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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운해 편찬한글의 과학적연구와 고증학적 방법으로 실학 개척한 신경준단재 신채호 민족의 사관(史觀) 수립고령은 경상북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옛 대가야국의 중심지이다.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에 고양군이 되었고, 그후 조선 태종때 고양군의 '고'와 영천현의 '영'을 따서, 고령현이라 하였으며, 1895년(고종32)에 성주 9면과 현풍3면을 병합하여 고령군이 되었다.문헌에 의하면, 고령신씨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신라 공족(公族:왕족)의 후예로 안일호장(安逸戶長:안일호장은 명예 호장으로서 고려때 70세 이상의 호장에게 주던 칭호)이었으며 고려에서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병기등의 제조를 맡던 관청)을 지냈다.<검교(檢校)는 고려말 조선초에 벼슬자리를 임시로 늘릴때 벼슬앞에 붙던 명예직>그리하여 후손들은 누대에 걸쳐 선조들이 토착 세거해온 고령(高靈)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령신씨는 시조 신성용(申成用)의 6대손에서 암헌공파(巖軒公派:장 檣).정언공파(正言公派:평枰).감찰공파(監察公派:제梯)의 3파로 갈리며 이 중 암헌공파가 주축을 이루는데 조선시대에 상신(相臣:정1품 정승 즉 우의정.좌의정.영의정) 3명,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3명 등 많은 문신을 배출하였다.6세손 신장(申檣:호는 암헌)과 신평(申枰:호는 정은),신제(申梯:호는 회헌) 3형제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가문을 중흥시켰으며 특히 신장(申檣)의 다섯 아들이 뛰어났다. 숭례문의 편액도 암헌공의 친필이라고 한다.그중 셋째 아들 신숙주(申叔舟:1417~1475,조선 초기 문신,영의정을 지냈으며 4차례 공신의 반열에 올랐음,자 범옹(泛翁),호 희현당(希賢堂)또는 보한재(保閑齋).시호 문충)는 세종조에 집현전 수찬(集賢殿 修撰:집현전은 궁중에 두었던 학문연구기관으로 경연과 서연을 맡아보면서 학문을 연구했고 수찬은 서책을 편집.찬술하던 홍문관의 정6품)으로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도 공(功)이 컸다.수양대군(首陽大君)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계유정난(癸酉靖難:1453년(단종 원년)에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 여러 고명 대신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사건)가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른것을 시작으로 세조때 좌익공신(左翼功臣),예종때는 익대공신(翊戴功臣),성종때는 좌리공신(佐理功臣)등 네차례나 4대조에 걸쳐 공신(功臣)에 책록되었다.그는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이름을 날렸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 등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고,당대에 뛰어난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는 문재(文才)에 뛰어나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그의 아들 8형제도 모두 명성을 떨쳐 가문을 빛냈는데 신숙주의 아들대에서 봉례공파(奉禮公派:澍),함길백파(咸吉伯派),황해백파(黃海伯派:澯),고천군파(高川君派:瀞),뇌헌공파(懶軒公派:浚),강원백파(江原伯派:溥),영성군파(靈城君派:泂),호군공파(護軍公派:珌)로 분파되었다.그중에서 넷째 신정(申瀞)은 성종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 차관)을 역임했고, 다섯째 신준(申俊)은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감사원 감사위원),우참찬(右參贊:의정부의 정2품)등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의정부 정2품)에 올라 고양부원군(高揚府院君)에 봉해졌다.성종때 부제학(副提學:왕의 자문에 응하던 홍문관의 정3품),이조참판(吏曹參判:종2품차관).경기도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들을 지낸 신종호(申從濩)는 신숙주의 손자로 진사시(進 士試),문과 중시(重試:과거에급제한 사람에게 거듭 보이던 시험으로 합격하면 품계를 특진시켜 당상관에 오를수있음)등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시(時).문장(文章).글씨에도 뛰어났다.신종호의 아들 신항(申抗)은 성종의 부마(駙馬:임금의 사위.부마도위의 약자)가 되었으며 신잠(申潛)은 간성군수(郡守:종4품 수령)를 역임한 후 상주목사(尙州牧使:정3품수령)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고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도지사)를 지낸 신면의 아들 신용개(申用漑)는 당대의 대학자인 김종직(金宗直)에게 글을 배워 직제학(直提學:집현전의 종3품,홍문관의 정3품),도승지(都承旨:승정원의 정3품 왕의 비서실장)등에 기용되었으나,강직한 성품이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려 갑자사화(甲子士禍:1504년(연산군 10)에 일어난 사화.연산군이 어머니 윤씨의 폐위 사실을 알고 성종의 후궁들과 왕자 그리고 김굉필.윤필상등 십여명의 신하를 죽인 사건)때 영광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과 우의정(右議政:정1품정승)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중종 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재덕을 갖춘 젊은 문신을 사가독서하여 공부하게 한 곳으로 독서당이라고도 함)을 거친 신광한(申光漢)은 내자시정(內資時正:조선때 궁중의 식품.피륙.내연 등 의식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그곳의 벼슬) 신형(申泂)의 아들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정3품),양관대제학(兩官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명성을 떨쳤으나 조광조(趙光祖).