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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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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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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500년의 왕손 도술가 전우치 일벌백계의 청백함형 전가생(田稼生)과 아우 전조생(田稠生) 같은날 과거에 급제남양전씨(南陽田氏) 시조인 전 주(田柱)의 본래 이름은 왕강(王康)이다.그는 고려 왕족인 순흥군 왕승(順興君:왕승 王昇)의 아들로 조선이 개국되면서 이른바 왕씨(王氏) 말살책에 따라 공주목(公州牧)의 관노가 되어 일신역(馹新驛)으로 유배되었다가 태조3년 4월 화를 당했다.왕강(王康)의 손자 전흥(田興)은 원래 이방원의 하인이었다.비록 하인이지만 그는 남다른 두뇌와 용기등의 출중한 능력은 곧 주인의 눈에 들어 이방원은 그를 하인이 아닌 <심복참모>로 기용했다. 이방원이 <제1,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는데 전흥(田興)은 오른팔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그를 원종공신에 책록하였다.일부에서 물의가 있었지만 사헌부(司憲府: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 잡던 관청.3사의 하나) 심사결과 양민출신으로 밝혀져 태종이 그에게 전 흥(田興)이란 성명을 내렸고 이것이 남양전씨(南陽田氏)의 시작이 되었다.남양전씨(南陽田氏)의 도시조 전풍(田豊)은 중국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문신중 뛰어난 학자로 한림원 등의 벼슬)였으나 옥책(玉冊:임금이나 왕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 그 덕을 칭송하는 글을 옥에 새긴 간책)을 잘못 쓴 죄로 동쪽으로 유배되어 고려에 들어와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고증 할 근거를 못찾다가 남양전씨 재경종친회(在京宗親會)에서 왕조실록(王朝實錄)과 국조방목(國祖榜目)등의 문헌을 참고하여 20여년간의 노력 끝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고려왕실의 근친은 모두 주살되고 벼슬이 높은 왕씨(王氏)의 먼친척은 유배당했으며 전국에 있는 모든 왕씨는 종모성(從母姓:어머니의 성을 따를것)하라는 태조의 어명에 따라 어머니 성(姓)을 많이 따랐다고 하며 뜻이 있는사람은 왕자(王字)가 들어간 글자인 전(田),옥(玉),전(全),김(金)등으로 개성(改姓)하였다. 남양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아쓰기위한 과거.대과)에 3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되었고 초시.복시.전시 3단계였음)에 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4명 등 9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남양전씨는1985년에는 3,007가구에 13,368명,2000년에는 1,456가구에 4,660명이었다. 남양(南陽)은 현재의 경기도 수원시(水原市)와 화성시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는 당항성(唐項城)이었다.서기 822년(헌덕왕 14)에 수성군(水城郡:수원)에 병합되었으나 829년(흥덕왕 4)에 당성진을 설치하면서 분리되었다.940년(고려 태조 23)에 군이 되었다가,1018년(현종 9)에 수주(水州:수원)의 관할 이었고 후에 인주(仁州:인천)의 영현이 되었었다.현재는 경기도 수원시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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