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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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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이씨는 이정식(李禎植)을 시조로 받들고있다.시조 이정식은 고려때 인물로 선조는 여주이씨였음이 전할 뿐,사적에 대하여는 병화로 인해 전하는 바가 없다.다만 고려 충렬왕때 판서(判書:고려말에 둔 6조의 정3품 장관)를 지낸 이삼(李杉)등 3형제가 있었는데,이중형(李仲兄)에게는 계대할 후손이 없어,이삼의 아들을 양자를 삼았다. 그후 이중형이 나이 50세에 상처를 하고 재혼하여, 아들 3형제를 낳자 그를 양자에서 폐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관에 알려져 이백형(李伯兄)은 회령, 이중형은 곽산,이삼은 강계로 유배되어 후손들이 유배되기 전의 세거지인 용궁을 본관으로 5세손인 이항덕(李恒德)은 조선시대에 서운관사(書雲觀事:천문.재상(災祥).역일(曆日).추택(推擇)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로 세종7년에 관상감으로 고침)를 지내면서 가문의 초석을 다졌고,이극춘(李克春)은 좌수(座首:관아의 맨윗자리),이희증(李熙增)은 만호(萬戶:종4품)를 지내면서 가문이 번성하였으며,이우청(李遇淸)은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당상관),이태무(李泰茂),이동환(李東煥),이입선(李立善)은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품계)로서 자손들에게 많은 영양을 미쳤다.이경헌(李敬憲)은 참봉(參奉:종9품)을 지냈고,이신간(李信侃)은 첨절제사(僉節制使:각 진관(鎭管)에 속했던 종3품 서반 무관(武官)으로 절도사(節度使)의 아래)를 지냈으며,이진명(李振明)은 부호군(副護軍:종4품)을 지냈다. 이의양(李毅良)은 중군(中軍조선때 각 군영(軍營)에 속한 종2품 서반 무관(武官)으로 정원은 1명), 이형식(李炯植)은 만호(萬戶:몽골식 직제로 각 도의 진(鎭)에 배치한 종4품),이기열은 절제사(節制使:절도사가 관할하던 거진의 정3품)를 지냈다용궁이씨는 조선시대에 이여흥(李麗興,1650년생)이 1678년(숙종4) 증광(增廣:나라에 경사가있을때 기념하기위해 보던과거)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의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용궁이씨는 1930년 국세조사때는 평안북도가 집성촌이었다. 평북의 위원군,자성군,후창군,강계군 등인데, 위원군 봉산면 향양동과 용봉동 일원, 위원군 위원면 송주동 등지에 운집되어 있다.그리고 자성군 이평면 일원과 후창군 남신면 가산동에 일부가 있고, 강계군 강계읍 동부동, 강계읍 남부동, 강계읍 학구동, 곡하면 원동 등에 집성촌이 산재해 있다. 또 초산군 일원에도 용궁이씨가 살고 있다.용궁(龍宮)은 경상북도 예천군에 속한 지명으로,995년(성종14)에 용주(龍州)로 승격되었다가,1018년(현종9)에 용궁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에 편입하였다가,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고 1413년(태종 13) 현으로 고쳤다.1896년 경상북도 용궁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폐지되어 신하면(申下面)은 의성군(義城郡)에 나머지는 용궁면 등으로 분할되어 예천군에 편입되었다인구조사에서 용궁이씨는1985년에는 160가구 653명이었고,2000년에는 207가구에 676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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