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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배씨(裵氏)는 문헌에는 총 59본관이 있으며,2000년조사에서는 총 372,064명이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배씨대종회> 기록에 의하면, 배씨(裵氏)의 뿌리는 2천여년 전 신라 건국초기의 시대로 올라간다. 배씨(裴氏)는 한국의 대표 성씨로 일찍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기원전 57년 신라가 개국하기 이전에 6부(部)의 촌(村) 중, 현재의 경주시 명활산 아래 '분황사' 일대 지역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村長)인 지타(祗陀:삼국유사의 기록에는 6부 촌장 모두가 천강한 신인(神人)이라 함)가,사로 6부촌장(斯盧六部村長)들과 함께 69년 3월 알천 언덕위에 모여, 유덕한 임금을 찾아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할 것을 의논할 때, 양산(楊山)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의 알에서 부화한 '박혁거세'의 탄생을 보게 된다.6부촌장들은 기원전 57년(한 오봉,漢 五鳳) 갑자에 13세의 박혁거세를 초대 왕(王)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서라벌로 정하였다.[삼국유사]배씨(裵氏)의 시조 지타(祗陀)는 개국1등원훈에 서훈되어 태사(太師)에 올랐으며,서기 32년(유리왕9)에 금산가리촌을 한지부(漢祗部:현재의 경주)로 개편하고, 배씨로 사성(賜姓)함으로써 배씨(裵氏)가 비롯되었다.그때 함께 사성받은 이씨(李氏).최씨(崔氏).정씨(鄭氏).손씨(孫氏).설(薛氏)씨와 함께 배씨는 가장 오랜 성씨(姓氏)가 되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배씨 득성조(得姓祖)인 지타(祗陀)에 관련된 기록이 전한다.신라 태조 3년(서기 전 55 병인년)에 6부(六部)공신의 위차(位次)를 정할 때 시조 지타(祗陀)공(公)은 개국좌명일등원훈총재태사(開國左命一等元勳總宰太師)에 이르렀다.법흥왕은 서기 516년 지타(祗陀)에게 시호(諡號)를 문양(文讓)으로 내렸으며 서기 656년(무열왕 3)에 지타 를 장열왕(壯烈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배씨(裵氏)는 지타(祗陀) 이후 기록이 실전(失傳:고적이나 묘지가 대대로 이어온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되어,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우리나라의 배씨는 총 59본관으로 문헌에 전하나, 현재는 경주배씨 성주파(星州派).대구파.흥해파(興海派).협계파(俠溪派).곤양파(昆陽派).화순파(和順派)등 10본 내외가 전하며 모두 연원이 같은 동계혈족이다.모든 배씨는 신라 6부촌(六部村)중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한지부 漢祗部)의 촌장 지타(祗陀)공에 연원을 두며, 비조(鼻祖,처음시조)인 지타(祗陀)의 후손이라는 고려의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이 경주배씨의 중시조이다.중시조 배현경(裵玄慶,초명(初名)은 백옥삼(白玉衫),시호는 무열 武烈)은 첨력(瞻力)이 과인(過人)하고 용맹과 지모(智模)가 웅위(雄偉)하였다고 하며, 궁예(弓裔)가 고구려 영토를 점거하고 태봉국(泰封國)을 세울때 이를 도와 행오(行伍-현재의 분대장 정도)에서 출발하여 기장(騎將)에 이르렀다.그러나 궁예가 왕(王)으로 즉위한지 불과 수 년에 처자(妻子)를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날로 심(甚)해지자, 당시 동료 기장(騎將)이었던 신숭겸(申崇謙:평산신씨시조),복지겸(卜智謙:면천복씨시조),홍유(洪孺)등과 밀의하여 궁예를 축출하기로 하고, 왕건(王建)에게 왕창근(王昌瑾) 등 복술가(卜術家)의 예언(豫言)을 설명하면서, 천명신우(天命神佑)로 중심이 공(公)에게 돌아왔으니 이를 따르지 않으면 화가 미치리라 하고 거사를 권하여, 왕건(王建)을 고려태조로 옹립하고 개국1등원훈(開國1等元勳)에 서훈(敍勳훈등과 훈장을 내림)되었다.배현경은 서기 919년(태조2) 도읍을 송도로 옮길때, 개주도찰사(開州都察使)가 되어 새도읍의 건설에 공을 세웠으며,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겸 순군부영도통병마대장에 이르렀다.서기 936년(태조19) 그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고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하고 손을 어루 만졌다고 하며, 왕건이 나가자 죽었으며 태조 왕건은 배현경의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대성통곡 하였다고 한다.서기 995년(성종14) 배현경은 태조묘에 배향되고, 평산 태백산성에 태사사(太師祠)를 세워 사철상(四鐵像)을 수립하고 매년 봄.가을에 향사(享祀:제사)한다.배현경의 현손(玄孫:고손자) 배사혁(裵斯革)에게 네 아들이 있는데, 첫째 배원룡(裵元龍)은 김해, 둘째 배천룡(裵天龍)은 성주, 셋째 배운룡(裵雲龍)은 대구,넷째 배오룡(裵五龍)은 흥해로 각각 분적하고, 다시 흥해에서 협계로 갈린 것으로 문헌에 나타나 있다.