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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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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종직(丘從直) 평해구씨 가문 반석위에 올려세종대왕에 의해 하루아침에 9품에서 5품으로우리나라 평해구씨(平海丘氏)의 시조는 구대림(丘大林)이다.시조 구대림은 당나라 사람으로 서기 663년 (신라 문무왕3,당고종 3)에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도시조(都始祖)인 황락 장군과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울진) 월송정 근처에서 표류하다가 구미포(丘尾浦:기성면 구산리)에 표착했다.구대림은 월송정에 상륙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하였으며,해안의 남쪽 미포(美浦)에 정착하게 되었는데,그가 정착한 지역을 구미진(丘尾津)이라고 한다.구대림 장군은 이곳에 정착했으며 황락 장군과 함께 백암산성을 축조 했다고 전해지고있다. 매년 음력 3월15일이면 전국에서 후손들이 기성면 황보리 산 36-2번지 시조 구대림 묘를 찾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 묘는 한때 실전 하였다가 황보리에 살던 황노인에 의해 찾게되어 새롭게 단장하였다고 하며 구대림장군의 애마였던 말무덤도 묘소앞에있다고 한다. <다른 문헌에는 구대림(丘大林)이 서기 663년(당나라)에 일본으로 가는 도중이라고 하였으나 황씨(黃氏)의 기록은 황락(黃洛)과 구대림이 서기 28년(중국 후한)에 교지국(베트남 하노이의 옛지명)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함>시조 구대림은 고구려때 벼슬이 상서좌복야(尙書 左僕射고려때 좌복야 벼슬은 상서도성의 정2품 부총리)에 올랐으나,이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대대로이어온 사적이나 묘지를 알수없게됨)되어 고려 공민왕때 민부전서(民部典書:정3품 장관)를 지낸 구선혁(丘宣赫)을 1세조로 받들고,평해(平海)를 본관으로 하여 계세(系世)하고 있다.구씨(丘氏)의 유래는 세계구씨 대시조(世界丘氏 大始祖)인 구목(丘穆)공으로부터 출발한 매우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성씨(姓氏)이다.구목(丘穆)공은 고대 중국 제(齊)나라때 기원전 1211년부터 1072년까지 139년간 장수한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推仰) 받는 강태공(姜太公)의 셋째 아들이다.그는 제(齊)나라의 군사(軍事)및 정치(政治)의 최고 책임자로 강태공(姜太公)을 도와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하며,산동성 창락현에 위치한 제나라의 수도인 영구(營丘)의 구(丘)자로 성씨를 삼고일가를 창설(創設)하여 세계각국의 구씨 종친(丘氏宗親)들이 구목(丘穆)공을 세계구씨 대시조(世界丘氏 大始祖)로 모시고 있다.그러나 <조선씨족통보>에는 하남성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하며, 제태공(齊太公)이 봉(封)해진 땅 이름인 영구의 구(丘) 자(字)를 후손들이 성(姓)으로 삼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그후 600 여년간 세계(世系)를 잃게 되자 고려 공민왕때 이방실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신에 책훈되고,민부전서(民部典書6부의 하나인 민부에 속한 정3품 장관)에 오른 구선혁(丘宣赫)을 1세조로 받들고 관향을 평해(平海)로 삼아 계대(系代)하여 왔다.평해구씨(平海丘氏)는 구선혁의 아들 구천우가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 전의 판도사의 으뜸 3품 장관)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였는데 큰 아들 구춘호는 사재지사(司宰知使:대궐에서 쓰던 생선,고기,소금,술 등을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를 지냈으며, 둘째 구춘경은 판사(判事고려때 3품 이상의 벼슬)에 올라 명성을 떨쳤고,셋째 구춘서와 막내 구춘보는 낭장(?將:고려때 무관의 정6품 중랑장의 아래,별장의 위)을 지냈으며,이들의 후손에서 가문이 크게 중흥하였다.특히 전서공(典書公) 구선혁의 현손(顯孫:고손자)인 구종직(丘從直)은 평해구씨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인물이다.그는 서기 1444년(세종26)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정기적으로 문관을 등용하기 위한 과거시험인 식년문과는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시험 거쳐 33명 급제자로 선발하는 제도로 문치시대 최고권위의 과거시험)에 급제하고,등준시(登俊試:재상이하의 문관을 시험하던 과거)에도 급제한 그는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주역과 경학에 정통하였다고 하며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소속의 종1품)에 이르렀다.