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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역사의 뿌리깊은 명문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신정선아리랑의 작가 전오륜과 충절을 지킨 고려말의 전 순(全順)간송 전형필 노블레스 오블리쥬 실천,마지막 여성광복군 전월선 지사정선전씨(旌善全氏)의 시조는 백제의 개국공신으로 환성군(歡城君:환성은 현재의 천안)에 봉해진 전섭(全攝)이다.시조 전섭(全攝)은 백제의 개국공신으로 고구려 동명성왕(주몽)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옮겨가 부여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개국할때 같이 도운 오간(烏干) 마려(馬藜)을 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范昌) 조성(趙成) 등과 함께 백제개국에 공을 세워 환성군에 봉해진 십제공신(十濟功臣:10명의 공신)의 한사람이다.그러나 시조 전섭 이후의 기록은 7세대에 걸쳐 전란으로 소멸되었다고 한다.우리나라의 전씨(全氏)는 정선전씨,천안전씨,성산전씨 등 18본으로 분관되지만 모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받들고 정선전씨를 대종(大宗:대종가의 종손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한다.<증보문헌비고>에는 전섭의 손자 전 반(全槃)이 백제 다루왕때 낭장(?將고려때의 품계는 무관의 정6품,별장의 위 품계)으로 한(漢)나라에 들어갔는데 전반(全槃)의 5대손인 전선(全渲)이 대광공주(大光公主)를 수행하고 신라 내물왕때 신라에 들어와 봉익대부(奉翊大夫:고려때는 문관의 품계)로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고려때는 밀직사의 정3품)를 지냈으며 전법판서(典法判書:고려때는 형조의 정3품 장관)에 올라 정선군(旌善郡)에 봉해졌다고 한다.후손들은 정선군에 봉해진 전선(全渲)을 1세조로 받들고 정선(旌善)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오면서 우리나라 모든 전씨(全氏)의 시초를 이루었다.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1세조 전선(全渲)의 9세손인 전이갑(全以甲).전의갑(全義甲).전 락(全樂) 형제들이 유명하다.이들은 고려개국의 삼충공(三忠公)으로 후삼국 통일의 야망을 키우던 왕건이 팔공산 오동숲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일대 접전을 벌이다 적에게 포위를 당하자이들 3형제 중 전이갑이 태조 왕건으로 가장하여 견훤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왕건을 탈출시키고 3형제는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이밖에도 고려의 절신으로 정선아리랑의 작가인 채미헌 전오륜(全五倫)과 고려왕가에 충절을 지킨 고려말 공조판서(工曹判書:정3품으로 대사공이라 함) 전 순(全順)과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국방장관)에 올랐던 전 신(全信)등이 있다.전영보(全英甫)는 대호군(大護軍:오위의 종3품) 밀직부사(密直副使:정령의 출납과 숙위와 군기에 관한일을 맡음 정3품)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에 올랐으며 전이도(全以道)는 공민왕때 예부시랑(禮部侍郞:예부의 정4품 차관)을 거쳐 판전농시사(判典農侍事:제향에 쓰는 곡식을 맡아보던 관청의 으뜸벼슬)에 올라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의 침입때 개경수복에 공을 세워 이등공신(二等功臣)으로 안동도 병마사(安東道兵馬使:병사.절도사라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무관)가 되었다.고려말의 절신(節臣)인 전오륜(全五倫)은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홍문관의 교리(校理)중에서 겸임하던 예문관의 정4품) 국자좨주(國子祭酒) 좌산기상시(左散驥常侍내사문하성의 정3품 간쟁담당관) 등을 지내면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송 산(松山) 조 견(趙 絹) 등과 교유를 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杜門洞:개풍 광덕산의 마을)에 들어가 절개를 지켰다.뒤에 고향인 서운산(瑞雲山)에 은거하며 옛날 중국의 백 이(伯夷) 숙 제(淑齊)가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캐어 먹은 고사(故事)를 본따 호(號)를 채미헌(採薇軒)이라고 하였다.정선아리랑부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지켜"...눈이 오려나. 비가 오려나 억수장마지려나 만수산(萬壽山)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민족의 애환이 서린 정선아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그러나 이 아리랑의 원작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노랫말을 지은 이는 정선전씨(旌善全氏) 도시조의 29세 손인 고려말 충신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이다. 그는 고려말 공양왕 때 대제학(大提學:2품 문형)을 지낸 오른 당대의 명신이었다.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정선으로 낙향하여 서운산 기슭에 은거하며 만수산 검은 구름(이성계 일파의 음모)이 엄습해 오는 서울을 바라보며 망국의 울분을 아리랑의 가락에 실어 보냈다.이처럼 정선아리랑은 전씨(全氏) 문중의 충절의 애환이 서린 노랫가락으로 이 충의(忠義)의 정신이 시조로부터 내려온 2천년 전씨(全氏)가문의 전통정신이라는 것이다.한말에는 순국지사 전봉학(全奉學)과 독립운동가로 안창호와 신민회를 조직하고 배일 운동을 벌였던 전덕기(全德基)와 전덕명(全德明)이 유명했으며 의병장 전덕원(全德元).전예순(全禮淳).전인학(全仁學).전 협(全協) 등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전씨가문을 빛냈다.이밖에 문화재 지킴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도 정선전씨가 배출한 인물이다.간송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1926년 휘문고보를 거쳐 1929년 일본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오세창의 지도로 민족문화재를 수집해온 <문화재 지킴이>로 유명한 인물이다.그는 한남서림을 경영하며 우리의 문화재가 일제수탈기에 일본으로 넘어가는것을 막았다.1940년에는 경영난에빠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광복후 보성중학 교장을 맡기도했다. 그가 수집한 문화재는 성북동의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간송미술관)에 보존하였는데,수집품중에는 청자정병(국보65호),청자연적(국보74호)를 일본에서 구입해 들여왔고 일본상인이 갖고있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국보135호)를 몇년씩 공들인 끝에 사들였으며 혜원의 풍속인물화와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도 수집했다.