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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급제자 260명과 양관대제학 그리고 의병장 조헌을 배출한 명가족보 <갑술보:1997년12월16일>를 국내 최초로 CD-ROM으로 제작배천조씨(白川趙氏:땅 이름은 백천이 아니라 배천으로 읽음)의 본관지 배천(白川)은 황해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초에 배주(白州)로 고쳤으며 현종때 평주(平州)에 속했다가, 고려 고종때 복흥군으로 승격되었으나 공민왕때 배주(白州)라 고쳤고,1413년(태종13) 배천군으로 개칭되어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옮겼고, 1562년(중종21)에는 현(縣)으로 강등시켰다. 1895년(고종 32)군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 연안(延安)에 병합되어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배천조씨(白川趙氏) 시조 조지린(趙之璘)은 송나라 태조(太組)의 맏아들인 조덕소(趙德昭:위왕)의 아들로 979년(고려 경종 4,송나라 태평흥국 4년)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은천현 도태리(都台里:황해도 배천)에 정착 세거하면서 우리나라 배천조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그는 고려 현종조에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관원의 신분으로 29계 중 제3계로 1361년에 정2품 대부로 승격)로 좌복야(左僕射:상서도성 소속의 정2품 부총리)에 이르러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조양유(趙良裕)가 덕종과 정종조에 걸쳐 판위시승(判衛寺承:고려때 의장(儀仗)의 관리를 맡던 관청인 위위시(衛尉寺)의 벼슬로 궁예(弓裔, ~918)의 태봉(泰封)에서 왕의 시위군(侍衛軍)으로 설치되었던 내군(內軍)에서 비롯된 정3품)을 지내고, 추의찬화익조공신(推義贊化翊祚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寺中:종1품 정승)에 올라 배천군(白川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문하시중 조양유가 봉군된 배천(白川)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그 후 조양유(趙良裕)의 아들 조선정(趙先正)이 1047년(고려 문종1)에 과거에 급제하고 여러관직을 거쳐 벼슬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로 문하시중(門下寺中: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종1품 정승).태자태사(太子太師:정1품)에 이르렀다.대제학(大提學:조선때는 정2품 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고려때는 보문각의 종2품)을 역임한 조옥(趙玉)의 아들 조문주(趙文胄)는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국방장관)를 지내고 고종때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져서 아들 조오(趙傲).조진(趙珍) 형제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조선조에 와서는 임란 4충신(壬亂四忠臣)의 한 사람인 조헌(趙憲:호는 중봉,영의정에 추증)이 명성을 떨쳤는데, 그는 조응지(趙應祉)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보던 정기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정9품) 통진현감(종6품수령)을 지내고 호조좌랑(戶曹佐郞정6품)올라 누차에 걸친 상소(上疎)와 직간(直諫)으로 인해 왕의 노여움을 받아 한때는 유배와 파직 또는 벼슬이 깎이는 등 많은 파란을 겪었다.그는 선조때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 영조때는 영의정(領議政:정1품정승)에 추증되었다. 조헌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학문을 계승시킨 학자로서 중봉집(重峰集).중봉동환봉사(重峰東還封事)등을 집필하였다.부호군(副護軍:종4품) 조충(趙庶)의 아들 조정호(趙政虎)는 광해군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정6품) 등을 지내다가 인조반정후 지평(持平: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정5품)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왕의 잘못을 간하던 정3품 사간원의 으뜸 벼슬)에 올라 인조가 부친(父親)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한때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병조 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와 강원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 등을 지냈다.조정호(趙政虎)의 아들 조석윤(趙錫胤)은 인조(仁組) 때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에 올라 호당(湖堂:재덕을 갖추고 유능한 문신을 호당에 들어 즉 장의사에서 사가독서시킨 일로 독서당이라고함)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호당에 들어 오로지 공부만 하던것)로 학문을 연마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그는 수찬(修撰:서책을 편집.