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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의태자 후손들 중국에 들어가 금나라 세워 신라부흥의 의지 대륙에서 풀어통천김씨(通川金氏,금양.통주)는 경순왕의 첫째아들인 마의태자 김일(金鎰)의 아들 김교(金較)를 시조로 받든다. 서기 1380년(고려 우왕 6)에 기록된 중랑장공외가호구입안(中郞將公外家戶口立案)을 근거로 1701년에 발간된 '통천김씨족보' 초간본에 통천김씨의 시조는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아들 통천군 교(較)로 밝히고 있다.시조 김교(金較)는 고려 광종때 나라에 공을 세우고 서기 944년(고려 혜종1)에 금양백(金壤伯,금양은 통천의 통일신라때 지명)에 봉해져 후손들이 관향을 통천으로 하게 되었는데,지명변천에 따라 서기1285년(충렬왕11)까지는 금양김씨(金壤金氏)로 서기1413년(태종13)까지는 통주김씨(通州金氏)로 그 이후 현재까지 통천김씨(通川金氏)로 관향해 왔다.서기935년(경순왕 9)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고려에 신라를 양국하기로 결정한다. 부왕(父王)인 경순왕이 쇠잔해진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에 양국하려 하자,첫째아들인 마의 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데 어찌하여 민심을 모아 싸우지도 않고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있느냐"며 반대한다.그러나 경순왕은 죄없는 백성을 더 이상 죽일수는 없다며 고려에 신라를 양국하고 말았다.그뒤 마의태자는 자신을 따르는 백관 및 백성들과 더불어 지금의 강원도 인제지역으로 들어가 항려(抗麗)운동을 전개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생을 마치게 된다.이같은 사실은 마의태자가 그동안 알려진 것처럼 산속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신라부흥운동을 했다는 것이다.실제로 인제군의 곳곳에서 마의 태자의 유적과 생생한 전설이 널려있다.고려에 신라를 양국한지 200년이 지난 뒤에도 각지에서 신라부흥운동이 끊이지 않았고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간것이 아니라 강원도 인제지역 이었던 것인데 일제 강점기때 독립운동의 맥을 끊기위한 일제의 문화침투의 일환이 마의태자를 금강산 입산으로 왜곡시켰고,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의 후예들이 그대로 역사에 기록한 것일 뿐이다.더욱 중요한 사실은 마의태자 김 일의 후손이 중국의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다.금나라 시조(始祖)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은 고려때부터 전해진 이야기이다.당연히 금나라는 우리의 역사로 편입되어야 하는 것이다.즉 마의태자 후손들은 중국에 들어가 금나라를 세워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신라부흥의 의지를 대륙으로 이어져 풀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강원도 인제 내설악의 한계산성은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의 의지로 쌓았다고 전해진다. 한계산성은해발700~1200m의 계곡을 감싸고 있고 전체 둘레는 1.8km이다. 남쪽에 성문을 축조하고 양쪽으로 성벽을 쌓은 구조이다.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을 꿈꾸며 이 성(城)을 축성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한다.통천김씨(通川金氏)는 시조 김교(金較) 이후에 김이청,김주 부자(父子) 이외의 여러 대의 세계(世系)를 실전(失傳:고적이나 묘지 등 대대로 전해온 사실을 알 수 없게 됨)하였으나,중시조(中始祖)까지의 계대(系代)를 찾게되어 고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고려때 호부상서로 고치기 전의 판도사의 정3품장관,조선때는 정2품호조판서)에 오른 김원등을 중흥시조로 하여 계대를 잇고 있다.통천김씨는 서기 1380년(고려 우왕 6)에 기록된 중랑장공 외가호구입안(中郞將公外家戶口立案)의 문건과 서기 1427년(세종9)에 기록된 중령낭장공부인하동정씨분재문권을 근거로 중흥시조 이후 14세 무렵인 서기 1701년(숭정기원후 재신사 崇禎紀元後再辛巳)에 간행된 족보 초간본에 통천김씨의 시조는 마의태자의 장남 통천군(通川君) 김교(金較)로 기록된다. 시조의 묘는 강원도 통천군 통천읍 동봉곡에 사당은 통천군 통천읍 감당면 내동에 있고 마의태자 망배단과 중흥시조 김원등(金遠登)의 단소(壇所)는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리 대종산에 있다.삼국유사(三國遺事) 2권 김부대왕(金傅大王)편과 삼국사기(三國史記) 12권 경순왕(敬順王) 편에 "서기 927년에 경순왕이 신라 천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손국하자 마의태자가 마의를 걸치고 개골산에 들어가 풀을 먹으며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고 기록된다. 그러나 마의태자의 행적은 패자라는 이유로 은폐되어 더 이상 어떤 문헌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자의 사연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1천년을 넘게 이어 내려온다. 