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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추앙받은 장현광 이괄의 난 평정한 도원수 장만 "덕(德)은 도(道)의 지선(至善)한 것" 과거급제자 310여명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인동장씨의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때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신호위는 개경과 변방의 수비를 담당한 경군의 핵심주력부대로 총병력은 7000명,상장군은 정3품)을 역임했고 아들 장 선(張善)이 1072년(고려 문종26)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6위의 하나로 정3품)에 올라 후손들이 옥산(玉山:경북 칠곡에 속한 인동 옛지명)에 정착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 조선후기에 옥산(玉山)이 인동(仁同)으로 개칭됨에 따라 인동(仁同)으로 본관을 삼았다.그러나 현재도 옥산장씨(玉山張氏)를 고수하는 종인도 있다. 문헌과 각종 자료에 의하면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시조 장금용(張金用)을 1세조로 받들며 여러 파(派)로 분류하고 있으나 인동 본향에는 종파(宗派).황상(凰 ).진평(眞平).진가(眞佳).남산(南山) 등 다섯 파의 자손들이 집중세거하고 있어 다섯 파(派)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동장씨는 직제학을 지낸 장계를 1세조로 하는 인동장씨계(경북 영주.예천).문충공 장계임을 1세조로 하는 인동장씨계(황해도일원 세거).예빈경을 지낸 장용서를 1세조로 하는 인동장씨계(평북 용천지역 세거).상서(尙書:정3품 장관)를 지낸 장연우를 1세조로 하는 인동장씨계(전라도 지역).장정필을 1세조로하는 인동장씨계(함흥 영흥지역 세거)가 각각 1세조를 다르게 받들고 있다. 시조는 고려초에 인동현(仁同縣)의 옥산(玉山)땅에 처음 복거(卜居:좋은땅을 찾아서 살곳을 정함)한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정3품)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이다. 문강공(文康公) 여헌선생(旅軒先生) 유록(遺錄)에는 "고려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공(高麗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公)을 시조로 모시는 것은 우리가 선대(先代) 조상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조상은 몇 대(代)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 선대조상이 이곳 인동(仁同:옥산 玉山)땅에 전거(奠居)하신 내력을 살펴보면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20대(代)뿐인데 그 이상의 선조께서도 이곳 인동 땅에 본래 적(籍)을 두었는데도 아득히 멀어서 전(傳)해오지 않는 것인가 증거 할 수 없고 얻어듣지도 못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인동장씨 족보와 종중(宗中) 선부노(先父老)의 시장(諡狀),가장(家狀),행장(行狀),신도비(神道碑),유허비명(遺墟碑銘), 묘비(墓碑) 등 종족사(宗族史)의 모든 문헌(文獻)에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 휘 금용(諱金用)부군(府君)을 시조(始祖)로 삼았으며 그이상의 선조는 전(傳)해오지 않는다고 한다.우리나라 장씨(張氏)의 조상이 중국에서 들어 왔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나 인동장문(仁同張門)은 중국에서 들어온 조상이 누구인지 전(傳)해오는 문헌(文獻)의 증거(證據)가 없어 알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문헌에는 우리나라 장씨(張氏)는 혹자(或者)가 말하기를 본래 중국사람으로 옛날 한 장수가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고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와서 아들 한사람이 남아 살았으니 드디어 우리나라 사람이 되었다.오장혹운본이중원인(吾張或云本以中原人),고유일장(古有一將),봉제명래(奉帝命來),정(征), 아동이정지인류일자이거언(我東而征之因留一子以居焉),수위동인(遂爲東人)고 하였으나, 이것은 약 170년뒤에 문강공(文康公) 5세손인 동추공(同樞公) 장지학(張趾學)이 서기 1769년(영조45)에 옥산장씨(玉山張氏) 족보서문(族譜序文)에서 이는 다만 전(傳)해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지 확실한 것이 아니다.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공(公)은 고려의 국기(國基)를 닦은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부월(斧鉞:생살권의 상징으로서 또는 출정하는 장군에게 통솔권의 상징으로 주던 작은도끼와 큰도끼)의 현직(顯職)을 맡아 큰 공적을 쌓아 익위보리(翼衛補理)한 사적(事蹟)이 많았다고 하나 세월이 오래되고 세대(世代)가 멀어지므로 인하여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묘나 사적을 알수없게 됨)되어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수 없다고 한다.인동장씨는 인동(仁同)의 인의동(仁義洞)에 옥산사(玉山祠)를 세워 숭의묘(崇義廟)에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제향(祭享:제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으로 번성한 인동장씨의 계보는 대성 답게 여러파(派)로 갈리어진다. 고려초 인동에 정착한후 고려중기부터 분파) 되기 시작하여 무려 25개파로 분파(分派)되어 왔다. 인동향내(仁同鄕內) 5개파 즉 종파(宗派),남산(南山),진가(眞佳),진평(眞坪).황상(凰 )파(派)가 인동(仁同) 본향을 지켜 왔으며 이밖에 20여파(派)가 분파되어 전국에 걸쳐 살고 있다. 인동장씨는 우리나라 286성씨 가운데 순위가 9위이며 이 가운데 인동장씨가 538.803명으로 전국 장씨(張氏)의 66.5%이고 전국성씨 본관별 순위가 12위이다. 그리고 본관을 인동(仁同)으로 쓰는 사람이 127.731세대에 538.803명이고, 옥산(玉山)으로 쓰는 사람이 487세대에 2.024명으로 옥산(玉山)으로 쓰는 사람보다 인동으로 쓰는 사람이 많다. 인동(仁同)이나 옥산(玉山)은 같다. 이는 일제강점기때 강제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할때 다르게 되었다가 인동(仁同)으로 환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동장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56명,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하여 보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에 31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68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쓰기 위하여 보이던 과거)에 23명,의과에 9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가지)에 22명 등 310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서 인동장씨는2000년에는 184,863가구에 인구는 591,315명이었다. 인동(仁同)은 경상북도 구미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757년(경덕왕16)에는 수동현(壽同縣),인동현(仁同縣)으로 고치고 별호를 옥산(玉山)이라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상주목(尙州牧) 경산도호부(京山都護府:성주)의 속현(屬縣)으로 병합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고 약목현(若木縣)을 속현으로 하였다. 1413년(태종)에 인동현에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604년(선조 37)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6년 경상북도 인동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군이 폐지되었고 일부 지역은 인동면이 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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