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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 개혁사상의 핵심은 대중의 의사에 따라 "천자(天子)를 교체할 수 있음"였다.정씨(丁氏)는,나주정씨(82,863명).압해정씨(3,335명).곡성정씨(9,620).달성정씨(2,778명).무안정씨(2,248명).영광정씨(21,774명).영산정씨(964명).영성정씨(10,429명).의성정씨(2,951명).장성정씨(1,056명).진주정씨(24,598명).창녕정씨(1,536명).창원정씨(16,141명).파주정씨(958명).한일정씨(481명).해주정씨(5,381명)등22본관에 187,975명이었다.우리나라 정씨(丁氏)는 압해정씨.나주정씨.창원정씨.영광정씨.의성정씨의 4본이 있으나 모두 도시조(都始祖)인 정덕성(丁德盛)의 후손이라고 한다.정덕성(丁德盛)은 당나라 사람으로 당나라 문종(文宗)때 대승상(大丞相)을 지내고 무종(武宗)때 대양군(大陽君)에 봉해졌는데 853년(당나라 선종 대중 7,신라 문성왕 15)군국사(軍國事)로 직간(直諫:바른말)을 하다가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되어 온것이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시초라고 한다.결국 압해(押海)는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발상지가 되며 정씨(丁氏)의 4본은 모두 같은 뿌리이며 나주정씨(羅州丁氏)가 전체 정씨(丁氏)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압해(押海)는 전남 무안군(務安郡)에 있던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아차산군(阿次山郡)이었다.정씨(丁氏)지난 2000년의 인구조사에서는 총22본관이었으나 나주정씨(압해정씨)의 세거지명이라고 한다. 나주정씨는 조선 숙종과 경종때 까지는 본관을 압해로 써오다가 조선 영조때 압해가 나주에 속하게 되자 본관을 나주정씨(羅州鄭氏)로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청구영언(靑丘氏譜)등 옛 문헌에는 정씨(丁氏)의 대조(大祖)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으로 나오는데 그는 당나라 사람으로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다가 당나라 선종7년(신라 문성왕15년)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로 귀양온 후 사면되었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였으며 그 자손들이 압해도에 세거하게 되어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나주정씨(羅州丁氏)는 조선 숙종과 경종 연간까지 관향을 압해정씨(押海丁氏)로 써오다가 영조때에 압해(押海)가 폐현되어 나주(羅州)에 부속하게 되자 관향이름도 나주(羅州)로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숙종때의 신사보(辛巳譜.順天譜)와 고종때의 경오보(庚午譜)에 나주압해정씨족보(羅州押海丁氏族譜)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나주정씨(羅州丁氏)에서 자랑하는 실학의 거두(巨頭)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시호 문도,자는 미용,귀농 이고 호는 삼미자(三眉子).자하도인.문암일인.다산)은 대표적인 인물이다.그는 서기1762년(영조38) 6월 16일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牧使:정3품)를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1587~1671)의 후손이며 조선조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이다.넷째 아들로 태어난 정약용은 아버지에게 경사(經史)를 배우고 일곱살 때 시(詩)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4세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주위에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7세때 지은 '산'이라는 시(詩)가 이를 입증한다."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아버지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분수에 밝으니 장차 크면 틀림없이 역법과 산수에 능통하게 될것이다."고 하였다. 15세에 풍산홍씨와 결혼하였고 16세에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의 저서를 접하고 실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다산은 22세 때인 1783년(정조 7)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고 경의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정조의 눈에 띄여 총애를 받았다.28세에 대과(大科:문과)에 급제한 정약용은 검열(檢閱:정9품)로 벼슬길에 나가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 우부승지(右副承旨:승정원의 정3품)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정조때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를 지내고 규장각의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뒤에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으로 1801년(순조 1)에 세번째로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였다.백서사건이란 크기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는데 모두 1만3천3백자에 달하는 장문(長文)으로 되어 있다.내용은 신유박해중 순교한 신부외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간의 골육 상잔의 당쟁이었음을 피력하고 조선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근 1백년동안 의금부 창고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돼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주교는 1925년 한국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정약용은 귀양지에서 울분의 세월을 '학문과 저술'로 불살랐고 서기1818년(순조18) 귀양에서 풀려나와 만년에는 고향에서 저술을 계속하여 학문의 체계를 완성했다.그의 학문체계의 핵심은 정치 경제사상의 핵심은 개혁사상이다. 다산은 당시 사회를 "털끝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로 진단하고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했다. 그의 개혁안을 담은 대표적인 저술이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인데 당시의 법질서를 초월한 국가기구 전반에 걸친 개혁의 청사진이고 목민심서는 법질서 안에서의 지방행정에 대한 개혁안이다.