김정 등과 함께 신진사류로서<을묘사화(乙卯士禍)>에 연루되어 한때 삭직되었다.그러나 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명종 원년,7월1일)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외숙 윤임(尹任)등을 무고하여 그의 집안 및 일당을 죽이거나 귀양 보낸 일)때 우참찬(右參贊:의정부의 정2품)으로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소윤(少尹)에 속하여 윤임(尹任)의 대윤(大尹)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위사3등공신(衛社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우찬성(右贊成:의정부의 종1품 재신)에 올라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재신)을 역임한후,우의정(정1품 정승).좌의정(정1품정승)에 이르렀으며,궤장( 杖:나라에서 국가에 공이 있는 원로 대신에게 하사하던 궤와 지팡이)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위해 마련한 국가 원로회의)에 들어갔다.신용개[(申用漑:1463(세조9)∼1519(중종14),자는 개지(漑之),호는 이낙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는 영의정 신숙주의 손자이며, 관찰사 신면의 아들이고 김종직의 문인이다.조선중기의 문신으로 1483년(성종14)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하고,1488년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병년(丙年)에 보던 대과)에 병과로 급제,그해에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그 뒤 수찬.교리를 역임하였다. 1492년 사가독서를 하였고, 1506년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종2품 법무차관)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정2품문형)을 역임, 이듬해 성희안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 공신이 되었다. 그뒤 대제학.우참찬(정2품)과 대사헌(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검찰총장)을 거쳐서 이조.병조. 예조의 판서(정2품장관)를 역임, 우찬성(의정부 종1품)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에 이르고,1518년 좌의정(정1품정승)에 이르렀다. 일찍이 성종은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를 벗어서 입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낙정집(二樂亭集)이 있고,편서로는 속동문선(續東文選).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한편 신숙주(申叔舟)의 동생 신말주(申末舟)는 세조가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순창으로 내려가 은거(隱居)하였으며,그의 손자 신공제(申公濟)는 중종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고령신씨가 자랑하는 신경준(申景濬)은 신래(申 )의 아들로 고증학적 방법으로 지리학을 개척한 실학자이며 특히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저술하여 한글에 대한 과학적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그는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음률.의복.법률.기서에 이르기까지 통달했다고 하며 영조때 정언(正言:사간원의 정6품),장령(掌令: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부장검사)등을 거쳐 서산군수(郡守:종4품 수령)를 지냈다.신경준은 1770년(영조46)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與地考)를 담당하여 그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승정원의 정3품)에 올랐다.신경준(申景濬"1712~1781)-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로서 자는 순민(舜民),호는 여암(旅庵)이다. 1754년(영조30) 증광문과(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기념으로 보던과거)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전적(典籍:성균관 정6품),병조와 예조의 낭관(郞官),정언(正言).장령(掌令)을 지내고 1762년 서산(瑞山)군수로 나갔다. 이어 사간(司諫).종부시정(宗簿寺正:왕실의 보첩일을보던과가의 3품)을 역임하였다.1770년 문헌비고(文獻備考)편찬에서 여지고(輿地考)를 맡아한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 승지).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국방차관보)가 되어 팔도지도(八道地圖)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1771년 북청(北靑)부사,1773년 좌승지(左承旨).강계(江界)부사.순천(順天)부사,이듬해 제주(濟州)목사,1779년 치사(致仕:스스로 벼슬을 사양함)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의복(醫卜).법률.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17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특히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에서는 저자의 독창적인 이론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① 훈민정음 이전에도 한국에 고대문자가 존재하였다는 주장, ② 표음문자로서의 훈민정음의 우수성 인정, ③ 초성에서 설두음(舌頭音) 및 설상음(舌上音) 문자와 중성에서 한국 고유의 ‘ · ·’ 모음자의 새로운 설정 ④ 제자(制字) 원리에 관한 독특한 설명 ⑤ 국어 전반에 걸친 광범한 고찰 ⑥ 서북(西北).호남(湖南).호서(湖西)등 각 지방의 방언에 대한 연구 등이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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