를 지냈으며,아들 박영신(朴榮臣)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는 광해군의 뜻을 반대하다가 북관인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으나 장사(壯士)이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진도(晋島)로 이배(移配)되었다.인조반정 후 경원부사(府使정3품)를 거쳐 풍천부사(豊川府使:정3품)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다 포로가 되었는데, 그의 용맹을 알고 있던 이괄(李适)이 마음을 돌려 협력할 것을 간청했으나 굽히지 않자,그 기절(氣節)에 적장인 이수백(李守白)도 감동하여 죽이기 아깝다고 하였으나, 살려 두었다가 후환이 두려워 참살(斬殺)하였다고 한다.조선 정종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부마도위의 약자)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2품)에 오른 박갱의 7세손 박정원(朴鼎元)은 문과에 급제하고,평안도사(平安都事:수령의 지휘받아 지방관을 규찰하던 종5품)를 역임했고,그의 종손(宗孫) 박신규(朴信圭)는 호조판서(戶曺判書:정2품 장관)를 지낸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목사(牧使:정3품수령) 박율(朴栗)의 아들인 박이서는 선조때 알성문과(謁聖文科: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알성하고 나서 보던 과거)에 급제하고,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학유는 종9품)를 거쳐,주서(注書:정7품)로 사관(史官:역사를 기록하던 관원으로 수찬.검열.주서 등을 일컬음.사신)을 겸했다.임진왜란때는 병조좌랑(兵曹佐郞:병조의 정6품 전랑)이 되어,분조(分朝)를 배종(陪從:모시고 따라감)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순찰사종사관(巡察使從事官:난리때 지방의 군무를 순찰하던 임시벼슬 수행원)으로 황해도 지방의 병량을 담당했다.광해군때 폐모론(廢母論)이 대두되자,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했던 그는 뒤에 무고를 받아 삭직되었다가,영광군수(靈光郡守:종4품수령)로 복직되어 전라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이창준(李昌俊)의 탐학 행위를 개탄하여 사직했다.그의 아들 박노는 정묘호란 때 순검사 종사관으로 왕을 강화(江華)에 호종한 공으로,장악원정(掌樂院正:조선때 음악에 관한일을 맡아본 관아의 3품)에 올랐고,인조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신(使臣)으로 적진에 들어가 조약을 어기고 불침입한 것을 공박하다가,40여일간 잡혀있었다.고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3품)을 역임했던 박현(朴鉉)은 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 박효신(朴孝臣)의 후손으로,조선개국과 더불어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집현전은 궁중에 두었던 학문연구기관이며 부제학은 정3품 당상관)에 등용되어,수원부사(水原府使:정3품)를 거쳐 안변부사(府使:정3품)로 나가 임지(任地)에서 생을 마쳤다.특히 그는 성리학에도 밝은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淸白吏)로 세간의 칭송을 받았으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규정(糾正:고려 감찰사의 종6품)공 박현(朴鉉)의 손자 박사경(朴思敬)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典法判書:고려때 전법부 정3품장관)겸 상장군(上將軍:정3품)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推城翊威功臣)에 책록외었으며,그의 아들 박침이 공민왕때 전의판사(典儀判事:우두머리 3품)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71현(賢)과 함께 개성(開城)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박침의 둘째 아들 박강생(朴剛生)은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고,의정부사(議政府事)를 지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호조전서(戶曹典書:정3품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학문에만 정진하다가 태종때 등용되어 수원부사(水原府使:정3품)로 재직중, 과천현감(果川縣監:종6품)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떠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에서 금천현감 김문(金汶)이 과음으로 죽자,사헌부(司憲府3사의 하나로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관아)의 탄핵을 받았다.뒤에 다시 등용되어 세종때 안변부사(府使정3품)를 지냈고,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다.그의 아들 박심문(朴審問)은 세종조에 김종서(金宗瑞)가 6진(六鎭)을 개척할때, 종사관(從事官)으로 야인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잘 보살펴서 나라의 시책에 따르게 함)을 건의했고,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모의했으며,1456년(세조2) 질정관(質正官:글의 음운(音韻)이나 제도 따위에 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 오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벼슬로 중국에 사신이 갈때 함께 감)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의주(義州)에 이르렀을때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결을 했다.