성주파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9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6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23명,의과에 1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과거)에 3명 등 42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성주파는1985년에는 15,477가구 64,297명이었으며,2000년에는 27,829가구 90,239명이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경주배씨(慶州裵氏)는1985년에는 21,361가구 90,034명이었으며,2000년에는 7,068가구 22,069명이었다.본관은 시조의 발상지인 한지부가 경주(慶州)로 개칭됨에 따라 경주라 하였다.배씨는 후대에 내려오면서 고려조에 공이 있어 분성군에 봉해진 배원룡(裵元龍)의 후손이 <분성배씨>, 고려 원종 때 홍안부원군에 봉해진 배인경(裵仁慶)의 고조 배위준(裵位俊)의 후손이 <성산배씨>, 고려조에 나라에 공이 있어 달성군에 봉해진 배운룡(裵雲龍) 후손이 <달성배씨>, 충숙왕때 흥해군에 봉해진 배전의 5대조 배경분(裵景分)의 후손이 <흥해배씨>, 달성배씨에서 9세손 배맹달(裵孟達)이 세조 때 곤산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 후손이 <곤양배씨>등으로 분적되었고,그밖에 경주 처사공 <충과>파, 성산 복야공 <영찬>파, 화순 진사공 <연>파, 함흥 교서공<덕수>파,협계 합문 사인공<진>파 등으로 나누어졌으나, 모두 경주배씨의 분파로 득성시조 와 중시조의 통일 혈손이므로 근래에는 <경주배씨>로 일원화하였다.배씨는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의 후광을 받아 고려조에서 번영을 누렸고, 조선조에서도 영의정 1명, 청백리 1명, 공신 2명, 문과급제자 47명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이를 각 파별(派別)로 보면 다음과 같다.분성파에서는 파조 배원룡(裵元龍)이 고려조에서 출장입상한 공으로 분성군에 봉해졌다.계당(桂堂)배맹후(裵孟厚)는 조선 세조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성종때 이조참의(參議:정3품 차관보)를 지냈고, 정곡(靜谷) 배세적(裵世績)은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현감(縣監:종6품수령)을 지내고 청렴함으로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는 선조때 문과에 급제,광해군때 이조참의(參議:정3품 행안부차관보)에 올랐으나, 인조반정 후 대북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삭직되었다.그는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배경남(裵慶男: ~1597년)은 임진왜란때 경상도의 유격장(遊擊將고려때 무산계 제13등급에 속하는 종5품 하(下)품계의 유격장군)으로 공을 세우고,순찰사(巡察使:조선시대 무관직으로 전시에 두었던 권설직(權設職:임시직)이며,대개 지방의 병권(兵權)을 가졌던 행정관이 이를 겸직하였다. 그 예로 임진왜란때 정3품의 문관으로 광주목사(光川牧使정3품)였던 권율(權慄)이 전라도 순찰사를 겸직)로 내려온 권율(權慄)의 그릇된 보고로 한때 파직당하였으나,그 후 종군할 것을 원하여 1594년 6월,삼도수군절제사(節制使주.부의 지방장관직을 겸하여 각 거진을 지휘한 정3품무관)이순신(李舜臣)장군 휘하에서 좌별도장(左別都將)으로 당항포해전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조방장(助防將:주장을 도와서 적을 막는 장수인데 무재를 갖춘 수령이 이 임무를 맡음)이 되었다. 그의 아들 배홍우(裵弘祐)는 광해군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 인조반정후 현감(종6품 수령)을 지냈다.성산파에서는 파조(派祖) 배위준(裵位俊)이 고려때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940년 신흥사의 동.서 벽에 초상이 그려진 공신)에 올랐고,그의 5대손 배인경(裵仁慶)은 보문각직학사(直學士정4품)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정령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한 추밀원의 종2품재신)를 지내고 충숙왕때 흥안부원군에 봉해졌다.배인경의 현손(玄孫:고손자) 배규(裵規)는 우왕 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 조선 세종 때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하던 사간원의 정3품)을 지냈다.정절공(貞節公) 배극렴(裵克廉)은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고려말에 문하우시중(右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에 이르렀으며, 이성계의 혁명을 도와 조선개국 1등공신으로 성산백(伯:오등봉작제의 3번째 훈작)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정1품정승)에 올랐다.효숙공(孝肅公) 배흥립(裵興立)은 임진왜란 때 조방장으로 전공을 세우고 뒤에 공조참판(參判:종2품 차관),영흥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고려.