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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골제(碧骨提)평야에 김시중이 제방쌓아 김제(金提)지명 생겨김헌창과 매월당 김시습,조선조에 과거급제자 300여명강릉김씨(江陵金氏)는 신라 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6세손 김주원(金周元)을 시조로 받든다.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에 의하면,서기 785년(선덕왕6)에 선덕왕이 후손이 없이 죽자,신라 조정에서는 군신회의 끝에 시중(侍中:정승으로 신라때 집사성의 으뜸벼슬)이던 김주원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으나,경주(慶州)의 알천 북쪽 20리밖에 살던 김주원이 갑작스런 폭우에 알천을 건널 수 없어 입궐을 못하였다.이에 군신들은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며,인군(人君)자리는 잠시도 비울수 없다 하고,당시의 상대등(上大等)이었던 김경신(金敬信)을 신라 38대왕(王,원성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상대등(上大等)은 신라의 최고 관직으로 531년(법흥왕18) 이찬(伊飡) 철부(哲夫)를 상대등으로임명하여 국사(國事)를 총리하게 한 것이 시초이며 상대등은 신라 17관계(官階)를 초월하여 설정한 최고관직>비가 그친 후 임상(臨喪)차 단기(單騎)로 입궁(入宮)하자 이미 왕위에 오른 김경신(金敬信)이 김주원(金周元)에게 왕위(王位)에 오르기를 권(勸)하니 왕위에 오른 원성왕(元聖王)은 그에게 즉위할것을 권유 하였으나,김주원은 "인군대위(人君大位)는 천명(天命),즉 하늘의 뜻이 아니다"라며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명주(강릉)로 퇴거한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그로부터 2년후 원성왕은 왕위를 양보한 덕을 생각하여 김주원으로 하여금 명주(강릉)를 중심으로 강릉.울진.평해.삼척등 동해안 일대를 분할하여 다스리게하고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그 땅을 식읍(食邑:나라에서 공신 등에게 내리어 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으로 하사했다.출처-<동국여지승람>이때부터 명주도성을 중심으로 영동일대를 세습통치했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강릉김씨(江陵金氏)로 득관(得貫)하고 명문거족의 발상지가 되었다.명주군왕 묘는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285번지에 있으며 시도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다.그는 신라하대의 진골 귀족으로 그가 명주군왕으로 봉해졌기에 왕릉이라고 부른다.그는 그동안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의 5세손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무열왕의 셋째아들인 문왕의 5세손이라고 한다.묘역에는 사각형의 둘레돌을 두른 묘 2기가 앞뒤로 배치되어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가 있다.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동물석상이 한 쌍씩 세워져 있고, 동네 입구에는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학덕을 갖춘 선비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명주군왕 김주원은 3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김종기(金宗基)의 손자 김양(金陽)은 자손이 무후(無后)하고 둘째 김헌창(金憲昌)부자(父子)도 반란으로 무후(無后)하여,셋째인 김신(金身)이 유일한 <강릉김씨>로 증손 3형제에서 강릉김씨의 최초 분파가 되었다.김주원의 큰아들 김종기(金宗基)는 790년(원성왕6) 이찬(伊飡)에서 시중(侍中:종1품정승)에 이르렀다.그는 벽골제(碧骨提:현재의 김제)평야에 제방을 만들어 수리시설을 하고 농경정책에 기여하여 김씨(시중 김종기)가 제방을 쌓았다 하여 김제(金提)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참고:동사강목 문헌비고.삼국유사>강릉김씨는 김신(金身:헌충)의 자손들인데 김신(金身)은 서기 804년 한산군수(郡守:종4품),806년 대아찬에 올라 그해 8월 당나라 헌종(憲宗)즉위식에 축하사절로 입당하여 원외위위경(員外衛尉卿:고려때는 의장(儀仗)과 그에 따른 기물을 맡아본 관청인 위위시의 종3품)의 벼슬을 받고 807년에 파진찬(波珍 :파진찬은 신라 17관등 중 제4등급관위로 바다와 관련된 해양업무를 관장하는 벼슬),810년에 한산주도독 그후 이찬(장관)에 오르고 814년에 시중(侍中:종1품정승)에 명하였으나 받지 아니하고 명주로 퇴거하였다.한편,서기 780년 상대등(上大等:신라때 17관계를 초월하여 설정한 최고관직) 김양상(선덕왕)이 혜공왕을 살해함으로써 태종 무열왕 계통의 왕업은 단절되고,내물왕의 후손들이 실권을 잡게 되는데 이를 회복하려는 투쟁이 많았다. 822년 "김헌창의 난"이 대표적인 사례이다.김주원(金周元)의 둘째아들 김헌창은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통일신라시대의 지방장관으로 웅천은 공주)이던 서기 822년(헌덕왕14년) 공주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연호를 '경운'이라 하고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점령,무진.완산.청주(菁州:진주).사벌.4주의 도독과 서원.금관.국원 3소경의사신을 비롯 여러 군(郡).현(縣)의 수령을 위협하여 경상도 일대까지 제압했다.청주도독 향영(向榮)은 도망하여 퇴화군(堆火郡:밀양)으로 갔으며, 한산(漢山).우두(牛頭).삽량(葛良).패강(浿江).북원(北原) 등지에서는 수비에 임하였다.완산의 장사(長史) 최웅(崔雄)은 영충(令忠)의 도움으로 경주로 도망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서울을 수비하게 하고 장웅(張雄).위공(衛恭).제릉(悌凌)등에게 김헌창을 격퇴하게 하였다. 헌덕왕이 직접보낸 중앙군의 장웅은 도동현(道冬峴)에서 김헌창 군대를 격파하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과 합세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보은)을 공격한 뒤 속리산에서 김헌창의 군사를 격멸하였다.김균정(金均貞)이 성산(星山)에서 승리한 뒤 웅진성(공주)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웅진성에서 김헌창은 자결하고 반란이 진압된뒤 김헌창을 도운 친족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239명에 달했다고한다.그 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또다시 고달산적(高達山賊) 수신(壽神)등과 난을 일으켜 한산(漢山)에 입도(立都)하려고 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후로 무열왕 후손들은 왕위계승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김종기의 아들 김정여(金貞茹)와 김장여(金璋茹) 형제가 시중(侍中:종1품 정승)에 이르렀으며 손자 김양(金陽)은 김정여의 아들로 헌덕왕3년(826)에 고성태수(太守), 832년에는 공주도독으로 전임하였다.김양은 서기 838년(민애왕1년) 군사를 일으켜,희강왕과 그 해에 왕위에 오른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으로 추대,시중(侍中신라때 집사성(執事省)의 으뜸 벼슬)겸 병부령(兵部令:군사를 맡아보던 관청의 으뜸 벼슬)을 지냈다.김양은 나이 50세에 후사없이 죽어 태종무열왕릉 아래에 장사하였다.문중의 인물로 김순식(金順式)은 고려초에 명주장군(溟州將軍)으로 태조 왕건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왕건에게 협력해 후백제의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 공으로 대광(大匡:고려 때의 18품계 중 정2품 품계)에 오르고 왕씨(王氏)로 사성(賜姓) 받았으나 조선개국 후 왕씨(王氏)가 탄압을 받게되자 원래의 성인 김씨(金氏)로 환원하였다.시조의 9세손 김상기는 고려 예종때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를 지냈으며,그의 아들 김인존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정2품 부총리)에 이르렀으며 상주국(上柱國,:상주국은 최고의 훈호이며 정2품관에게 내림)으로 인종때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가 있을 때 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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