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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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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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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원 스승 운곡 원천석,생육신 원 호.,원부의 고금록, 문과에 60명원주는 강원도에 있는 지명으로, 1895년(고종32)원주목(原州牧)이 되었으며,1955년 일부가 원주시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원씨세보에 보면 원씨(元氏)의 得姓(득성)은 기원전 633년 주(周)나라 천자(天子)가 처음으로 원훤(元喧)이라는 성명(姓名)을 내렸으며, 이것이 원씨창세(元氏創世)의 근원이 되었다고 하며,원씨는위(衛)나라 양왕(襄王:제18대왕,재위:기원전 651∼619)때 원훤(元喧) 대부(大夫)의 후손이며, 그 선조가 원(元)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姓)을 원(元)으로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우리나라 원씨(元氏) 시조는 643년(고구려 보장왕2)당태종(太宗:제2대왕,재위:627∼649)이 고구려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八學士)중의 한 사람인 원경(元鏡)이다.원주를 단일본으로 하는 원씨(元氏)는 같은 뿌리이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운곡공계(耘谷公系:원경을 시조로 함),원성백계(原城伯系: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시중공계(侍中公系: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등 크게 3파(派)로 갈라져서 계대(繼代)하고 있으며,상호군(上護軍:정3품 상장군이 개칭된 명칭,1467년(세조13) 오위의 고급지휘관)을 지낸 원충갑(元沖甲)을 시조로 받드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최근에 그가 원성백계(原城伯系) 원극유(元克猷)의 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合譜)되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인물을 보면 운곡공계(耘谷公系)에서는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 원극부(元克富)의 7세손 원천석(元天錫:호는 운곡)이 유명했다.그는 고려 말에 이성계일파의 득세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고향인 원주 치악산에 들어가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였으며 고려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과 교유하면서 시사를 개탄했다고 한다.학문과 문장이 당대에 유명하여 이방원(李芳遠:태종)의 스승이었으나 조선개국에 불사(不仕)하고 절의를 지켰던 고려의 충신이었다.여사제강(麗史提綱)에 의하면 태종이 즉위하여 여러번 요직에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이 그를 만나러 치악산으로 갔으나 끝내 태종을 만나지 않았다.여사제강(麗史提綱)은 1667년(현종8) 유계(兪棨:1607~1664)가 엮은 고려의 편년사로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체재를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정인지(鄭麟趾) 등이 편찬한 고려사(139권 100책)가 너무 방대하여 요점을 파악하기 어렵자 이를 쉽도록 개관하고,체재를 편년체로 바꿨다.태종이 계곡의 석대(石臺)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돌아와 원천석의 아들 원 형(元泂)을 풍기감무(豊基監務:작은 속현에 파견한 감독관)로 삼았으며 태종이 앉았던 바위는 태종대(太宗臺)로 불렀다고 한다.태종대(太宗臺,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강림3리)는 운곡 원천석과 조선 3대왕 태종에 관계되는 유적이다.운곡 원천석은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었으나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개성을 떠나 이곳 강림리에 은거하면서 치악산 정상에 제단을 만들고 흩어진 두문동 72현을 모아 고려 왕조의 영령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며 초근목피로 생활하였다.운곡은 태종과의 만남을 꺼려 피신하자 태종은 끝내 운곡을 찾지못하고 돌아갔다. 이곳은 태종이 운곡을 찾아왔을때 머물던곳이라하여 <주필대>로 불러오다가, 후대에 태종대로 고쳐 불렀다.운곡(耘谷) 원천석은 치악산에 묻혀 살며, 고려를 회고하는 야사(野史) 6권과 시사(詩史) 2권을 저술하여, 운명할 때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그리고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고 당부했으나,증손 때에 이르러 불에 태웠다고 한다.운곡(耘谷)의 증손 원보륜(元甫崙)은 세종때 사헌부 지평(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과 교리(校理:정5품)를 역임했고 6세손 원황은 선조때 경상도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거쳐 한성우윤(漢城右尹종2품)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원진해(元振海)는 횡성현감(縣監:종6품 )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필명을 떨쳤다.고려개국공신으로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던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에서는 좌복야(左僕射: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 원진(元瑨)의 아들 원부(元傅)가 고려 원종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정령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일을 맡아하던 추밀원의 정3품)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를 지냈으며, 충렬왕 때는 감수국사(監修國史:종1품 정승이 겸임함)로서 고금록(古今錄고구려 계승의식과 자주적 사관 입장에서 기술하였으며 사서로 박인량 등과 지음)의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원의 간섭으로 시중이 바뀐 명칭으로 도첨의부에 속한 종1품)에 이르렀다.한편 첨의평리(僉議評理:1362년에 평리를 고친것으로 도첨의부의 종2품재신)에 오른 원선지(元善之)의 아들 원송수(元松壽)는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1등공신에 올랐으며, 공민왕때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으로 있을때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그 울분으로 병사했다.특히 시.문(詩文)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예학에도 밝았다.원송수의 아들 원상(元庠)은 고려말에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색(李穡)과 함께 혹형을 당한 끝에 정몽주의 구제소(救濟疏)로 광주(光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장단의 대덕산에 은거했다.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원상의 아들 원창명(元昌命)은 세종때 아침에 궁전에 들었을때, 난간에 중(僧)옷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그 옷을 갈기갈기 찢고 임금에게 배알하여 "상감께서는 신돈(辛旽)이 나라 망친 일을 듣지 않으셨습니까.이 금중(禁中)에 승니의 자취가 있으니,전철을 밟을까 저어합니다"라고 말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한편,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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