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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흥이씨는 이반계(李攀桂)를 시조로 받든다.시조 이반계는 원주이씨 시조 이신우(李申祐)의11세손 이자성(李子成)의 아들로 고려시대에 중랑장(中郞將:정5품)을 지냈다.이반계는 공민왕때 예부상서(尙書:정3품장관)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운곡 원천석과 함께 원주의 치악산에 은거하여 단식 7일만에 죽었다고 하며,태종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原君)에 봉하고 영의정(領議政:정1품정승)에 추증하였다.한편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윗자리) 이신우(李申祐)를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있으며,장령(掌令: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 대검부장) 이시정(李時楨)의 후손으로 전하는 문헌도 있다.익흥이씨는 조선시대에 이시정(李時楨)이 1600년(선조33), 별시(別試:나라에 경사가있을때 보던과거) 문과(文科:대과)의 갑과(甲科)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날렸다.인구조사에서 익흥이씨는1985년에는 총 15가구 60명이었고,2000년에는 107가구에 303명이었다.인천이씨(仁川李氏,인주.경원)고려 중엽에 왕실과의 인척을 배경으로 크게 세력을 떨쳐영광굴비는 인천이씨 이자겸에 의해 유명해져대각국사 의천도 이자연의 딸 인예왕후 소생 파한집으로 유명한 이인로독립운동가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개화의 선구자' 이원모 배출인천이씨(仁川李氏) 시조는 고려 현종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부총리)를 지낸 허겸(許鎌)이다.인천이씨는 김해김씨(金海金氏) 시조인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후예로 전하며, 수로왕의 큰 아들 계통은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둘째아들 계통는 어머니 허태후(이름 허황옥 許黃玉,인도의 아유타왕국 공주로 보주태후)의 간곡한 요청으로, 성(姓)을 이어받아 허씨가 되었는데, 인천이씨(仁川李氏)는 허씨에서 분적하였다.그의 후손 허기(許寄)가 서기 755년 신라 경덕왕때 아찬(阿飡:신라의 17관등의 여섯째 등급-일길찬)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해에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귀국하지 못하고, 당나라 현종을 따라 촉나라(蜀國)로 가서 황제와 위험을 함께하면서 힘을 다해 당황제를 호위했다고 한다.'안록산의 난'이 평정되자, 황제를 따라 서울로 되돌아오자 황제가 가상히 여겨 시(詩)를 주어 칭찬하고 황제의 성(姓)인 이씨(李氏)를 하사 하였다.4년만에 황제의 서신을 받아 귀국하자, 경덕왕이 그동안의 공이 많았음을 칭찬하며 높은 벼슬을 더하여 소성백(邵城伯,소성은 현재의 인천)에 봉하였다.이후 10세손에 걸쳐 소성백에 계속 봉해지고, 모두 이씨(李氏)와 허씨(許氏) 복성(複姓)을 사용하였다. 인천이씨와 양천허씨 족보를 합해 생각하면, 허기의 후손으로 허선문(許宣文,양천허씨 시조), 허사문(許士文, 태인허씨 시조로 허선문 아우로 추측, 인천이씨의 족보에는 허준으로 나타남)이 있었는데, 허사문은 수로왕비 보주태후(허황옥)의 30세손으로,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楫,접이라고도 읽음)과 허도(許棹,이허겸)을 낳았다. 형인 허즙은 '태인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는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문헌 및 자료참고>이도(허도)는 고려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부총리)를 지내고, 상주국(上柱國:고려때 2품관이 받는 최고 훈호)으로 소성백(邵城伯,소성은 현재의 인천으로 백(伯)은 700호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쓸 수 있는 작위)에 봉해졌다.그러니까 양천허씨에서 태인허씨로 분파되었으며, 인천이씨는 '태인허씨'에서 분리된 성씨이다. 그래서 성은 이씨(李氏)이며 이름은 허겸으로 하여, 인천이씨(경원 이씨 또는 인주 이씨라고도 함)의 시조가 되었다. 후에 <인천이씨.허씨.김해김씨>는 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명을 <가락종친회>라 하였다 .시조 묘는 인천시 연수동 문학산에 있으며, 매년 청명일에 향사(제사)한다.인천이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1명, 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하여 보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13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35명, 의과에 1명 등 60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서 인천이씨는 1985년에는 14,605가구에 61,045명이었으며,2000년에는 21,448가구에 68,628명이었다.이인로(李仁老:1152~1220)이인로(호는 쌍명재)는 고려때의 대학자로 시와 술을 벗삼아 당대의 석학들과 어울렸으며, 시문(詩文) 뿐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초서와 예서에 대가였다고 한다.인천이씨가 자랑하는 이인로는 초명은 득옥(得玉)으로 정중부(鄭仲夫)의 난때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난을 피한뒤 다시 환속하였다.l180년(명종10)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으면서, 당대의 석학(碩學) 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등과 함께 어울려 시주(詩酒)를 즐겼는데, 이들을 일컬어 강좌7현(江左七賢)이라고 했다.고려 신종때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정6품), 고종때는 비서감(秘書監).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간쟁을 담당한 낭관 4품, 1356년(공민왕 6)에는 좌.우간의대부를 통합해서 간의대부로 하고 종3품으로 승격함)가 되었다.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초서(草書).예서(?書)가 특출하였다. 저서에 은대집(銀臺集).후집(後集).쌍명재집(雙明齋集)과 유명한 파한집(破閑集)이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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