찬술하는 홍문관의 정6품) 승지(承旨:정3품 승정원 벼슬)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왕의 잘못을 간하던 관청인 사간원의 정3품)을 역임하였으며 그는 효종 즉위년에는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큰 명성을 떨쳤으며 인조실록(仁組實錄)편찬에 참여했다.조겸행(趙謙行)의 아들인 조석주(趙錫周)는 숙종때 정시문과(庭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 대궐안에서 보던 과거)에 급제하여 장령(掌令: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을 역임했으나 만년에는 시주(詩酒)를 즐기며 학문에만 진력했고 죽은 후 효행과 청백(淸白)으로 도승지(都承旨:정3품 왕의 비서실장)에 추증되었다. 이밖에 조석록(趙錫祿).조상한(趙相漢)이 군수(郡守종4품)를 역임했고 조수달(趙壽達)이 현감(縣監:종6품)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배천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68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3년마다 실시됨)에 40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123명,의과에 2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7명 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기 위한 과거)에 1명 등 260명의 과거 급제자가를 배출하였다.배천조씨 시조 묘는 황해도 연백군 운산면 도태리 고정산에 있고 향사일은 10월 1일이다.한편 배천조씨는 족보인 <갑술보:1997년12월16일>를 국내최초로 CD-ROM으로 제작하여 유명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배천조씨는 1985년에는 총 14,313가구에 58,594명이었으며,2000년에는 20,734가구에 66,155명이었다.인물탐구조헌(趙憲),1544~1592,문신,의병장 호는 중봉)조헌(趙憲)의 본관은 배천(白川)이며 자는 여식(汝式)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며시호는 문열(文烈)이다.조헌은 율곡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3년마다 보던 과거를 통틀어 식년시라 함)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주교수(定州敎授)가 되었으며 서기 1572년(선조 5) 정자(正字:정9품)로 왕이 절에 향(香)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삭직되었다가 저작(著作:홍문관.교서관.승문원의 정8품)에 기용되었으며, 1574년에 질정관(質正官:글의 음운,제도 등의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 오는일을 맡아본 벼슬,사신이 중국에 갈때 함께 감)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호조.예조의 좌랑(佐郞:정6품)과 감찰(監察:사헌부의 정6품)을 지냈으며, 통진현감(通津縣監:종6품수령)때는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에 유배되었었다.서기1581년 공조좌랑(佐郞:정6품)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지방관을 규찰하던 5품).종묘서령(宗廟署令:종5품)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종6품)으로 나갔다.1586년에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東人)이 율곡 이이,우계 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1589년 동인(東人)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갔으며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대사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금산의 칠백의총에서 의병들과 함께 향사한다.조헌은 의병장으로 유명하지만 율곡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도 유명하다.그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서기 1754년(영조 30)에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추증되어 문묘(文廟:공자를 모신 사당)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는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는 동환봉사 등이 있다.순창조씨(淳昌趙氏.옥천조씨)조수항은 봉림대군 사부(師傅:왕의 아들을 교육하던 시강원의 정1품)조위일(趙胃一)은 제자백가에 통달,약관 20세에 천명도해(天命圖解) 저술5세손 조인평 망이 망소이 난 평정하고 대장군에 올라순창조씨 대종회기록과 문헌을 종합해보면 순창조씨 시조 조자장은 고려 초에 순창에서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냈다. 그 후 대대로 호장을 지내면서 가문을 이어 오다가 5세 조인평이 1177년(명종7) 공주 명학소(대전시 서구 탄방동.