또한 1942년에는 안동에서 거금 2,000원을 주고 구입한 훈민정음(訓民正音)원본을 비롯 수많은 고서적.석조물.고서화 등이있고 10여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고 한다.1964년에 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간송 전형필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금싸라기땅을 팔아 "사기그릇"을 사는 바보로 손가락질 받기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송 전형필 같은 선지적(先知的) 문화독립운동가(文化獨立運動家)가 없었다면 광복이후에도 우리나라는 "문화재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간송은 현대인들이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마지막 여성광복군' 전월선(全月善)여사도 정선전씨를 빛낸 인물이다. 전월선 지사는 1923년 2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1939년 9월 중국 귀주성(貴州省) 계림(桂林)에서 <조선의용대>에 입대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 및 병사초모 등의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1942년 4월 20일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8차 국무회의의 결의에 따라 광복군으로 편입되었고 1945년 8월 14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광복군 제1지대 대원(隊員)으로 활동하다가 8·15광복을 맞이했다.전월선 지사는 1990년에는 광복군으로 활약한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으며 20여년전 중풍으로 쓰러진 이후 특별한 외부 활동 없이 큰아들인 김원웅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장 자택에서 며느리의 돌봄으로 별탈없이 지내왔었으나 2009년 5월25일(월요일)향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큰아들인 김원웅 전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장(3선 국회의원,현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장)은 2009년 5월 전화통화에서 '어머니가 몇일전부터 기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탈수증세 등으로 위독해져 보훈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됐으며 현재까지 의식회복이 안된 상태'라고 밝혔었다.김전의원은 '여성광복군은 매우 소수의 인원이 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어머니는 17~8년전쯤 타계하신 신정숙여사 이후 2009년까지 생존한 "마지막 여성광복군" 이라고 밝혔었다.백범 김 구의 주례로 가약을 맺은 남편(광복군 의열단에서 활약한 故 김근수 애국지사.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은 1912년 9월 27일 경남 진주 출생으로 중국 사천성 중경으로 건너가 이준식이 이끄는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고 산서(山西) 화북(華北)지구에서 지하공작에 참여하는 등 일제강점기말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1977년 건국포장,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전월선 지사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광복군은 대표적인 항일 군대로 1940년 9월17일 중국 중경(重慶)에서 조직된 이후 8·15 광복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할하에서 활동했다.정선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문관을 뽑아쓰기 위하여 3년마다 보이던 과거)에 8명,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하여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으며 3년마다 시행됨)에 15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22명 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아쓰기 위하여 보던 과거)에 1명 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기 위해 보던 잡과의 한 가지)에 1명 등 모두 47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정선전씨는 2000년에는 44,316가구에 141,380명이었다.정선(旌善)은 강원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 정선이라 개칭하여 명주(溟州:강릉)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1018년(고려 헌종 9) 그대로 명주의 속현으로 하였다가 정선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까지 유지하였으며 1895년(고종 32)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정선군,1973년 정선면과 동면 사북출장소,1980년 신동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5년 사북읍이 고한읍과 사북읍으로 분리되었다.죽산 전씨(竹山全氏)죽산(竹山)은 경기도 용인시과 안성시 일부에 속해있던 옛 지명으로 고려초에 죽주(竹州)로 고쳤다가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어 음평(陰平)또는 연찬(延昌)이라 하였다. 현종때는 광주에 속하였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 죽산으로 개칭,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한 후 1895년(고종 32) 군으로 되었다가 1913년 일부는 용인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안성군(安城郡)에 합해졌다. 죽산 전씨의 1세조는 도시조 전섭(全攝)의 28세손인 전한(全閒)이다.전한(全閒)은 고려 고종조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밀직부사(密直副使왕명을 출납하던 밀직사의 3품)에 올라 1231년(고종 18) 몽고군이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다.그리하여 후손들은 전한을 관조(貫祖:본관을 얻게된 선조)로 하고 정선 전씨에서 분적,관향을 죽산으로 하게 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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