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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씨

    장(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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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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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는 우리나라 도운 장군으로 무예 천문. 지리. 한의(漢醫)에도 밝아절강(浙江)은 중국 동남부의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자강(陽子江)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다.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지고 항주(杭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절강장씨(浙江張氏)의 시조 장해빈(張海濱:1575년 4월12일~1657년 11월 19일,호는 화헌 華軒)은 중국 항주의 속현인 오강현사람이라고 한다.그는 1597년(선조30) 정유재란때 오유충의 휘하 장수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울산의 중성 싸움에서 유탄을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軍威)에 정착 세거하였다고 한다.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있으며 본관을 절강(浙江)으로 삼아 계승하고 있다.장해빈(張海濱)은 기원전 200여년전 한나라 승상유후 장양(漢丞相留侯張良)의 후예라고 하며,그의 증조는 맹경황명조진사(曾祖孟慶皇明朝 進士)즉 증조 할아버지는 장맹경이며 명나라때 진사를 지냈고,할아버지는 충원 등문과 행통주 양주 온주등 자사(祖:忠源 登文科 行通州.楊州.溫州 等刺史)즉,할아버지는 장충원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통주와 양주,온주 등의 자사(刺史:한나라 때 군(郡)과 국(國)을 감독하기 위해 각 주에 둔 감찰관)를 지냈다고 하며,부응화 행태의원갑(父應華 行太醫院監),즉 아버지는 장응화로 태의원감을 지냈다고 한다.그는 서기 1597년(선조30)정유재란때 명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오유충(吳惟忠)의 휘하 장군으로와 죽산 중원전투에서 개선하고 울산의 증성전투에서 적을 물리쳤으나 유탄에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軍威)에 정착하여 살았다.그의 후손들은 장해빈을 1세조상으로 받들고 있으며 고향인 절강을 본관으로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시조 장해빈은 무예뿐아니라, 천문.지리.한의(漢醫)에도 밝았다고 한다.1892년(고종29)에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 국방차관)겸 동지의금부원사(同知義禁府院事왕명을 받아 죄인을 추국하던 의금부 벼슬)에 추증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절강장씨는1985년에는 총 778가구 3,120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076가구3,300명이었다.경북 군위군 군위읍 대북리에 시조의 제단이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0일 향사(제사)하며 북산서원에서 제향(祭享:나라에서 올리는 제사.제사의 높임말)한다.흥덕장씨(興德張氏,흥성장씨)시조는 신라말에 오월국에 들어가 중국어 배우고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합한 뒤에 귀국흥덕(興德)은 전라북도 고창군의 지명으로 고려때 충선왕이 즉위한 뒤 흥덕현으로 고쳤다.조선개국후에 고창과 갈라서 현감을 두었으며1895년(고종32)에 흥덕군으로 승격하였다.흥덕장씨(興德張氏)의 시조 장유(張儒:자 청계 淸溪)는 태사공(太師公) 장정필의 후손이며상질현사람으로 신라말에 난을 피하여 오월국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우고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합한 뒤에 귀국하였다고 한다.그는 고려 광종때에 예빈성에 있으면서 중국사신이 올때마다 그들을 접대하였다.그후 벼슬이 광평시랑(廣評侍郞:광평성은 고려초에 백관을 다스리던 관청이며 시랑은 정4품차관)에 이르렀고, 장유(張儒)의 6세손 장기가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 정2품 부총리)를 지내고 흥산군(興山君:흥산은 흥덕의 옛지명)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본관을 흥성으로 해서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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