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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노씨(交河盧氏)는 도시조 노수(盧穗)의 둘째 아들 노오(盧塢)가 교하백(交河伯)에 봉해졌으므로 본관을 교하(交河)로 하였다.문헌에 의하면 노오(盧塢)의 후손 노강필이 기계(杞溪)에 정착하여 살면서 학문이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들날림)하여 이름을 떨치자, 본관을 장산(章山)으로 이관 하였으나, 고려 충선왕의 이름이 장(璋)이어서 이를 피하여 경산으로 하였다고 한다.그는 고려 태조왕건를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우고 통합삼한개국공신(統合三韓開國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고려시대 관원들의 신분과 공적 질서 체계였던 문산계의 하나로 문산계 29계 중 제3계로 종2품 품계)에 올랐으며, 뒤에 태자태사(太子太師:정1품)에 이르렀다.노강필은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선성은 교하의 옛 지명이기에 그 당시 지명으로 봉군 한것임)에 봉해졌으며, 관향을 다시 교하(交河)로 복관하였다.노강필의 시호(諡號)는 삼한(三韓)이다. 후손들은 선조 노강필의 봉군지인 교하를 본관으로 하고, 노강필(盧康弼)을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노강필(盧康弼)은 태조 왕건과 동년배로 개국공신으로 태자태사(정1품)의 작위(爵位)를 받았으며,개성 신흥사 공신당(功臣堂)에 삼한공신 54인을 도화하여 모신 공신(삼한벽상공신)중 일인으로 고려대전에 개국공신으로 위패 봉안했다.노강필의 10세손으로 첨의정승(僉議政丞:원나라의 간섭으로 설치된 첨의부의 종1품 정승)을 지낸 강평공(康平公) 노척이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노제(盧濟)는 서원군(瑞原君:서원:파주),노진(盧 )은 창성군(昌城君:공양왕 왕비 순비의 아버지),노은(盧 )은 경원군(慶原君),노영(盧渶)은 신양군(新陽君)에 봉군되어 4파(派)를 이루고 있다. 이들 4형제는 고려때 높은 벼슬에 올랐고,그 후손들도 조선시대에 현달(顯達:입신출세)하여 명문(名門)의 가통을 이었다.문하시중 노영순의 후손인 노지유(盧智儒)는 4군파와 같은 시대에 홍건적의 난에 무공을 세워 신창군(新昌君:아산시 신창읍)에 봉군되어 분관하여 후손들이 신창노씨(新昌盧氏)로 계승하고 있다.교하노씨 노척일가는 려말선초의 격랑을 살아낸 전형적인 가문이다. 충목왕(1344~1348) 때 좌정승(종1품재상)을 지낸 노척은 아버지가 이부상서(정3품장관,조선때는 정2품 이조판서)를 지내기도 했지만, 왕실의 평양공 왕현의 딸 경녕옹주와 결혼하면서 크게 현달할 수 있었다.그리고 공민왕때는 딸을 원나라 황제에게 주고서 집현전 학사라는 원나라 관직을 얻는 등 친원(親元)노선의 핵심인사로 떠오른다. 그러나 기철 권겸 등과 함께 공민왕을 축출하려는 반역을 도모하다가 사형을 당하고 만다.그에게는 노제(盧濟).노진.노은.노영(盧瑛) 네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 책봉될 만큼 당대 최고 실력자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누리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반역자의 아들로 전락했다. '서원군' 노제는 아버지가 죽자 얼마 후 저잣거리에서 참수(斬首)를 당했다.그러나 둘째 '창성군' 노진은 먼 곳으로 귀양을 갔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복권돼 밀직사판사(정령을 출납하던 밀직사의 2품)에까지 오른다. '경원군' 노은은 북원(北元)에서 병부상서(정3품국방장관)에까지 올랐지만,사신이 되어 고려를 찾았다가 공민왕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노영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이렇다 할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노척의 네 아들 중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둘째 노진이다. 밀직사는 조선시대의 승정원과 중추부를 겸한 핵심기관이며 그곳의 최고책임자인 판사(判事:2품)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로 인한 반역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그만큼 노진은 능력이나 인품 어느 하나 혹은 둘 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노진에게는 아버지 못지않게 화(禍)를 가져다 줄 아들이 있었다. 노진에게는 노정(盧楨),노선(盧瑄),노균(盧鈞) 세 아들이 있었는데,그 중 둘째인 노선이 화태(禍胎)였다.말년의 공민왕은 미쳐가면서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들을 선발해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했다. 자제위 소속 청년들은 "음탕하고 추악한 짓으로 왕의 총애를 얻었다." 여기에 '얼굴이 아름다운' 노선이 홍륜.