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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는 베트남 왕자(王子), 고려의 무장(武將) 이의민최충헌 최충수 형제에 의해 멸문지화정선이씨(旌善李氏)는 이양혼(李陽 ,자는 원명)을 시조로 받든다. 시조 이양혼은 안남국(安南國:베트남)의 왕자(王子)로 12세기경 고려(高麗)에 귀화하였다.문헌에 따르면 이양혼(李陽 )은 북송(北宋) 휘종(徽宗)때 금나라와의 전쟁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경주에서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이양혼(李陽 )은 북송(北宋)에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고려때 문산계 최고 종1품의관계로 1356년(공민왕5)정1품 상(上)의 품계인 벽상삼한삼중대광)으로 개칭됨)로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고려때는 정2품부총리)에 올라 검교태사(檢校太師:정1품,검교는 벼슬앞에 붙이는 명예직).수사공(守司空:정1품)에 이르렀다.그는 안남국(安南國)의 남평왕(南平王:이건덕(李乾德)의 셋째아들로 송(宋)나라(960~1279) 휘종 때 국난(國難:금나라 침략)을 피해, 고려로 귀화하여 경주(慶州)에 정착하였다.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현재의 베트남(당시 중국은 안남(安南)이라고 부름)에서는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왕조인 응오왕조(서기939년)가 세워졌고,이후 딩(Dinh),레(Le)왕조에 이어 리왕조(Ly,李王朝)가 리꽁우언(Ly Cong Uan,이공온 李公蘊)에 의해 세워져, 200여년간 최초로 장기(長期) 왕조를 이어갔다.정선이씨(旌善李氏) 시조인 이양혼과 화산이씨(花山李氏)의 시조 이용상(李龍祥:화산군)은 이 리왕조(Ly王朝)의 왕자(王子)들 이었다.시조 이양혼의 형(兄)이 이양환으로 안남국(베트남)의 5대왕 신종이다.그의 6세손이 유명한 이의민(李義旼)으로 이의민은 고려 의종때 무신 정중부의 난에 적극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웠다.7년 후 정중부는 경대승에 의해 피살되고, 경대승도 5년만에 병사하자, 이의민이 정권을 잡아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내세워 14년간 고려를 통치했다.이의민과 아들 이성순(李性純)이 고려 명종 26년 최충헌(崔忠獻)에게 화(禍)를 입고, 손자 이우원(李遇元)이 정선으로 낙향하여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본관을 정선으로 하였다.<정선이씨 종친회>의 기록과 문헌에 따르면,서기 1677년(숙종 3) 후손인 생원(生員,초시의 종장에 합격한 선비) 이익재(李益材)가 쓴 최초서문(舊序)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우리 정선이씨는 안남에서 시작하여 고려때인 서기 918년~1391년에 이르러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는데, 불행히 중엽에 난리(丙辰政變,1196년 4월 최충헌.최충수 형제의 이의민 살해사건)로 인하여 족보를 잃어서 뿌리와 파(派)를 널리 구명하지 못하니 참으로 한스럽다.”기록에는 이후 8세손 이연(蓮)이 피신하여 후계를 이었지만, 후세의 번창이 억제되어 올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또한 서기 1771년(영조47) 후손 이정규(李正奎)가 쓴 구서(舊序)에는 "우리 이씨(李氏)는 고려조에 대대로 큰 벼슬을 이어왔으나, 귀신에게 아첨하는 때를 만나게 되자(유교를 숭상한 조선조)영화와 명예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편안하고 조용함을 좋아하였다.판종부(判宗簿:왕실의 계보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의 벼슬)에 오른 13세손 이용(李龍)은 지위가 정승(政丞)반열에 올랐으나,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그만둠)하였고, 안렴사(按廉使:5도(道)의 장관 절도사-안찰사-안렴사로 개칭)를 지낸 14세손 이자생(李自生)은 벼슬이 높은 반열에 있었으나, 명철하여 몸을 보전하는 유풍(遺風)이 또한 높다고 이를 만하다”는 기록이 있다.1938년 무인보 서문에는 "자손들은 연대(先代)의 아름다움을 잘 계승하고 벼슬하려고 힘쓰지 않으며 문학을 돈독히 숭상해서 지금까지 사족(士族)의 칭호를 잃지 않는다”고 했다.정선이씨(旌善李氏)는 조선시대에 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해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7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1명, 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등용하기위해 보던 과거)에 17명, 의과에 1명 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등용하기 위해 보던 과거)에 2명, 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가지)에 5명 등 모두 43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인구조사에서 정선이씨는 1985년에는 총 809가구에 3,107명이었으며2000년에는 총 1,121가구에 3,657명이었다.