그의 개혁안은 제도개혁에 집중되는데 가장 주목할 만 한것은 여전제(閭田制)로의 토지제도 개혁안이다. 이는 마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생산물을 노동일수에 의하여 공동으로 분배하자는 것이 개혁안의 골자이다.특히 그는 훈고(訓誥) 사회정책(社會政策) 서학(西學) 국학(國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를 비롯하여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는 불후의 명저(名著)로 알려졌다.정약용은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민생을 위한 경세(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고 이얼(李蘖)에게 서학(西學)을 배웠다고 한다.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주문모(周文謨)사건에 연관되어 좌천되었고 신유박해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강진으로 유배되었으며 이때 학문적인 체계를 완성하고 5백여 권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그의 학문은 류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을 계승하여 유학의 정신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양명학적(陽明學的)인 요소도 있으면서 이이(李珥)의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실천윤리와 북학파(北學派)의 사상을 흡수하였고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집대성하였다. 다산은 1910년에 규장각 제학(提學:종1품 또는 종2품)에 추증되었다.정약용의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실학(實學)은 수기(修己)로 사회적 자아 실현인을 만드는 교육적 인간상을 표방하였으며 이는 재건주의자 '브라멜드'와 유사하다.그는 교육방법으로 지적공부보다는 사람 만들기를 더 중요시 하였으며 중화사대주의에서 탈피 주체성 있는 역사의식을 교육내용으로 삼았다.또한 다산은 "천자(天子)는 대중이 추대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대중의 의사에 따라서 천자를 교체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통치자가 백성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백성이 통치자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백성들의 필요에 의해 통치자를 선출했기 때문에 통치자는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나주정씨(羅州丁氏:압해정씨)옥당(玉堂)은 정씨의 세전물최초의 가사(歌辭) 작가 정극인(丁克仁)최고의 <어류학서>편찬,고등어의 회유를 밝힌 정약전과다산 정약용우리나라 정씨(丁氏)는 나주정씨.창원정씨.영광정씨.의성정씨의 4본이 있으나,모두 도시조(都始祖)인 정덕성(丁德盛)의 후손이다.정씨(丁氏)의 도시조 정덕성(丁德盛.대양군)은 당나라 사람으로 당나라 문종(文宗)때 대승상(大丞相)을 지내고 무종(武宗)때 대양군(大陽君)에 봉해졌는데,서기 853년(당나라 선종 대중7,신라 문성왕15) 직간(直諫:바른말)을 하다가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되어 정착해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시초라고 한다.대양군 정덕성(丁德盛)은 서기 800년,당나라 등주 남양(南陽) 대천리(大川里:중국 하남성 남양시 당하현 대하둔) 정영(丁營)마을에서 태어나 최연소의 나이로 진사과(進士科),명경과(明經科:장상(將相)의 재목을 뽑는 과거이며 조선.고려때는 명경과 합격자에게는 등과전(登科田)을 주어 과거 응시를 장려함)30명중 19번째로 급제하여, 태자궁 설서(說書:태자시강원의 정7품으로 태자에게 도의와 경서를 가르침)를 지냈다. 이후 회서(淮西) 오원제(吳元濟)의 반란을 태자궁 첨사(詹事:고려때는 동궁의 서무를 관장하던 종3품) 이 소와 더불어 평정한 공으로 현백(縣伯)의 작위와 식읍(食邑) 700호를 받아 승상(丞相:중국의 벼슬로 우리 의 정1품정승)에 이르렀다고 한다.당나라 선종때 국가의 중대사에 바른 말로 직언 상소한 것이 당시 조정의 노여움을 사서 서기 853년 찬류(竄流),아들 열도(烈道).응도(應道) 손자 필랑(必琅).필진(必珍)등 온 가족을 황하강에서 배에 싣고 황해바다를 건너 압해도에 도착,이곳에 정착하자 당시 신라 조정에서 신라 서울에 들어와 살기를 권하였으나, 본국의 죄인이라 자처하며 굳이 사양하였고, 중국에서도 입조(入朝) 권고의 칙서가 왔으나, "노약한 몸으로 배를 탈 수 없고 이 나라도 예의 바른 나라이니 이곳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소서"라며,우리나라에 정착했다.그는 893년 94세의 천수(天壽)를 누리고 생을 마쳐 압해도 정승동에 안장되었다.결국 압해(押海) 정승동은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발상지가 되며,정씨(丁氏)의 4본은 모두 같은 뿌리이고, 그 중에서 나주정씨(羅州丁氏)가 전체 정씨(丁氏)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나주정씨(羅州丁氏) 시조는 정윤종(丁允宗)이다.시조 정윤종은 고려시대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종3품 무관,검교는 벼슬앞에 붙이는 명예직으로 관원의 승진이 누적되어 관직만 줄때 검교를 붙임)을 지냈다.나주정씨 족보인 경오보(庚午譜) 서문에는 나주정씨(羅州鄭氏)는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종3품 명예직)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며 시조의 상계(上系)에 관한 언급은 없다.그런데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청구영언(靑丘氏譜) 등 옛 문헌에도 정씨(丁氏)의 대조(大祖)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으로 나오며 당나라 사람으로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다가, 당나라 선종7년(신라 문성왕15)에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로 귀양 온후 사면되었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그 자손들이 압해도에 세거하게 되어 우리나라 정씨(丁氏)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나주정씨(羅州丁氏)는 조선 숙종과 경종 연간까지 관향을 압해정씨(押海丁氏)로 써오다가 영조때 압해(押海)가 폐현되어,나주(羅州)에 부속하게 되자 관향도 나주(羅州)로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숙종때의 신사보(辛巳譜)와 고종때의 경오보(庚午譜)에 나주압해정씨족보(羅州押海丁氏族譜)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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