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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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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음 이덕형, 20세에 문과에 급제,23세에 호당(湖堂)31세에 대제학(大提學) 38세에 우의정 42세에 영의정 이는 조선 역사상 최연소 기록8형제 "팔극조정",문과급제자 191명명벌(名閥:문벌이 좋은 집안,명가)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신라 17대 내물마립간(내물왕,재위 356~401)때 내사령(內史令:종1품)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 비롯된다.광주이씨가 원조로 받드는 이자성(李自成)은 칠원(漆原)에서 살아온 호족의 후예로 칠원백(漆原伯:칠원은 현재의 경남 함안)에 봉군되어 성주(城主:성의 주인)의 작위를 세습했다고 한다.<광주이씨 대종회> 기록에 의하면, 조상들이 신라 때 칠원(漆原:경남 함안)에서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자성(李自成)을 원조로 하여 세계(世系)해온 칠원성은 신라의 모든 성(城)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麻衣太子,김일)만을 왕(王)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며 끝까지 항거하자 크게 노한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성을 함락시킨 뒤 이씨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淮安:현재 경기도 광주)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지방 노비들 중에서 이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다고 알려지면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이들 중에 이당(李唐)이라는 인물이 있어 고을 수령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수령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있고 덕망높은 자손들이 번창하여, 한음 이덕형 선생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후손들이다.이당(李唐)이 주인인 수령의 딸과 혼사를 맺게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고려말에 광주고을의 한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무 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심하였다.날짜를 잡고 고 혼수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채단 끊는 사람이 가위를 잃어버리고 쩔쩔매고 있었다.이때 벙어리 신부가 갑자기 말문이 터져 “문틀 위에 가위가 있다”고 말을 하자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 원님에게 알렸고 원님은 용꿈의 신통함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신랑신부가 혼례를 올리고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어려서부터 주위에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이 아들 다섯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5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5형제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으로 고려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광주이씨(廣州李氏)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둔촌(遁村) 이집(李集)선생으로, 대부분의 광주이씨 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남아있다고 한다기록에 보면 최원도는 고려말 사람으로, 요승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영천 땅에 내려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 집(李集) 또한 얼마 후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그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화가 미칠까봐 매우 걱정이 되었다. 큰 화가 닥쳐 올 것을 감지한 이집은 어느날 밤 아버지를 등에 업고,경상도 영천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다.몇 달만에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 날 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다.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데 친구 최원도가 소식을 듣고 문간방으로 뛰어나왔다반가운 마음으로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 이집을 향해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매우 난처해하며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최원도의 태도는 더욱 격노하면서 이집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방을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다.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 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르게 가만히 숨어들어 길옆 짚 덤불에 몸을 숨기고 하루 밤을 쉬고 있었다.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사람들 모르게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둡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보다가,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되었다.이렇게 하여 이집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는데, 오로지 최원도 혼자만 알고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자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우선 밥을 고봉으로 눌러 담고 반찬의 양을 늘려도 주인 혼자서 다 먹어 치우는 것이 시중드는 몸종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여러 달을 의아하게 생각하던 몸종이 하도 궁금하여 하루는 주인이 그 음식을 다 먹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고 문틈으로 엿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처음 보는 사람들 둘과 함께 세 명이 식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몸종은 최원도의 부인에게 고하였고, 부인은 남편에게 어찌된 연고인가를 묻게 되었다.