조선시대에 대도호부에 파견되었던 정3품으로 부윤.목사와 함께 주로 문신(文臣)이 임명되는 청환직,대도호부는 지방행정관청)등을 지냈다.그의 아들 배시량(裵時亮)은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민영(民營)의 막하에서 선전하다가 민영이 전사하자, 대신하여 군대를 지휘했고, 뒤에 경기도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각 도의 수군을 총지휘하기 위하여 두었던 정3품 수사(水使)라고 하는데,임기는 720일),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병사兵使),포도대장(大將:종2품 경찰청장)등을 지냈다.충숙공(忠肅公) 배명순(裵命純)은 정묘호란 때 인조를 강화로 호종하였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결전을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된 후 철수하는 청병과 철령에서 싸워 이기고 계속 추적,안변에서 적과 분전하다 전사했다.달성파에서는 배정지(裵廷芝)가 충렬왕때 별장(別將:조선시대에는 산성.나루를 지키던 종9품이나,각 영(營).청(廳)에 소속되어 있던 정3품,종2품의 당상군관 堂上軍官)으로 연기에서 합단을 격파하고 중랑장(中郞將:정5품무장)이 되었으며 충선왕 때 호군(護軍정4품장군)으로 전농시(典農寺:나라의 제사에 쓰던 곡식을 맡아본 관아),유비창(有備倉:고려후기 구휼기관으로,연호미 거두는 일을 맡았으며,충선왕때 의창곡(義倉穀)을 보충하기 위해 연호미법(煙戶米法)을 제도화함에 따라 설치)의 일을 관장했다.그리고 충숙왕 때 탐라에서 김성(金成)이 반란을 일으키자 존무사(存撫使:존무사는 고려 후기 재난이 발생하거나 병란(兵亂)이 일어나는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서 지방에 파견하였던 임시 벼슬)가 되어, 이를 토평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고려때 왕명(王命)의 출납(出納),궁궐의 경호 및 군사기밀(軍事機密)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2품이었다가,1311년(충선왕3)에 정3품으로 낮춤)가 되었다가, 옥사가 일어나 유배당했다.그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배성경(裵成慶)은 공민왕때 홍건적의 침입을 막다가 과천에서 아들 배광유(裵光裕)와 함께 전사했다.둘째아들 배천경(裵天慶)은 공민왕때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정령의 출납을 맡고 궁중을 숙위하던 추밀원의 종2품재신),경주부윤(府尹:2품지방장관)등을 지내고,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셋째아들 배함경(裵咸慶)은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형 배성경과 함께 참전, 검교장군(檢校將軍정:4품 장군,검교는 명예직)이 되었다.양호공(襄胡公) 배맹달(裵孟達)은 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적개공신2등으로 곤산군에 봉해졌다.그래서 그 후손들은 <곤산배씨> 라고도 한다.흥해파에서는 파조 배경분(裵景分)이 고려조에 검교장군이 되었고, 6세손 배전이 충숙왕 때 조적의 난을 당해 왕을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고 흥해군에 봉해졌다.전의 아들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는 고려말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고려.조선시대 궁중의 가마.마필.목장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으뜸벼슬)를 지내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안동으로 돌아와 은둔하고 절의를 지켰다.배상지의 아들 배환(裵桓)은 조용(趙庸)의 문인으로 태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전라감사(監司:종2품관찰사.도지사)를 지냈다. 배삼익(裵三益)은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성종때 문과에 급제,황해도 관찰사(종2품감사)를 지냈으며 글씨를 잘썼다. 또한 배삼익(裵三益)과 그의 아들 배용길(裵龍吉)이 이름을 날렸다.성산 복야공파에서는 배응경이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때 나주목사로 혼자서 금산성을 지켰다. 이순신이 불러다가 막하에 두려고 하였으나 황신(黃愼)의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아들 배상익(裵尙益)은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동료유생들이 인목대비의 폐위상소를 올리자고 했으나 불참했고,인조 때 판관(判官종5품)을 지냈다.대구파(달성파)에서는 배익신(裵益臣).배진명(裵晉明).배성유(裵聖兪)등이 있다.리나라의 배씨(裵氏)는 모두 태사공 지타의 후손이나 자손이 번성해짐에 따라 본관과 파(派)가 나뉘어져 분성파,성산파,달성파,흥해파,협계파,화순파,함흥파 등이 있으며 대동보를 부정하고 다르게 족보를 만든 파도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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