박강생(朴剛生)의 손자로 세조때 정난2등공신(靖難二等攻臣)에 책록되어,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진 박중손(朴仲孫)은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 4조의 판서(判書:정2품장관)를 거쳐 밀산군(密山君)에 개봉(改封)되었다.그의 큰 아들 박남이 부사(府使정3품수령)를 지냈고,차남 박미(朴楣)는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언하던 사간원의 정3품)과 예조참의(參議:정3품차관보)를 거쳐,여지승람(輿地勝籃)을 편찬했으며 시문(詩文)에 통달했다.막내 박건(朴楗)은 세조때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으로 5대왕조를 거치면서,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3등공신(靖國三等功臣)에 책록되어,밀산부원군(密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찬성공(贊成公) 박신생(朴信生)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 박영(朴英)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외손자로,주역(周易).천문.지리.의술 등에 능통했으며,무예(武藝)에도 뛰어나 용맹을 떨침으로서 중세의 명인(名人)으로 유명했다.특히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 한 벌을 유물로 물려받는 가통(家統)이 있었다고 한다.어느날 저녁 무렵 화려한 옷차림에 준마를 타고 남소문(南小門)을 지나는데 골목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며 부르기에 그가 말에서 내려 따라가니 집이 깊숙한 곳에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그 여인은 그를 대하자 홀연히 눈물을 흘렸다. 그 까닭을 물으니 귓속말로 "공의 풍채를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로 인하여 비명에 죽겠소" 하였다.그가 무슨 뜻인가를 물으니 미녀는 "도적의 무리가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 입은 옷과 타고 온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갖고 살아온 지가 해포가 되었습니다. 내가 매일 이 곳에서 탈출할 것을 생각해 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많으므로 잡혀서 죽을까 두려워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그는 칼을 빼어 들고서 잠을 자지 않고 있었는데 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으로부터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큰 밧줄이 내려왔다.그는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급히 여자를 업고 몇겹의 담을 뛰어넘어 나와서는 여인이 붙잡는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달려 나왔다. 그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善山)으로 돌아와 무인(武人)의 노릇을 버리고 학문에만 진력했고,옷자락이 잘린 옷을 보이면서 항상 손자들에게 경계하였다고 한다.그는 낙동강변에서 두문불출하고,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여 아래와 같은 시(詩)로 마음을 달랬다."멀고 먼 남쪽 변방에 바닷 기운이 어두워 오는데,투구 쓰고 갑옷 입던 바다를 지키는 늙은 왕 손일세./ 기린각 위에 이름을 남길 생각은 전혀 없고/ 낙동강 언덕 마을에 내 집이 있도다."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학자들이 모두 송당선생(松堂先生)이라 일컬어 스승으로 섬겼다고 하며,의서(醫書)로 경험방(經驗方)과 활인신방(活人新方)을 저술했다.존성재(存誠齋) 박미(朴楣)의 아들 6형제 중에서 연산군때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아본 관아인 사간원의 정3품)으로 문의(文義)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던 박의영과 폐비윤씨(尹氏:연산군 생모)의 추숭(追崇)을 반대하다가 목천에 유배당한 형조참판(刑曹參判:종2품 법무차관)을 지낸 박광영(朴光榮)과성종때 호당(湖堂:재덕을 갖춘 유망한 젊은 문신을 뽑아 사가하여 오로지 글만 읽도록 한곳,독서당)에 뽑혀 사가독서하고, 교리(校理:홍문관.승문원의 정5품)를 지낸 박증영(朴增榮),홍문관 부제학(副提學:정3품)과 황해도감사(監司:종2품 관찰사)를 지낸 박소영(朴召榮),승지(承旨:정3품)를 지낸 박안영(朴安榮) 등이 가문을 크게 빛냈다.박증영의 아들 박훈(朴薰)은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14)에 남곤,심정 등의 수구파가 조광조.김정.김식 등 신진 도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때 신진사류로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성주(星州)로 유배되었다가,다시 의주로 이배(移配)되어 1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밀성군(密城君) 박광영의 손자인 낙촌공(駱村公) 박충원(朴忠元)은 명종때 단종의 원령(怨靈)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군수(郡守:종4품)를 자청하여 부임해 가서 제물(祭物)을 갖추어 제사 지내며 제문(祭文)에 이르기를,"왕실(王室)의 맏이요 유충(幼沖)하신 임금으로 마침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로 손위(遜位)하시었으니 한조각 청산(靑山)이요, 만고의 고혼(孤魂)이라 바라건대 강림(降臨)하시어 향기로운 제전에 흠향하소서"하며, 원령을 위로하여 그로부터 변고가 없었다고 한다.