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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전씨(田氏)는 영광전씨(인구 560명),담양전씨(인구 128,007명).단양전씨(6,002명).교동전씨(156명).대명(1,701명).밀양(1,362).배천(843).순천(461).안주(175).연안전씨(시조-전가식,5,196명).영평(174).예산(377).옥구(698).온양(1,239).우봉(109).울진(523).의령(2,282).전주(2,373).정산(4,532).진원(688).진주(690).천안(10,417).추성(239).충주(336).태산(231).토산(475).파평(408).평택(800).하음전씨(시조-전균,조선조에 39명 과거급제자 배출,인구는1,035명).함양(770).해주전씨(416명)등 50본관에 지난 2000년 조사에서는 188,354명이었다.<담양전씨대종회>에서는 담양전씨 연원에 대해서 전득시의 선계(先系)에 대해 "임진보"서문에 전씨(田氏)는 중국 제나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했고,"갑자보"에는 제나라 종실의 후예라고 하였으며,담양전씨의 후손이면서 관향을 더러는 "연안,평택,남양 등으로 하는 후손도 있다"라고 하였다.전씨(田氏)는 나주전씨,연안전씨,평택전씨,남양전씨 등도 모두 전록생,전귀생,전조생 등 이른바 "삼은전선생"의 후손이라고 담양전씨 경진보(庚辰譜) 발문에 밝히고 있다.우리나라의 전씨(田氏) 유래에 대해서 <임진보> 서문에는 (田氏)는 중국 전국시대때 순(舜)임금의 후예인 전씨(田氏)가 세운 제(齊)나라가 있었는데 후제(後齊)의 왕자(王子)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한다.전씨의 본관은 문헌에 담양전씨.남양전씨.연안전씨.영광전씨.태산.교동.안주.진원.하음.정산.우봉.예산전씨 등을 비롯하여 15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이중 가장 연원이 오래 된것은 영광전씨(靈光田氏)라고 하며,영광전씨는 고려 개국공신 전종회(田宗會)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다음은 고려때 조산대부(朝散大夫:고려때 종4품 무관)로 신호위대장군(神虎衛 上將軍:개경의 경비와 국토방위를 담당한 경부의 핵심 주력부대로 병력은 7000명이며 신호위 중앙군 최고지휘관은 정3품 상장군)등을 지낸 전총문을 시조로 받드는 <태산전씨>이며,<교동전씨>는 고려 말엽 정용산원(散員:정8품)을 지낸 전성무를 시조로 받드는데 그의 딸이 조선개국공신이자 옥천부원군 유창(劉敞)에게 출가하였다.전씨(田氏)의 대종(大宗)인 담양전씨(潭陽田氏)는 1155년(고려 의종9)때 현량(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하는 제도)으로 천거되어 문과에 급제하고 후에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를 거쳐 좌복야(左僕射: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에 올라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진 전득시(田得時:시호 충원)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담양전씨 경진보(庚辰譜)서문에는 '담양'을 채읍(采邑)으로 받아 담양전씨의 관향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시조 전득시(田得時)는 효행도 지극했다고 하며 학문이 당대 제일이었다고 한다.전득시(田得時)의 아들인 전자존(田子存:시호 정안 靖安)은 진현관 직제학(直提學:정4품)을 거쳐,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겸 추밀원사(樞密院使:왕명의 출납과 숙위를 맡아본 추밀원의 종2품)를 역임하였으며 고양군(高陽君)에 봉해졌다.손자 전승윤(시호는 정절 貞節)은 삼중대광 수태위(三重大匡 守太尉:정1품 품계)로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판삼사사(判三司使:종1품의 재신이 겸하던 삼사의 으뜸 벼슬)에 올라 대를이어 명성을 떨쳤다.현존하는 전씨(田氏)는 담양전씨(潭陽田氏)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조 전득시의 선계는 계대(系代)와 사적이 소멸되어 자세히는 알 수 없다.전득시의 후손들은 6세손까지 독자로 내려오다가 7세손에 이르러 전녹생(田綠生:시호 문명 文明),전귀생(田貴生:시호 뇌은),전조생(田祖生:시호 문혜文惠) 3형제가 현달하여,담양전씨의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전녹생은 예문관 대제학(大提學:)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검찰총장)을 역임했으며 전귀생은 삼사좌윤(三司左尹:삼사의 종3품),밀직제학(密直提學:정3품)에 올라 유명하였고,찬성첨의부사(贊成僉議府司)를 지낸 경은(耕隱) 전조생은 삼형제를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유명한 삼은전선생(三隱田先生)이다.한편 <남양전씨>는 중국의 한림학사로 고려에 귀화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진 전풍(田豊)을 시조로 받들어 왔으며 고려 말엽에 전주가 직제학(直提學:고려때 예문관.보문각의 정4품)을 비롯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첨의정승(僉議政丞:1361년(공민왕11) 중서문하성이 도첨의부로 바뀌면서 첨의정승으로 됨, 문하시중이 고쳐진것으로 종1품)에 이르렀으나,고려가 망한후 일족이 충청남도 공주로 유배되었으며 그의 손자 전 흥(田興)이 조선왕조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남양전씨>의 중흥시조가 되었다.중흥시조 전흥(田興)은 원래 이방원의 하인이었다.비록 하인이지만 그는 남다른 두뇌와 용기등의 출중한 능력은 곧 주인의 눈에 들어,이방원은 그를 하인이 아닌 <심복참모>로 기용했다. 이방원이 <제1,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는데,전흥(田興)은 오른팔의 역할을 수행하여 공을 세웠으며 '왕자의 난'이 끝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그를 원종공신에 책록하였다.일부에서 물의가 있었지만 사헌부(司憲府) 심사결과 양민출신으로 밝혀져 태종이 그에게 전흥(田興)이란 성명을 내렸고 이것이 남양전씨(南陽田氏)의 시작이 되었다.그외 전씨(田氏)는 거의가 <담양전씨>에서 분적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며 계대와 사적의 실전으로 자세히는 알 수 없다.담양전씨(田氏)의 득관은 시조인 전득시(田得時:시호 충원공)가 고려 중엽에 담양군(潭陽君)으로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담양을 본관으로 삼았으며,주요 세거지는 기록에 의하면 초기에는 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살았고 8세손 전화 부터 충청남도 부여로 이주한 이래 홍성,청양,익산 등지에 분산하여 터를 잡았다고 하며,13세.14세손대에 일부가 김제,함남 북청,홍원 등지로 이주하였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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