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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사이군의 굳은 절개에 이성계도 감복한 명문(名門)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 이승훈 배출평창이씨(平昌李氏) 시조 이광(李匡)은 고려 인종 4년에 출생하여, 이부사사(吏部司事:고려때 문선(文選)과 훈봉(勳封)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와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도절제사 고려말에 설치된 양계(동북면,서북면) 지역의 장관.1389년(공양왕 1)도순문사를 도절제사로 고쳐 재추(宰樞)로서 이직을 맡김 군지휘관의 성격이 감하여 왜구의 침입시에 대처함)를 지냈다.그는 광록대부(光綠大夫:고려때 문관 품계)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추밀원은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를 담당한 관청으로 중추원의 바뀐 명칭.정3품)를 지냈으며, 명종때 태사(太師:3공 중 으뜸서열로 정1품,3공은 태사.태부.태보)에 올라 백오군(白烏君:백오는 평창의 옛지명)에 봉(封)해졌다.시조 이광(李匡)의 8세손 이천기(李天驥)가 고려 공민왕때 산기상시(散騎常侍:고려때 첨의부의 정3품낭사 벼슬)에 이르렀으며, 원나라 제과(制科:황제가 친히 시험하던 과거)에도 급제하였다. 그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불사이군(不事二君:한 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로 아들 3형제(이육.이갈.이과)를 데리고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절의를 지켰다고 하며, 태조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했다고 한다.후손들은 본관을 그의 봉군지인 평창으로 하였다.평창이씨(平昌李氏)는 이거명(경주이씨 1세조)의 셋째아들 이윤장(李潤張)이 시조로 알려져왔으나 조선 숙종때의 갑자보(甲子譜)가 위조된것으로 밝혀져, 시조를 이광(李匡)으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족보도서관 참고,2008년 7월16일 평창이씨 종친회장 래방후 확인되었다 함) 후손들은 이광(李匡)을 시조로 받들고, 이천기(李天驥)를 중시조로 받들며 평창(平昌)을 본관으로 삼아 계대(繼代)하고 있다.평창이씨(平昌李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25명, 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해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21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79명,의과에 2명 등 12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서 평창이씨는 1985년에는 13,531가구에 55,487명이었으며2000년에는 20,718가구에 65,945명이었다.평창(平昌)은 신라 경순왕때 백오현(白烏縣)이라 개칭하여 내성군(奈城郡:영월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초에 지금의 이름인 평창현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에 원주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 1392년(태조1)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의 비 효경왕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평창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동안 유지되었다.1979년에 평창면이 평창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도암면 호명리가 진부면에 편입되었다. 2003년 평창읍.미탄면.방림면.대화면.봉평면.용평면.진부면.도암면 등 1읍 7면과 계촌출장소로 이루어져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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