한안.권진.홍관 등과 더불어 선발됐다. 이들은 하나같이 권문세가의 자식들이었다.홍륜의 아버지 홍사우는 전라도 방어의 책임자였고, 한안의 아버지 한방신은 찬성사(정2품부총리), 권진의 아버지 권용은 밀직부사(정3품), 홍관의 아버지 홍사보는 각문 판사였다. 그들은 공민왕의 성(性)노리개이면서도 언제든지 비빈(妃嬪)들과 간통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결국 홍륜과 관계를 가진 익비(益妃)가 임신을 하자,공민왕은 자제위 청년들을 제거해 익비의 아이를 자기 아들로 만들려 했다.이 음모는 내시 최만생을 통해 홍륜등에게 전달됐고,홍륜 등 '자제위 5인방'은 공민왕 23년(1374) 9월 최만생을 앞세워 국왕을 시해(弑害)했다.아버지의 반역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노진은 결국,아들 노선의 공민왕시해로 말미암아 다른 두 아들 노정,노균과 함께 먼저 사형당한 노선의 뒤를 따라 처형당했다. 멸족(滅族)의 화를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명예도 좀 더 일찍 회복된다. 그의 사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양왕(恭讓王)이다. 그로 인해 딸은 순비(順妃)에 봉해졌고 노진도 '제효공(齊孝公)에 추증될 수 있었다.나아가 노진의 한(恨)은 막내 노균의 유복자(遺腹子) 노한(1376~1443)이 풀어주게 된다. 결혼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민제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이방원의 아랫동서가 된다. 조선 건국과 더불어 음보(蔭補)로 관직에 진출해 관찰사(종2품감사), 판서(정2품장관) 등을 두루 거친 후에 세종 때 우의정(정1품정승)에까지 오르게 된다. 노진의 한풀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노한의 아들 노물재(盧物載)는 심온의 딸과 결혼했는데, 윗 동서 충녕대군이 왕위(세종)에 오르는 바람에 아버지 아들 2대가 나란히 국왕의 아랫동서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노물재에게는 노회신(盧懷愼).노유신(盧由愼).노사신(盧思愼).노호신(盧好愼) 네 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노사신(1427~1498)은 훗날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된다.2009년 4월 15일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가 조선시대 것으로는 두 번째의 벽화묘(壁畵墓)를 발견했다고 하는 보도가 있었다. 그 벽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노물재의 장남 노회신(1415~1456)이었다. 노회신 집안의 이런 배경이 조선시대에 그런 화려한 묘를 쓸 수 있었던 이유도 분명해진다.<자료참고>조선시대 벽화묘가 강원도 원주에서 2009년 발견됐다. 2000년 9월 경남 밀양 고법리의 박익(朴翊)묘 이후 조선시대 벽화묘로는 두 번째다. 이 노회신 벽화묘는 1462년(세조2)에 조성된것이다.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소장 연웅)는 2009년 교하노씨(交河盧氏) 문중이 원주시 동화리의 충정공(忠正公) 노회신(盧懷愼.1415~1456) 묘를 충남 청양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석실 안에서 벽화를 발견했다는 제보를 받고 긴급 현장조사를 벌였다. 이 묘는 1456년(세조 2)에 조성된 조선 초기 무덤으로, 방형 봉분(方形封墳) 내에 앞트기식 돌방(횡구식석실.橫口式石室) 두 개를 잇대어 배치한 구조를 하고 있다. 벽화는 화강암제 대형 판석을 이용한 석실 내부 벽면과 천장에 먹과 붉은색 안료 등을 이용해 그렸으며 사신도(四神圖)와 인물도(人物圖), 성좌도(星座圖)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묘주가 안치된 북쪽 석실과 매장 흔적이 없는 남쪽 석실의 벽화는 구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 원인을 연구소는 "묘를 만들 당시 두 석실 천장에 성좌도를, 그리고 네 벽면에는 사신도를 미리 그려 넣었다가 나중에 묘 주인을 매장할 때 북쪽 석실 벽면 하단에만 12구에 이르는 인물상을 추가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인물상은 벽면에 직접 묵선(墨線)으로 그린 인물 윤곽이나 손에 쥔 홀(笏), 머리에 쓴 책(쓰개 일종)과 얼굴 채색(彩色) 등이 1352년 조성된 파주 서곡리(瑞谷里) 고려시대 벽화묘와 유사한 점으로 미뤄 "아마도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그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고 연구소 측은 밝혔다. 