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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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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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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항은 봉림대군의 사부(師傅:왕의 아들을 교육하던 시강원 정1품)조위일(趙胃一)은 제자백가에 통달,약관 20세에 천명도해(天命圖解) 저술충신 옥천부원군 조원길 묘비(玉川府院君趙元吉墓碑)발견고려말 <5은(隱)>으로 불려진 조원길 부자(父子)3현문헌을 종합해보면 옥천조씨 시조 조자장은 고려 초에 옥천(순창)에서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맨 윗자리)을 지냈다. 그 후 대대로 호장을 지내면서 가문을 이어 오다가 5세 조인평이 1177년(명종7) 공주 명학소(대전시 서구 탄방동.갈마동,둔산동 일대)의 망이 망소이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 대장군(大將軍:종3품 육군중장)에 오르면서 향리를 떠나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 후 6세 조광명은 문하시랑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 7세 문정이 좌우위대호군(大護軍:종4품 육군중장), 8세 겸이 충숙왕 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다시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좌사의대부(정3품 간관), 밀직사사(왕명출납하던 청와대비서실 실장격) 등을 역임하였고,조 겸의 아들 조 봉이 판도판서(判書:정3품장관으로 조선때 호조판서)로 순성군에 봉해지는 등 조상의 발상지인 순창을 본관으로 하고 여러 파로 나누어 전국 일원에 번성했다. 고려 때부터 문정공의 각 파 가첩이 전해 오던 것을 모아서 1802년 22세 조중삼이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였는데 그 후 1933년 3차 수보하면서 서문에 영조때 이변이 각 파를 통합한 대동보를 편찬하려다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1802년 문정공 파보를 편찬하면서 문정공 이상의 세계를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합보를 못했다고 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후 다시 1963년 수보하면서 상고세계와 문헌이 없어서 옥천군파(옥천조씨)와 합보를 못함이 유감이라 하였음을 미루어 보아 옥천조씨와 동원이면서도 확실한 고증이 없어 합보를 못한 것으로 본다.이 외에 경기도 평택 등지에서 거주한 조공탁을 시조로 하는 순창부원군파가 있는데 이 역시 동원이 아닌가 하고 고증을 찾아 합보를 하려고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이를 정리해보면 순창조씨는 순창(淳昌)의 옛 이름이 옥천(玉川)이므로 '옥천조씨'라고도 한다.옥천조씨는 순창(淳昌)의 옛 이름이 옥천(玉川)이므로 <순창조씨>라고도 한다. 옥천조씨는 호서.호남 2파가 있으며 호서파는 고려의 호장(戶長) 조자장(趙子長)을, 호남파는 고려시대에 평장사(정2품)를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정승)에 오른 조 장(趙璋)을 각각 시조로 하고 있다. 그러나 종친측에 따르면 선대세계(先代世系)에 대한 문헌이 부족하여 합보(合譜)는 못 보고 있으나 같은 문중임은 틀림없다고 한다. 옥천조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7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3년마다 실시됨)에 9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소과)에 53명,의과에 3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1명 등 8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옥천(순창)은 전라북도 남쪽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경덕왕이 순화군으로 고치고 고려때는 순창현이 되어 남원부에 속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옥천조씨는1985년에는 총10,819가구 48,637명이었고,2000년에는 15,346가구에 49,847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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