마의태자의 기록이 이처럼 은폐, 폄훼된 마당에 그의 아들 통천군 김교의 후손인들 온전할 수 없었다.통천김씨 족보 초간본에는 "전란으로 상계(上系) 계대(系代)를 전승할 수 없어 시조 통천군 김교(金較), 평장공(平章公:평장사는 정2품 부총리) 김이청(金以淸), 첨의정승(僉議政丞:첨의부의 종1품정승으로 문하시중이 원나라의 간섭으로 바뀜) 김위(金渭) 3대(代)를 별책으로 쓰고, 고려말에 상서(尙書:6부의 정3품 장관)를 지냈으며 판도판서(版圖判書:판도사의 정3품장관으로 조선때는 정2품 호조판서).광정대부(匡靖大夫: 고려때문관 종2품 품계명으로 문종이 관제를 고칠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라 하였는데, 1275년(충렬왕 원년)에 금자광록대부를 고쳐 광정대부(匡靖大夫)라 함)로 문한학사(文翰學士)를 지낸 김원등(金遠登)을 중흥시조로 받들며 계대(系代:대를 이음)한다"고 기록된다.김이청(金以淸)의 기록을 보면 구보(舊譜)에 "통천군으로부터 이분까지 대 수를 연결하여 써놓은 곳도 있고, 대 수의 간격을 두어 써 놓은 곳이 있어 확실치 않아 간격을 두어 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 김위(金渭)의 기록에는 "...족보를 난리로 인하여 실전하여 중시조에 이르기까지 대수를 상세히 기록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라고 기록된다.1701년에 간행된 초간본 제(際:발문)의 기록에 의하면 "...각 집에 유전되어 내려온 가승과 위 문건등을 토대로 족보를 간행하고 위 문건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원석의 집에 풀로 잘 배접하여 보관하도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을 모두 종합하여 보면 족보 초간본 발간 이전에 이미 가승이 있었고 각 집에 유전되는 문건들이 있었음이 확인된다.(통천김씨대종회 기록)<기록의 오류>통천김씨(通川金氏) 최초 족보는 서기 1701년(숙종 27)에 발간된 신사보(辛巳譜)인데,통천군(通川君) 김교(金較) 이후부터 중흥시조인 김원등(金遠登) 이전의 세계(世系)는 알 수 없어 다음과 같이 계대(系代)를 편성하였다. 이후 1861년(철종12)의 신유보(辛酉譜)와 1913년의 계축보(癸丑譜), 1956년 병신보(丙申譜)까지 동일한 계대(系代)로 이어졌다.그런데 신사보(辛巳譜)에 기록된 시중(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 김이청(金以淸)의 아들 김위(金渭)는 안산김씨(安山金氏) 족보에 1세조(一世祖)로 올라있는 인물이다. 안산김씨(安山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인 김긍필(金肯弼)을 시조로 받들며,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진 사적이나 묘지를 알 수없게 됨)되어 고려때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른 충익공(忠翊公) 김위(渭)를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이어왔다.통천김씨(通川金氏)는 경순왕의 첫째아들인 마의태자 김일의 후손이고,안산김씨(安山金氏)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 후손으로 계통인데,안산김씨(安山金氏) 1세조 김위(金渭)가 통천김씨(通川金氏)족보에도 올라 있다.그리고 통천김씨(通川金氏)는 1970년 경술보(庚戌譜) 수보(修譜)때 정난공신(靖難功臣) 김위(金渭)와 중흥시조(中興始祖) 김원등(金遠登) 사이에 7위(位)를 추가하였는데,7위(位)중에는 안산김씨(安山金氏) 1세조인 김위(金渭)의 아들로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을 지낸 김원상(金元祥)과 광산김씨(光山金氏) 9세로 간의대부(諫議大夫)와 비서감(秘書監)을 지낸 김광중(金光中)과 10세 김체(金 )를 포함시켰다.광산김씨(光山金氏) 1세조 김흥광(金興光)은 정유보(丁酉譜)에 의하면,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고,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순왕 첫째아들 마의태자 후손인 통천김씨(通川金氏)와는 계통이 다르다.잘못 기록된 통천김씨(通川金氏) 경술보(庚戌譜)는 1988년의 무진보(戊辰譜)와 2003년의 계미보(癸未譜) 수보(修譜)때까지 이어져 다른 서책등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마의태자 유적지비(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풍리에 1987년 10월 31일 건립)마의태자 후손 부안 김씨 대종회에서 87년도에 건립한 유적지비로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길을 바꿔 동쪽으로 약 40리 쯤 가면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 마의태자 신전대왕각(神殿大王閣)에 이른다. 성이 김(金), 휘가 일(鎰), 자가 겸용(謙用)인 태자는 신라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竹房王后) 박씨(朴氏)사이에서 왕의 9남 3녀중 첫째 왕자로 917년에 태어났다.927년 태자의 아버지 경순왕 김부가 신라 56대 왕이 되자 공도 태자로 책봉되고 이어서 시중 김유렴의 딸 김영란을 태자비로 맞았다. 