이번 노회신 묘 벽화가 발견됨으로써 삼국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사신도가 조선시대까지 계승된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또 남쪽 석실 벽면에 그린 백호(白虎)는 다소 익살스런 표정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민화에 나타나는 호랑이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주목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연구소는 조선시대 전기의 회화사, 복식사, 민속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이 벽화묘를 정밀 발굴조사하고 아울러 보존처리를 병행할 계획이다.후대로 내려가면서 노씨 후손들은 벼슬 및 연고(緣故)를 따라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서원군(瑞原君) 노제(盧濟)의 후손들은 주로 경기도 화성, 양평, 양주, 강원도 홍천 등지에 살고 있으며, 그의 7세손 노정직(盧廷直)은 경남 창원으로 낙향한 후 그 후손들은 마산, 의창, 밀양 등지에 살고 있다. 창성군(昌城君) 노진(盧 )의 후손들은 경기, 충청, 강원, 전라, 경상도 등 여러 곳에 살고 있으며, 창성군의 현손(玄孫고손자)인 노윤보(盧允寶)는 고려때 낭장(?將:무관의 정6품)으로 고려조의 문신(文臣)이며 석학(碩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본향인 충남의 한산이씨가문(韓山李氏家門)에 장가를 들어 그 인연으로 한산에 낙향하였다 그 후손들은 주로 충남 서천 등지에 세거한다. 충남 부여에는 문광공(文匡公) 노사신(盧思愼)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문광공 노사신의 7세손 노세해(盧世海)는 부여에서,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룡동으로 옮겨 살았다.경원군(慶原君) 노은(盧 )의 큰 아들 노향(盧珦)의 후손들은 평양으로 낙향하였으며, 둘째 아들 노전의 증손 노유근(盧有謹)은 학문이 높고 무예에도 뛰어난 선비였다.조선시대에 세조가 수양대군시절에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노유근(盧有謹)의 외척되는 김종서(金宗瑞)와 진외척(陳外戚)이 되는 황보인(皇甫仁)을 죽이므로 이들과 인척관계가 있는 노유근의 아버지 노식(盧湜)은 목숨만은 보전하게 되었다.그 후 노식(盧湜)은 결성현감(結城縣監:종6품)으로 왔으나, 항상 불안하고 언제 피화(被禍)가 있을지 몰라 미리 짐작하고 노식(盧湜)의 아들 노유근(盧有謹)은 가산(嘉山)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노유근(盧有謹)의 후손들은 현재 청주.당진.충주.괴산.보은,공주에 많이 살고 있다. 또한 교하노씨로 일파를 이루고 있는 노승서(盧承緖)는 고려조 때 민부전서(民部典書:정3품 장관)를 지냈으며 또 다른 일파인 노 이는 고려조 때 재신(宰臣)이었다.후손들은 고려.조선조에서 정승.판서 등이 많이 배출되어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이 높아 이름을 세상에 들날림.입신출세)하였으며, 1세조를 비롯 선대의 묘와 유적들이 모두 북쪽 개성에 있기에 교하노씨는 1979년 사우(祠宇:따로 세운 사당)를 지어 삼한공(三韓公) 노강필(盧康弼)을 비롯한 선대 16위를 봉안(奉安)하고 향사(享祀:제사)를 봉행하고 있다.한편 한국의 제13대 대통령 노태우도 교하노씨가 배출한 인물이다.교하는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이다. 1687년(숙종 13)에는 파주군이었으며,1731년(영조7)에 파주군에서 분리되어 교하군으로 승격하였다가, 1914년 파주군에 폐합되었다. 교하는 선성(宣城), 원정(原井)등의 별호가 있었다.교하노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문관을 뽑아쓰던 과거로 시험은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었음) 과거에 12명, 무과(武科:무관을 뽑아쓰던 과거 시험은 무예와 병서로 3년마다 실시되었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14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46명 등 72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교하노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총 16,561가구에 53,203명이었다.안강노씨(安康盧氏,경주노씨)안강노씨는 도시조 노수(盧穗)의 여섯 째 아들 노곤(盧坤)이 고려시대에 벼슬을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안강백(安康伯)에 봉해져 후손들이 안강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그러나 선대의 계보가 실전되어 노곤의 후손으로 조선조에서 첨정(僉正:정3품)을 지낸 노종선(盧從善)과 목사(牧使:정3품수령)를 지낸 노희선을 각각 1세조로 받들고 있다.노종선(盧從善)의 아들 노소종(盧紹宗)과 노계종(盧繼宗) 형제가 사직(司直)을 역임했고, 교수(敎授) 노희식(盧希軾)의 손자 노경임(盧景任)은 선조 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여 여러 내외직(內外職)을 역임한 후 예조정랑(禮曹正郞:정5품)이 되었다. 