갈마동,둔산동 일대)의 망이 망소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대장군(大將軍:종3품 육군중장)에 오르면서 향리를 떠나 벼슬길에 나갔다.그 후 6세 조광명은 문하시랑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 7세 문정이 좌우위대호군(大護軍:종4품육군중장), 8세 겸이 충숙왕 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다시 원나라 제과(制科:황제가 친히 보이던 과거)에 급제하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중서문하성의 정4품 낭사),밀직사사(密直司使:왕명출납하던 밀직사의 종2품) 등을 역임하였고,조 겸의 아들 조 봉이 판도판서(判書:정3품장관,조선때 호조판서)로 순성군에 봉해지는 등 조상의 발상지인 순창을 본관으로 하고 여러 파로 나누어 전국 일원에 번성했다.고려 때부터 문정공의 각 파 가첩이 전해 오던 것을 모아서, 1802년 22세 조중삼이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였는데, 그 후 1933년 3차 수보하면서 서문에 영조때 이변이 각 파를 통합한 대동보를 편찬하려다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또한 1802년 문정공 파보를 편찬하면서, 문정공 이상의 세계(世系)를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합보를 못했다고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후 다시 1963년에 수보하면서 문헌이 없어서 옥천군파(옥천조씨)와 합보를 못함이 유감이라 하였음을 미루어 보아 옥천조씨와 동원이면서도 확실한 고증이 없어 합보를 못한 것으로 본다.이 외에 경기도 평택 등지에서 거주한 조공탁을 시조로 하는 순창부원군파가 있는데, 이 역시 동원이 아닌가 하고 고증을 찾아 합보를 하려고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이를 정리해보면, 순창조씨는 순창(淳昌)의 옛 이름이 옥천(玉川)이므로 '옥천조씨'라고도 한다. 순창조씨는 호서.호남 2파가 있으며, 호서파는 고려의 호장(戶長:고을아전의 맨 윗자리) 조자장(趙子長)을, 호남파는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정2품부총리)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정승)에 오른 조장(趙璋)을 각각 시조로 하고 있다.그러나 종친측에 따르면, 선대세계(先代世系)에 대한 문헌이 부족하여 합보(合譜)는 못 보고 있으나 같은 문중임은 틀림없다고 한다.조선시대의 인물로 명종 때 목사(牧使:정3품수령) 등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남긴 조유성(趙惟誠), 류성룡(柳成龍:임진왜란때 영의정)의 사위로 인조때 이조참판(종2품차관)을 지낸 조수익(趙壽益) 등이 호서파에 속한다.고려 말기의 절신(節臣)으로 정몽주(鄭夢周).설장수( 長壽)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고,조선시대에 와서는 절개를 지켜 목은(牧隱).포은(圃隱).도은(陶隱).야은(冶隱)과 함께 5은(五隱)으로 불린 옥천부원군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 세종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 도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등을 역임한 조숭문(趙崇文) 등은 호남파에 속한다.순창조씨(淳昌趙氏)의 시조 조자장(趙子長,趙子張)은 고려시대에 순창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 벼슬)을 지냈다.본관을 순창으로 한것은 고려때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에 오른 조인평(趙仁平)에서 비롯된것이며 조인평을 시조로 기록된 문헌도 있으나, 조인평은 조자장의 5세손이라고 한다.조인평(趙仁平)은 고려 명종7년에 '계룡산의 토적'을 토평하고 벼슬에 올라 금오위 낭장(金吾衛 郞將:금오위는 고려때 6위의 하나로,낭장은 정6품으로 중랑장 아래)을 거쳐 대장군(大將軍:종3품),상장군(上將軍:정3품 중앙군 최고 지휘관)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그의 아들 조광명(趙光明)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올라 가문의 기틀을 마련했다.조광명의 아들 조문선(趙文璇)은 충렬왕때 중문지후(中門祗候:고려 충렬왕때 통례문을 고친 이름,지후는 정7품)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종3품 대장군이 바뀐명칭)을 지냈고,조문선의 아들 조염(趙廉)은 광정대부(匡正大夫:고려때 문관의 종2품 상(上)품계,후에 정2품으로 하였고 금자광록대부를 고친 품계)로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문하성의 종2품)에 올랐으며 조염의 큰 아들 조봉(趙縫)은 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전의 판도사의 정3품 장관)를 지내고 순성군(淳城君)에 봉해져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조염의 둘째아들인 조신(趙紳)은 고려말에 진사(進士)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괴산의 송평으로 은거하여 정자를 세워 피세정(避世亭)이라 이름 짓고 백이숙제와 안진경의 충절을 찬미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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