최원도는 부인과 몸종에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밀을 지킬것을 다짐하였고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두 집 가솔들 모두가 멸문의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하였다.자기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을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느끼게된 노비는 몇날을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을 택하게 되었다.그 몸종의 이름은 “제비”라 하였고, 최원도 부부는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어주었는데 나중에 이 사연을 알게된 최원도와 이집의 후손들이 그 몸종의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고 묘비에 연아(燕娥)의 묘라고 세웠고, 지금도 이집의 아버지 묘 부근에 최원도의 몸종 “제비”의 묘소가 있으며,양쪽집안 조상의 묘제때 연아의 묘에도 함께 제사를 지내준다고 한다.종이 자결한 후 얼마 안되어 이집의 아버지가 최원도의 다락방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이때 최원도는 자기의 수의를 내주어 정성껏 염습을 하고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 어머니의 묘 부근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경상도 영천에 지금도 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의 묘가 있다. 다락방 생활 4년만에 중 신돈이 맞아죽고, 세상이 변하게 되어 나라에서 이집과 최원도를 중용 하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이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각자의 집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생사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우정은 그 후손들 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져 왔다.조선 선조때 한음 이덕형 선생이 잠시 경상도 도체찰사를 겸직 한일이 있었고, 이때 조상을 구해준 최씨 가문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위토를 마련해주고, 양가의 후손들이 대대로 두 어른의 제사를 함께 모시도록 일렀는데, 이 관습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여기 최원도가 세상이 바뀌어 서울로 올라 가게된 친구 이집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었다는 시 한 수가 전한다.“세상을 탄식하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고 고향 떠나서 아버지께 드린 효성 지하에까지 미치네. 한양은 멀고 먼 곳 구름 연기만 자욱한데 나현(이당과 최씨 어머니가 묻힌 고개이름)위에 올라보니 수풀만우거졌네. 앞뒤로 두개의 봉분을 나란히 세웠으니 그대와 나의 마음 누군들 알겠는가. 원하건대 대대로 지금같이 지내면서 서로의지내면서 서로의 이해를 떠나 깊은 정 변함없기를신라가 고려에 손국하여 천년사직을 고하자,유독 칠원 백성들만이 성을 굳게 지켜 절의(節義)를 높이고 항복하지 않자, 고려 태조가 병력을 증강하여 오랜 뒤에야 성을 함락시켜, 칠원성주(漆原城主)의 일족을 회안(淮安:경기도 광주)에 이주시키고,고을의 호장(戶長:고을아전의 맨 윗자리.다른 기록은 역리로 삼았다고도 함)으로 복역하게 하였다고 한다.그래서 회안의 이속(吏屬)으로서 세대를 이어오다, 고려말에 이르러 광주에 세거하던 이 당(李唐)이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生員:소과의 종장에 급제한 사람으로 선비로서 사회적 공인 받음)이 되었으며,이당(李唐)은 광주유수(廣州留守지방장관 2품)의 딸과 혼인하여, 5형제를 두었는데, 5형제가 각각 <1세조>로 받들고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광주(廣州)는 서기1395년(태조4) 광주목(牧:목사는 정3품)으로 경기좌도에 편입되었으며, 1505년(연산군 15)에는 주를 폐하였다가, 1618년(광해군10)에 광주부로 승격하였다.1895년(고종32) 광주군이 되었으며,1979년 광주면이 읍으로 승격한 이후 1989년 동부읍과 서부면이 하남시로 통합하여 독립하는 등 규모는 축소되었고 2001년에 광주군이 광주시로 승격하였다.실질적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 이당(李唐)은 고려말에 국자감(國子監:고려때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교육기관)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품계)로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 장관)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의금부의 정2품)에 증직되었다.동국여지승람(東國興地勝覽)의 경기도 '광주인물편'에 의하면, 그는 원래 광주 출신 관리로 국자(國子) 생원(生員)에 올라 행실이 어질었으며,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했다고 한다.이때부터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하고, 이당(李唐)이 광주이씨(廣州李氏)의 시조가 된다.시조 이당(李唐)에게는 이인령(李仁齡),이원령(李元齡,나중에 이집(李集)으로 개명),이희령(李希齡),이자령(李自齡),이천령(李天齡)의 5형제를 두었는데, 아들 5 형제가 모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다.서기 940년(태조23)에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하여, 광주이씨(廣州李氏)가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광주이씨(廣州李氏)는 고려 태조에 의하여 회안(淮安:경기도 광주)으로 강제 이주된 후 시조인 이 자성(李自成) 이후의 족보를 잃게 되어, 8.15광복 이후 <정묘대동보>를 만들 때까지 5개 계파로 나뉘어져 족보를 합보(合譜)하지 못하고,둔촌(遁村) 이집 후손들은 "광주이씨 대종회"를 구성하여, 둔촌의 아우 십운과공(十韻科公)후손들의 종회와, 두 형제의 아버지인 생원공(生員公) 이당(李唐)을 시조로 받들고 둔촌(遁村)이집(李集)과 십운과공(十韻科公) 이자령(李自齡)을 1세조로 받들며, 각기 대종회(大宗會)와 십운과공종회(十韻科公 宗會)로 종사(宗史)를 잇고 있다.율정공(栗亭公) 이관의(李寬義)의 후손들은 1987년 정묘대동보 전까지는 석탄.암탄 형제 종회와 함께 이한희(李漢希)를 1세조로 받들며 족보를 만들고 종사를 이어오다가 정묘대동보에서 둔촌(遁村) 이집의 4촌이며 율정공의 증조인 생원공(生員公) 이록생(李祿生)을 1세조로 받들며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석탄공(石灘公) 이양중(李養中)의 후손들은 정묘대동보 이후 석탄공종회(石灘公宗會)로 석탄공 이양중을 1세조로 받들며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암탄공(巖灘公)이양몽(李養蒙)의 후손들도 암탄공종회(巖灘公宗會)를 만들어, 정묘대동보 이후 암탄공(巖灘公) 이양몽(李養蒙)을 1세조로 받들며 종사를 이어가고 있다. 광주이씨는 시조 이후의 세계(世系)의 실전(失傳:묘지나 고적 등이 대대로 전해온 사실을 알수 없게 됨)으로 대종회와 십운과공종회,석탄공종회,암탄공종회,율정공종회가 각기 1세조를 달리하여 족보를 만들어 왔으며,광주이씨(廣州李氏)는 대종회(大宗會)와 <4개 방계종회>로 나뉘어져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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