또한 유천차기(柳川箚記)에 의하면, 지금까지 사시행사(四時行祀)때마다 이 글을 제문에 쓴다고 한다. 그 뒤 박충원은 좌통례(左通禮조선때 통례원의 정3품)로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춘추관은 시정의 기록을 맡아본 관아로 쳔수관은 역사를 기록하던 춘추관의 정3품에서 종4품까지)을 겸하여,중종실록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그는 서기 1566(명종21) 이퇴계(李退溪)의 뒤를 이어 양관대제학(兩官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지내 명성을 떨쳤다.이후 선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를 거쳐,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중추부의 정2품)를 지내고 우찬성(右贊成:의정부의 종1품)에 이르러,밀원군(密原君)에 봉해졌다.그의 아들이 세도가 윤원형(尹元衡)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였는데,면전에서 거절하여 외관벼슬로 만 돌았던 박계현(朴啓賢)이며, 박계현의 손자가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오른 박승종(朴承宗)이다.광해군의 폭정속에서 영상(領相:영의정)에 올랐던, 박승종은 항상 오리알만한 큰 비상(砒霜:비석을 승화시켜 만든 결정체,독약)을 갖고 다니며 말하기를,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는가"하며,광해군의 비리적 행동에 항상 진정하지 못하고 방안에 한가히 있으면서 흐느껴 울기도 했으며,폭주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던 날,그는 이 반정에 참여하고자 군사를 모으고 있던 아들인 참판(參判:6조의 종2품 차관) 박자흥(朴自興:이이첨의 사위)을 불러 마음속에 있는 바를 써놓고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했다.한편 박충원의 6대손 박성원(朴聖源)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문인으로,영조때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에 급제하고,간관(諫官:사간원과 사헌부의 벼슬아치를 간신(諫臣),언관)을 거쳐,참판(參判:종2품 6조의 차관)으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였다.이어 그는 봉조하(奉朝賀: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치사한뒤에 특별히 시키던 벼슬)가 되었으며,문장(文章)에도 뛰어나 예의류집(禮疑類集),돈녕록(敦寧錄),겸재집(謙齋集) 등의 저서가 있다.한편 강계(江界)의 '3대 유배명인'으로 손꼽히는 박근원(朴謹元)은 시정(寺正) 박빈의 셋째 아들로당대의 권신 윤원형과의 암투로 일생을 살았다.그가 사관(史官:역사를 기록하던 관원,예문관의 검열과 승정원의 주서(注書)등을 일컬음)인 한림(翰林)의 벼슬에 있을때,윤원형의 악행을 사초(史草:사관이 기록하여 두던 사기의 초고)에 적었더니, 동료들이 화를 두려워 삭제하자 그는 다시 썼다.그러나 역사의 기록을 중요시했던 그가 또 쓰자, 끝내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선조때 동서(東西)분당으로 논쟁이 심해지자, 중진(重鎭)으로 송응개(宋應漑),허봉 등과 함께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국방장관)로 있던 이이(李珥)를 탄핵하여,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의 상소로 풀려나와 청환직(淸宦職:학식이나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규장각,홍문관,선전관청의 벼슬)을 지내며 청백한 관리로 소문났었다.기재잡기(寄齋雜記)에 따르면, 늙어서 사람들이 그의 청백함을 칭송하자 "나의 청백은 윤원형이 만들어 준 인생의 선물이다" 하며 웃었다고 한다.복야공파(僕射公派) 박언인(朴彦仁)의 후손에서는, 우리나라 "3대악성(三大樂聖)"으로 손꼽히는 난계(蘭溪) 박연(朴堧)이 뛰어났다. 그는 1378년(우왕4) 삼사좌윤(三司左尹:고려때 돈과 곡식의 출납.회계에 관계된 일을 맡아본 관청의 벼슬)박천석(朴天錫)의 큰아들로 태어나태종때 문과(文科:문관을 뽑아 쓰던 과거로 3년마다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뉨,대과)에 급제한 박연은 세종이 즉위하자,악학별좌(樂學別坐:조선때 서울의 각 관에 딸린 5품벼슬)에 임명되어,당시 불완전한 악기의 조율(調律) 정리와 악보찬집(樂譜撰集)의 필요성을 상소하여,편경(編磬)12매를 제작,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한 정확한 음률(音律)로 연주케 했고,조정의 조회(朝會)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의 사용을 건의하여 실행케 하는 등 궁정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했다.서기1445년(세종27) 성절사(聖節使:중국의 황제.황후 축하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와, 인수부윤(仁壽府尹)과 중추원부사(中樞院副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정3품)를 역임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예문관은 칙령과 교명을 기록하던 관청으로 정2품 문형)에 올랐으며,단종 원년에 일어난 계유정난(癸酉靖難)때 그의 셋째 아들 박계우(朴季愚)가 수양대군을 반대하던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으나,그는 3조(三朝)에 걸친 원로로서 죽음을 면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하였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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