정선(旌善)은 강원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757년(경덕왕 16) 정선이라 개칭하여 명주(溟州:강릉 江陵)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1018년(헌종 9)에 명주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정선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까지 유지되었으며,1895년(고종 32) 충주부(忠州府) 정선군이 되었고, 1973년 정선면과 동면 사북출장소 1980년에 신동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1985년에는 사북읍이 고한읍과 사북읍으로 분리되었다.정읍이씨(井邑李氏,초산이씨)정읍이씨는 조선시대에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과거)에 5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여진어.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위해 보던 과거)에 24명,의과에 8명,음양과에 5명,율과에 5명,주학(籌學:셈에 관해 연구하는 산학)에 122명이나 합격하여 16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정읍(井邑)은 전북 서남부에 위치한 지명으로,처음에는 초산(楚山)이라고 했으며 정읍시는 옛 정읍현(井邑縣).고부군(古阜郡).태인현(泰仁縣)이 합쳐져 이루어진 지역이다.1896년에 전라북도에 소속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고부군과 태인군이 폐지되어 고부군의 15개면이 7개면으로,태인군의 18개면이 8개면으로 폐합되어 정읍군에 병합됨으로써 면적이 크게 넓어졌다. 1930년에 정읍면이 정주면으로 되었고, 1931년에 정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정주읍이 시로 승격하여 정주시와 정읍군으로 나누어졌고, 1995년 정주시와 정읍군이 정읍시로 통합되었으며,가장 오래된 한글가요인 '정읍사(井邑詞)'의 발상지이기도 하다.정읍이씨 중흥시조 이훤(李 )은 공민왕때 춘방시학사(春坊侍學士동궁에 속한 벼슬로 공양왕 2년(1390)에 보덕(輔德)으로 고친 3품에서 6품,춘방은 세자의 교육을 맡던 세자시강원)를 지냈다.초산이씨세보(楚山李氏譜牒) 병진보(丙辰譜)를 보면, 그는 고려조의 중신(重臣)으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절의를 지켜 공양왕4년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경연(經筵)과 장서(藏書)를 맡아보던 관아로 예종11년(1116)에 설치됨) 첨의정승(僉議政丞:종1품)을 지낸 사위 박원(朴洹)과 함께 초산(楚山,정읍.정주의 옛 이름)으로 낙향,스스로 산림처사(山林處士)라 하고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한편,시조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이 있다.즉 이훤(李 )을 시조라 하기도 하고, 중시조라 하기도 하는데,초산이씨세보(楚山李氏世系,헌종1년,을미보 乙未譜)에는 초산군(楚山君)의 시조 직함이나 선대사적(先代事蹟)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병진보(丙辰譜)의 기록대로 그를 중흥시조로 보고 있다. 가세를 일으킨 인맥으로는 5세손 이영배(李榮培)가 있다. 그는 영리(營吏:조선때 감영.수영.병영에 딸린 아전).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냈고, 유고(遺稿)도 세 권이 있었으나,병란때 없어졌다고 한다.그의 아우 이영춘(李榮春)이 임진왜란때 수문장(守門將:대궐이나 성의 문을 지키던 무관)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고,그의 처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정유재란때 왜병의 약탈을 피하여 어린아이를 껴안고 자결하여 나라에서 포상하였는데,이 사실이 삼강록(三綱錄)과 정읍지(井邑誌)에 기록되었다.이밖에도 9세손 이덕귀(李德龜,또는 이덕규 석천거사 石泉居士)는 효성이 지극하고 근면하여 살림을 다시 일으켰고, 효행(孝行)이 뛰어났다고 한다. 더우기 그의 유고(遺稿)가 있어, 첫번째 족보인 을미보(乙未譜)편찬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한편 호장(戶長:고을아전의 맨 윗자리) 이신귀(李神龜)의 아들 이희담(李熙聃)은 학문이 뛰어나 문하에서 많은 후학을 길렀으며,아들 이국렬(李國烈)과 함께 호남영방(湖南營房)의 선생으로 추대되어,학덕과 인품으로 빈민구휼에 앞장섰던 이기영(李基瑛)과 더불어 초산 이씨(정읍이씨)를 더욱 빛냈다.이처럼 정읍이씨(초산이씨 楚山李氏)는 5세손에서 12세손에 이르는 약2백년동안 영방청(營房廳) 영리(營吏)를 비롯하여 이장(吏長).호장(戶長)으로서 고을을 다스릴 만큼 벌족이었다.중시조의 낙향 무렵에 초산이씨(楚山李氏)의 일부가 경기지역과 경북 상주(尙州)로 옮겨갔고, 정읍(井邑)에 자리잡은 자손들은 내장(內藏),태인(泰仁),고부(古阜)등지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12세손 이정재(李廷裁)의 후계(後系)가 전북 순창으로 이거했고,14세손 이학진(李鶴鎭) 이래로 고창(高敞)에 초산이씨(楚山李氏)의 세천지(世阡地)가 있어, 그곳에 자손들이 살았다고 한다.1930년 일제강점기에 대구시를 비롯하여,정읍(井邑).고부.고창(高敞).순창(淳昌), 여수시.장성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에도 이들 지역과 서울.부산.대구.부안(扶安)등지에 세거하고 있다.2000년에는 총 23가구에 인구는 75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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