경순대왕 9년에 이르러 후백제와 고려의 세력에 눌러 국력이 쇠약해지자 왕은 나라를 고려에 양국하려 하였다. 이때 태자가 나서서 천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느냐고 반대했으나 왕의 뜻대로 나라는 왕건에게 넘겨졌다. 그러나 태자는 어머니 죽방왕후를 모시고 자신을 따르는 충신 열사들과 처자를 거느리고 개골산에 들어가 망군대와 한계산성을 쌓고 조국 신라의 광복 투쟁에 전념하였다. 신라 유민들에 의해 대왕으로 추대된 태자는 나라가 망한 것을 자책하고 조국광복의 결의를 굳게 하기 위하여 삼베옷을 많이 입었으므로 마의태자 또는 마의대왕이라 하였다. 항려 유적지 한계산성, 갑둔의 5층 석탑, 김부리의 옥새바위, 대왕각, 대왕정, 술구미재, 다물 장병총등이 지금까지 남아 공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태자가 승하하시자 유민들은 신전대왕각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5월5일과 9월9일에 제사를 지냈는데 천년이나 계속됐다. 공은 태자비 김비와의 사이에 네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은 기로(箕輅) 둘째는 교(較) 셋째와 넷째는 출가하여 보림대사와 보현대사라 하였다. 태자가 승하하자 큰아들 기로공(箕輅公)은 정원대사(正元大師)의 법명(法名)으로 부안 벽산 울금 바위에 찾아가 신라를 부흥시켜 줄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며 부령땅에 뿌리를 내리니 그 자손들은 마의태자를 시조로 모시고 부령(扶寧) 김씨(金氏)를 창씨(創氏)하여 대성(大姓)으로 번창했다. 곧 춘은 부령부원군 구(坵)는 고려 평창사(平章事)가 되었다. 둘째아들 교(較)는 통천(通川)김씨(金氏)시조 작신(作辛)은 부여(扶餘)김씨(金氏)시조가 되었다. 공의 자주 독립정신은 후예들에게 이어져 이들이 고구려의 옛땅 만주 대륙을 되찾는 운동으로 승화시켜 나갈 것이다. 扶寧 후예 種元 삼사 씀 측면에는 扶安金氏始祖麻衣太子金鎰 後裔 金燦浩 立碑 건립추진 扶安 金氏 大宗會 단기 4320년 10월 31일 건립 김부 대왕각(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1리)서기 935년(청태 2년 을미 10월)에 신라의 국력은 약해지고 형세가 위태로워져 스스로 나라를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무렵 경순왕은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함을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은 옳으니 그르니 패가 갈려 의논이 시끄럽게 끝나지 않았다. 이때 왕태자(김일,마의태자)는 말했다. "나라가 보존되고 명망 됨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들로 더블어 민심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후에야 그만둘 일이 지 어찌 천년이나 전승해 온 나라를 남에게 쉽사리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 왕은(경순왕)말했다. "나라가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존될 수 없다. 이왕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임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시랑 김봉휴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태조에게 항복하기로 청했다." 이에왕태자는 1천년 신라 사직을 그대로 내 놓을 수 없다 하여 비빈과 수십 명의 수족병을 거느리고 김부리에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김부리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었으며,김부1리에 있는 김부대왕각의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이라고 되어 있고 수백 년 전부터 동제를 지내오고 있다. 동제일은 음력 5월 5일과 9월 9일이다.시조 김교의 묘는 강원도 통천군 통천읍 동봉곡(洞鳳谷)에 있고,사당은 통천군 통천읍 감당면(甘棠面) 내동(內洞)에 있다.중시조의 묘는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청명리 명당록에 있다.통천김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6명 등 7명의 과거급제자가 있다.통천김씨 집성촌은 충남 서천군 판교면 문곡리.우라리,서천군 비인면 관리 통수매,아니골,전주시 덕진구 우아동 반암리,우아동 안덕원,보령시 남포면 옥동리 전북 완주군 구이면 두현리 등지이며,2000년 인구조사에서 통천김씨는 4,981명이었다.통천(通川)은 강원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757년(경덕왕 16)금양군(金壤郡)이 되었다. 고려초에 현령(縣令:종6품)을 두었으며,1285년(충렬왕11) 통주방어사(通州防禦使:경기 이북 각도의 병권을 장악하고 요지를 지키던 종2품)로 승격하였다.1596년(선조29) 통천(通川)에 병합되었다가 1598년현으로 복구되었다.1895년(고종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흡곡군이 되었으나 1910년 통천군에 폐합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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