그에 대한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성종때 명신편(名臣編)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과거에 올라 교서관(校書館)에 입직하다가 경복궁 서쪽 강녕전(康寧殿) 연못 가운데 있는 경회루의 경치가 절승(絶勝)하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연못가를 구경하던 중에 남여(籃輿:뚜껑이 없는 작은 승교)를 타고 산책나온 세종대왕과 마주쳤다.그가 황공하여 길 아래에 엎드리자 왕은 그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經典)을 외울 수 있느냐” 하자 "춘추(春秋)를 외우겠습니다“하고 외웠다. 왕은 크게 감탄하여 술을 내려 주고서 이튿날 부교리(副校理:홍문관의 종5품으로 1470년 성종1년에 설치했으며 경서와 사서를 편찬,검토하였고 춘추관의 기주관과 지제교를 겸하기도 함)에 임명하였다.하루 아침에 9품직에서 5품직으로 임명되자,3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번갈아 글을 올려 극력으로 반대하여 왕은 편전에 나가서, 삼사(三司)관원들을 모두 불러 놓고 춘추(春秋)를 외우게 하니 한 사람도 능히 한 구절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는 구종직을 시켜 외우게 하자, 1권을 다 외우고 또 다른 질(帙)에서 뽑아 외우게 하니 외우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한 구절도 외우지 못하면서 청직(淸職:청관의 직)에 올라 있는데 구종직(丘從直)과 같은 사람은 어찌 부교리(副校理:홍문관의 종5품)에 해단하지 못하느냐”고 하였다고 한다.그의 아들 구달손(丘達孫)과 구숙손(丘夙孫)형제도 과거에 급제하고,직제학(直提學:집현전의 종3품)과 이조정랑(吏曹正郞:정5품 전랑으로 3사의 문신 추천권이 있음)을 각각 역임하였다.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에는 청덕사(淸德祠)가 있다.이곳은 조선 전기의 문신 구종직(丘從直:1404~1477)을 배향한 사당이다. 구종직은 본관이 평해(平海)로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한 뒤 공조판서(정2품 장관)등을 거쳐 성종 때 좌찬성(左贊成:의정부 종1품 재신)에 이르렀다.그는 역학(易學)과 경학(經學)에 밝은 학자로도 명성이 높았다. 구종직의 후손인 구맹전(丘孟傳)이 중종 때 사화(士禍)를 피하여 서천군 무산면 은곡리로 낙향하면서 이곳은 평해구씨의 집성촌을 이루었다. 후손들이 일제강점기에 이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구종직 외에 평해구씨 시조를 위시한 선대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익공식 맞배지붕 구조이며, 사당 바로 밑에 익공 계통의 경현재가 있다.청덕사는 2010년 9월 중 도지정문화재로 예고 되어있다.1464년(세조9) 춘시문과(春試文科)에 급제한 구치곤(丘致崑)은 첨절제사(僉節制使:종3품 무관으로 진영이나 거진에 둠) 구차숭(丘次崇)의 아들로, 집의(執義: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종3품으로 현재의 대검찰청 차장)를 거쳐 성종때 강릉부사(江陵府使:정3품)와 충주목사(忠州牧使:정3품)에 이어,이조참의(吏曹參議:정3품차관보)로 인재등용에 관한 부조리를 진언하고,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거쳐,한성좌윤(漢城佐尹:종2품 서울부시장)을 지냈으며,구치곤(丘致崑)은 어전에서 왕(王) 지켜야 할 도리를 서슴없이 진언했던 절신으로 유명하다.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가학골 뒷산에는 구치곤.구차숭 묘와 평해구씨 묘역(丘致崑丘次崇墓-平海丘氏墓域)이 있다.묘역에는 모두 4기의 무덤이 있는데 구치곤의 무덤을 중심으로 오른쪽 아래로 구차숭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 1기가 있고 위쪽으로 올라가면 무덤 2기가 차례로 나타난다.구치곤의 무덤은 묘역의 중심에 위치하며 무덤에는 묘표,상석(床石),장명등(長明燈),문인석(文人石)등의 석물이 있는데 묘표는 1990년에 세웠다. 구차숭의 무덤은 구치곤의 무덤 아래에 서북 방향을 등지고 있다.무덤에는 묘표,문인석(文人石), 상석(床石) 등 옛석물이 있다.그의 아우 구치강(丘致崗)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정6품전랑)을 거쳐 예조 참의(禮曹參議:정3품차관보)에 올랐다. 한편 구치강(丘致崗)의 아들 구영안(丘永安)은 선술(仙術)의 도인(道人)으로 예종때 생원시(生員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과 공리에 뜻을 두지 않았고,구복남(丘福男)은 임진왜란 때 남원성(南原城)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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