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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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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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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문장가 백호 임제 우의정 임한호는 서자도 벼슬할 수 있게 한 장본인나주임씨(羅州林氏)는 상장군(上將軍:고려때 정3품)을 지낸 임비(林庇)를 시조로 받들고있다. 시조 임비(林庇)는 1281년(충렬왕7)왕과 함께 원나라를 다녀온 공으로 보좌 2등공신(輔佐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철권(鐵券,공신에게 수여하던 상훈문서.공신녹권)을 하사받았다.임비는 대장군(大將軍:종3품)을 거쳐 상장군(上將軍:정3품)을 역임하고 충청도도지휘사(都指揮使:충청도를 지휘하던 관의 으뜸벼슬),판재시사(判司宰寺고려 문종 때에 수산물을 조달하는 일과 하천의 교통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정3품)에 이르렀다.그후 시조의 9세손 임탁(林卓)이 고려말 해남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을 역임한 후 조선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서 조천관(朝天冠)을 벗고,나주의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개성 광덕산 마을) 72현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다. 나주임씨(羅州林氏)는 그로부터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진(會津)으로 하였으나 회진현이 나주에 속함에 따라 본관을 나주(羅州)로 바꾸었다. 나주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49명,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해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16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32명,역과(譯科:중국어.여진어.몽고어.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위해 보던 과거)에 8명,의과에 4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기위한 시험)에 8명,주학에 1명 등 21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나주임씨는2000년에는73,556가구에 236,877명이었다. 나주는 전라남도 나주시지역으로, 백제 멸망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940년(고려 태조23)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나주는 고려.조선시대때 주로 목(牧),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였다.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으며,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백호 임 제(林悌,1549년~1587,호는 임제,겸재.자는 자순)당대의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던 나주임씨가 배출한 조선 중기의 시인(詩人) 겸 문신이다.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워난다...."로 시작되는 시조와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 등이 유명하다.임제는 성운(成運)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9)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1577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성균관에 왕이 거둥하여 알성하고 나서 보이던 과거로 알성시)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과 지제교(知製敎:교서를 지어 바치던 벼슬)를 지냈다. 당시 동.서(東西)의 당파 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 다니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당대의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시풍(詩風)이 호방하고 명쾌한것으로 유명하다.저서에는 화사(花史).수성지(愁城誌).임백호집(林白湖集).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 등이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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