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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三更)인제...<이조년>1464년(세조10,갑신년) "우리나라 최고"의 족보1536년 한글로 새긴 최초의 비석,훈민정음 창제 당시 글씨체와 흡사염라대왕 이집 <포염라(包閻羅)>성주이씨 대종회에서 밝힌 성주이씨 유래와 문헌에 의하면,성주이씨(星州李氏)의 시조는 신라말엽에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를 지낸 이순유(李純由)로 그는 경순왕(927~935)때의 유명한 재상(宰相)이었다고 한다.천년사직 신라가 고려에 손국(遜國)하자,아우 이돈유(李敦由)와 더불어 마의태자(痲衣太子:경순왕의 첫째아들 경주김씨,통천김씨,부안김씨의 선조)와 함께 신라의 천년 사직(社稷)을 보존하기 위해구국의 방책을 기도했으나,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의 성주읍 경산리(京山里)에 은거하였다.고려 태조 왕건은 이순유(李純由)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고려에서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이극신(李克臣)으로 고쳐, 경산(京山.성주의 옛이름)으로 옮겨 살았다.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며,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우두머리)으로 삼았다.그후 고려 원종(1260~1274)때 시조 이순유의 11대손인 이장경(李長庚)이 다섯아들을 두었는데,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크게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들날림.입신출세)함으로써 이때부터 자손이 번창하였으며,그 가운데서도 막내인 이조년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첫째 아들 이백년은 밀직사사(密直司事:정령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밀직사의 벼슬)를 지냈으며, 둘째 이천년(李千年)은 참지정사(參知政事:고려때 종2품재신),셋째 이만년(李萬年)은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에 올랐고,넷째 이억년(李億年)은 개성유수(開城留守:유수는 외직으로 정2품,또는종2품관),막내 이조년(李兆年:시호는 문열공 文烈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재신)에 올라,5형제 모두가 큰명성을 떨쳐 성주이씨(星州李氏)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이들 5형제는 나라에 공이 커 이장경(李長庚)은 상호군(上護軍:정3품으로 상장군이 고쳐진것)을 지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좌시중(左侍中:종1품 정승)에 올라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군되었으며,도첨의정승(都僉議 政丞:도첨의 정승은 원의 간섭으로 종1품 문하시중이 바뀐직명으로 이때부터 조선시대에는 재상을 '정승'이라함)에 이어, 판전리사사(知典理司事:이부상서, 즉 조선때 이조판서)등을 거쳐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해졌다.이조년(李兆年)은 1285년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고려때 빈객의 연향을 맡아보던 예빈시의 정9품) 등을 거쳐,정당문학(政堂文學:고려때 중서문하성의 종2품)에 승진하였고, 다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예문관은 고려때 제찬과 사명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대제학은 종2품)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그는 인품과 학행에 뛰어났고 충심으로 간언(諫言)하는 일이 많았으며, 시문(詩文)에 뛰어났는데, 유명한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는 이조년의 작품이다."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이조년>(해석)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밤은 깊어 삼경인 때에나뭇가지에 깃들여 있는 봄의 정서를 소쩍새야 할 리가 있으랴마는다정한 것이 병처럼 되어서 잠을 못 들고 있노라(뜻 풀이)*梨花(이화): 배나무꽃으로 애상.결백.청초.냉담 등의 뜻을 지님*月白(월백)하고:달이 밝게 비치고*銀漢(은한):은하수(銀河水)*三更(삼경): 한밤중(밤 11시에서 새벽 1시. 자시(子時))*일지춘심(一枝春心): 한 가지 나무에 어려있는 봄날의 애상적인 마음*子規(자규):소쩍새.접동새.불여귀.귀촉도.두견새 등의 별칭이 있으며, 처절.고독.애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음문열공 이조년이 지은 유명한 이 시(詩)는 다정가(多情歌)로도 불리며, 이 시는 봄밤의 정서를 시각적.청각적 이미지의 대비를 통해 형상화한 고시조이다. 전체 3장 6구로 이루어진 평시조로서 시의 형식은 4음보의 외형률을 지닌 정형시이다. 청초,결백,냉담,애상 등의 속성을 지닌 이화(梨花:배꽃)를 제재(題材)로 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한(恨)의 정서를 애상적인 어조로 노래한 서정시이다.이장경의 손자 이승경(李承慶)은 원나라에서 요양성(遼陽省)의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에 올랐으며, 원나라 황제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公)으로 추봉하였다.성주이씨는 처음에는 <농서이씨>로 관향을 삼았으나, 이장경의 아들 대에서 크게 번창하자,조선시대에 향리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로 관향을 정하게 되었다.조선성씨만성보(朝鮮姓氏萬姓譜)에 의하면,성주이씨(星州李氏)는 중흥시조인 이장경(李長庚) 이후 8세손 안에 문형(文衡:대제학)이 18명,봉작(封爵:군이나 후.부원군)을 받은 사람이 11명,상신(相臣: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 정1품 정승)이 15명,식읍(食邑:나라에 공을 세워 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한 고을)을 받은 인물이 5명,부마(駙馬:왕의 사위,부마도위의 약자)가 2명,문과급제자(대과 大科)는 102명에 달하여, 삼한(三韓)의 큰 성씨로 우리나라에 발자취를 남겨 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성주이씨는 성주를 관향으로 하는 다른 이씨와 구별하기위해, 중흥시조 이장경이 농서군으로 추봉된 이후 농서이씨( 西李氏)로 부르기도 하였으나,1613년 계축보(癸丑譜) 발간 때부터,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관향을 쓰고 있다.지금은 성주이씨 대종회로 통합을 하였고,족보도 갑인보(甲寅譜)를 만들때, 성주이씨 대동보에 동보하게 되었다.성주이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02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3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352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위해 보던 과거)에 2명,의과에 12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과거)에 2명,주학에 3명 등 506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서 성주이씨는1985년에는37,251가구에 153,146명,2000년에는 58,134가구 186,188명이었다.성주(星州)는 경북 남서쪽 지명으로,757년(경덕왕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였다.995년(성종14)에는 대주(岱州)로 바뀌어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으며,1018년(현종9)에는 경산부로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 성주목(牧)으로 승격되었다가,1616년(광해군9)에는 신안군으로,1631년(인조1)에는 신안현으로 개칭되어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성주군이 되었고,1914년 군.면 폐합때 관할면이 성주.벽진면 등 9개면으로 폐합되었고,1979년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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