한편 부장(部將) 노희철(盧希轍)의 아들 노보세(盧輔世)는 동래부사(東來府使:정3품수령)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노상건(盧尙健)은 부정(副正:각 관아의 종3품)을 역임하여, 현감(縣監:종6품수령)을 지낸 노경엽(盧慶燁),부사(府使:외관직 정3품) 노협(盧協)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안강노씨는 조선후기 경북 구미 출신의 무신(武臣) 노상추가 있다.노상추(盧尙樞:1746~1829,호 서산와(西山窩),자 용겸用謙)는 1780년(정조4) 무과에 급제하고, 1784년 선전관(宣傳官:선전청의 9품에서 3품)에 제수되었다. 1787년 진동만호(鎭東萬戶:종4품)를 역임하였으며, 1793년에 삭주부사(府使:3품수령)에 임명되었다.서기 1800년 홍주영장(洪州營將:각 진영의 으뜸벼슬)을 거쳐,1805년(순조5) 강화중군(中軍:총융청 등에서는 종2품,각 군영에서 대장을 보좌하며 실질적인 실무 총괄함),1811년에는 가덕첨사(加德僉使:첨절제사로 4품)에 제수되었다. 1825년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품계)에 오르고, 중추부동지사(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2품)에 제수되었다. 68년에 걸쳐 기록한 일기가 전한다.<노상추일기>는 조선후기 선산지역에 살았던 노상추의 관직 생활 일기이다. 이 저서는 18세기와 19세기에 걸친 노상추의 무관직 생활을 통하여 이제까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웠던 조선후기 무관직과 관련한 다양한 제도, 생활상 등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노상추는 서기1851년(철종 2) 병조참판(兵曹參判:종2품 국방차관)에 추증되었다.10년 과거준비에 내 500냥 다써,공명(功名)이라는 게 참 가소롭다노상추(盧尙樞·1746~1829)는 조선후기 삭주부사(정3품수령) 등 중급 관직을 지낸 무관이다. 역사학자들이 그를 주목하는 이유는 중요한 사건에 관련됐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라, 17세부터 시작해서 여든네살에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까지 남긴 일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을 지낸 문숙자 박사는 노상추일기를 토대로 조선후기 무반(武班) 집안과 촌락의 일상, 사회적 네트워크를 생생하게 복원한 <68년의 나날들,조선의 일상사,너머북스>를 2009년에 펴냈다.노상추가 일기를 시작한 지 60년이 지난 1822년, 그는 "아버지의 명을 따라 일기를 쓰게 됐다"고 기록했다. 열일곱이던 1762년, 아버지 노철(盧哲)이 큰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일에 흥미를 잃고 둘째였던 노상추에게 일기 쓰기를 물려준 것이다. 노씨 집안의 일기는 개인의 일상과 느낌을 적은 사적(私的) 기록이 아니라 가족의 대소사를 기록하는 가계(家系) 기록이었다.노상추는 혼인을 세 번 했다. 첫번째 아내는 아들을 낳고 한 달 이상을 앓다가 죽었는데, 22세였다. 두 번째 아내도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 노상추의 어머니도 40대에 딸을 낳다가 세상을 떴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양반 집안에서도 이처럼 여성이 출산 때문에 사망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므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하층민 여성들은 더 위기에 내몰렸을 것이다. 노상추의 일기에는 12명의 자녀가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지만 족보에 오른 것은 4명뿐이다. 가족 구성원의 3분의 2가 어릴 때 죽거나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흔적 없는 삶을 살아간 것이다.노상추는 아내가 죽었을 때는 일기를 몇 달간 띄엄띄엄 거르기도 했고, 일기 대신 월기(月記) 형식으로 쓴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둔 두 달 동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문병 온 지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쓸 만큼 치열한 기록정신을 보였다. 국사편찬위원회는 2006년 <노상추일기>를 4권으로 간행했다.안강은 경상북도 경주시 북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1949년 강동면 일부를 병합하여 안강읍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경주읍이 시(市)로 승격되어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이 되었다.2000년 인구조사에서 안강노씨는 총 82가구에 280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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