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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 멸망후 우리나라에 망명 서산(瑞山)에 정착1세조 정인경 지금의 서산(瑞山)지명 갖게 한 공로자선조때 대북파(大北派) 영수 정인홍서산정씨(瑞山鄭氏)는 송나라에서 원외랑(員外郞:고려때는 6부의 정6품)을 지낸 정신보(鄭臣保)를 원조로 하고 아들인 정인경을 1세조(시조)로 받든다.문헌에 의하면 원조 정신보는 원래 중국 절강(浙江:절강성의 북동으로 흘러 향주만으로 흐르는 강) 사람으로 증조부인 정응충(鄭應 )이 송나라에서 판장작감사(判將作 監事:장작감의 종3품)를 지냈고 할아버지인 정의(鄭儀)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고려때는 상서도성의 정2품)를 지냈으며 아버지인 정수거(鄭秀 )는 원외랑(員外郞:고려때는 정6품)을 지냈다.정신보(鄭臣保)는 송나라가 멸망하자 서기1237년봄,중국 절강으로부터 망명의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서산(瑞山)에 정착 세거하며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고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원조 정신보(鄭臣保)의 아들이 정인경(鄭仁卿,1241년~1305년,고려 고종, 원종, 충렬왕때 인물.양렬공)으로 아버지 정신보가 중국 절강성 금화부 포강현을 떠나와서 서산의 간월도에 도착한지 5년이 지난 1241년 8월 1세조인 양렬공 정인경이 간월도에서 태어나고 부친에게 어릴 때부터 성리학을 배우기 시작한다.1253년 13세 되던해 정원사(부석면 부석사)에 올라가 공부방을 정하고 성리학을 공부하였는데, 하루는 뒷산(도비산) 꼭대기에 올라 바다 멀리 바라보며 부친 정신보가 늘 그리워하던 옛 고향을 바라다보았다.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큰 바위에 새겼다.정인경은 고려 의종때 정중부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100년간의 무신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몽고와의 오랜 전쟁에서 뛰어난 외교적 능력을 활용하여 고려의 정치적 안정과 고려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며 고려사 열전에도 기록되어 있고,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그의 묘에서 발견된 그의 묘지석(墓誌石,사적과 행장을 기록한 묘지석)에서도 그에 대해 역사적으로 잘 기록되어 있다. 그 묘지석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데 고려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물로 인증받고 있다.그가 태어나던 때 고려는 최충헌 무신정권 100년의 말기에 해당된다.1213년 8월에 즉위한 고종시대에는 최충헌을 중심으로한 최씨 일당독재기였고 고려의 왕권은 크게 약화되어 최충헌과 그의 가문에서 4대에(최충헌, 최항, 최우, 최의) 걸쳐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당시 세계정세도 몽고가 크게 일어나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고려는 몽고의 팽창 정책에 의해 수십년 동안 영토 수호 전쟁을 하고 있었고 중국의 송(宋)나라는 남쪽으로 쫓겨가 남송(南宋)으로써 절강성의 항주에 임안이란 이름의 도읍을 정했을때다.정인경과 원나라의 고려복속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한직으로 밀려나 있던 1274년 충렬왕 즉위부터 1278년까지 4년동안 고려는 정치,경제,외교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1274년 10월부터 시작된 려몽 연합군의 일본 정벌이 여러 번 실패가 거듭되자 고려의 백성들은 전쟁준비와 이로 인해 생활이 매우 피폐해졌다. 또한 고려 조정은 몽고의 계속되는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 300척 요구 등 무리한 요구로 국고가 탕진되고 조정은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었다. 또한 원나라의 무리한 공물.공녀 요구 등으로 정치적,외교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조정은 정치적으로 혼란하여 1278년 2월, 첨의중찬(僉議中贊:직제개편전의 종1품 문하시중)김방경이 대장군(大將軍:종3품) 위득유,중랑장(中郞將:정5품) 노진의 등으로부터 모반혐의를 받아 친원세력의 중심이던 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 홍다구가 김방경을 체포 고문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김방경은 대청도에 유배된다.이런 정치.외교적 어려움을 겪던 충렬왕은 1278년 38세의 정인경을 다시 고려 조정으로 복귀시켜 정치 외교적 어려움을 해결토록 요청하며 2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문산계 관작)를 제수하고 左右衛(좌우위) 精勇將軍(정용장군)으로 재기용된다.이에 정인경은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 일선에 나서게 하고 1279년, 원나라에 가서 홍다구가 고려 조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요청하고 홍다구를 원나라로 소환토록 조치하였다.1279년 12월 39세 때 전법총랑(典法摠郞:정4품 법무차관)에 임명되어 고려 조정의 법제 행정을 정비하고 원나라와의 불리한 외교 조약들을 조정하게 된다. 이어 1280년 7월, 40세에 판도총랑(版圖摠郞:정4품 차관)에 제수된다.1281년 3월, 고려군의 도원수 김방경과 여몽연합군은 2차 일본 정벌에 나서는데 5월 합포(마산) 출발, 6월 대마도 정벌, 7월 일본 하까다를 치고 대승을 거두었으나 8월에 태풍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철군하였다.그해 3월, 41세의 정인경은 국와의 경호를 담당하는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일본정벌때 경주 후방에 총지휘부를 만들어 머물던 충렬왕을 보위하게된다. 이때 경주에 와서 충렬왕에게 법문과 강론을 하던 승려 일연을 다시 재회하게 된다. 이로인해 정인경은 충렬왕과 대선사 ‘승 일연(김견명)’의 대면속에서 고려 국권회복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1282년 12월 42세때 궁성의 수비대인 감문위(監門衛)의 섭대장군(攝大將軍:종3품)이 된다.정인경은 나이 47세에 고려 군사의 모든 요직을 두루 거쳐,고려 군권의 실질적 총수인 鷹揚軍(응양군) 상장군(上將軍:정3품)겸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임명되어 실질적으로 고려군의 군권(軍權)을 총괄 지휘하게 되고 고려 최고의 실권자가 된다.그해 1287년, 47세의 정인경이 고려 최고 실권자이던 시기에 사돈관계에 있던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저술되어 충렬왕에게 올려지고 고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1287년 1등공신으로 녹권을 받아 노비 200명, 전답 200 두락을 하사 받고,본관을 서산으로 제수 받았으며 軍簿判書春宮翊衛判典 瑞山君(군부판서춘궁익위판전 서산군)의 봉작(封爵)을 받게 되어 지금의 서산(瑞山)이란 지명을 갖게한 공로자였다.사실상 서산정씨의 시조로 받들고 있는 정인경(鄭仁卿)은 1254년(고려 고종 41년)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충렬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머물때 호종(扈從:왕가를 모시고 따르던 일)했다고 하며 대장군(大將軍종3품)을 역임하고 상장군(上將軍:정3품)에 올랐다.이어 서경유수(西京留守:종2품~정2품 지방장관)를 지내고 1299년(충렬왕 25)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 재신이 겸하던 삼사(三司)의 으뜸)가 되어 정조사(正朝使:정월 초하룻날 새해 축하사신)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정2품 부총리)를 거쳐 중찬(中贊:종1품 최고관직으로 1275년(충렬왕1)첨의부를 두면서 문하시중을 첨의중찬으로 바꾸어 좌.우 각 1명을 둠,1308년에 정승으로 고침)에 이르러 명성을 떨쳤다.서기1274년(원종15)에 2등공신(二等功臣)에 오르고 고향인 부성현(富城縣)이 서주군(瑞州郡)으로 승격되었다. 후손들은 시조의 정착세거지인 서산(瑞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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