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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종씨(鍾氏)는 2000년조사에서 강화종씨(142명).두원종씨(53명).영암종씨(148가구 506명).정의종씨(6명).통진종씨(76명).풍덕종씨(11명).하음종씨(21명)등 7본관에 816명이었다.그러나 하음,통진,강화종씨(鍾氏)는 영암종씨의 세거지명이라고 한다.영암(하음.강화)종씨(靈岩(河陰.江華)鍾氏)1백여권 필사(筆寫)로 된 세보(世譜)전해져종씨(鍾氏)의 유래에 대해서는 문헌과 종씨(鍾氏)의 갑자보(甲子譜)에 따르면 시조 종석(鍾錫)은수직(壽職:매년 정월에 80~90살이 넘은 관원과 백성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당상관)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조 종석(鍾錫)은 조선시대 현종과 숙종년간의 인물이라고 한다.그러나 기록에 영암백(靈岩伯)에 봉해졌다는 종관수(鍾寬秀)가 세보(世譜)에 나와 있지 않아 계대(系代)를 정확히 알기에는 문헌의 문헌 발굴 이전에는 짐작하기 힘들다. 본관소재지 영암(靈岩)은 백제의 월내군(月奈郡)으로 신라때 현재의 지명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14년에 낭주안남도호부로(?州安南都護府) 승격했다가 현종9년에 강등되어 영암군(靈岩郡)으로 고쳤다.영암종씨(靈岩鍾氏)종친회 자료에 의하면 종(鍾)씨는 송나라 환공(桓公,황제 皇帝)이 둘째아들을 종성(鍾城)의 왕(王)으로 봉하고 종(鍾)씨로 내림으로써 성씨(姓氏)가 생겼다고 한다. 그 후에 종동수(鍾銅修).종지란(鍾芝蘭)이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조선이 개국한 후에 낭주(?州:영암 옛 지명)를 영암(靈岩)으로 고쳐 종관수(鍾寬秀)를 영암백(靈岩伯:백은 고을 700호의 조세를 받아 쓸 수있음)으로 봉하였는데,그 후 세계(世系)를 잃게 되어 정확히 알지 못한다.다만 그 후손인 종석(鍾錫)이 강화군(江華郡) 하점면(河岾面)에 터를 잡아 현재 15대째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대부분 강화도에 살고 있다.지난 2000년 인구조사에서 종씨(鍾氏)의 본관은 하음(河陰).풍덕(豊德).통진(通津).두원(荳原).정의(旌義).영암(靈岩)등이 있는데 하음(河陰).통진(通津).강화(江華)를 관향으로 하는 종(鍾)씨는 모두 영암종씨(靈岩鍾氏)의 세거지라고 한다.종씨는 희성씨 임에도 종문(宗門)의 활동이 활발하여 1백여권의 필사(筆寫)로 된 세보(世譜)가 있으며 1981년에 간행된 신유보(辛酉譜)가 있다.오늘의 종씨문사(鍾氏門事)에 헌신적인 분이 종인서(鍾仁緖)라고 하며 1864년(고종1)에 만든 갑자보(甲子譜)도 이 분이 소장한 보책(譜冊)이라고 한다.종씨(鍾氏)는 극히 희성임에도 불구하고 1525년(중종20)에 종세필(鍾世弼)이 식년시(式年試:식년시는 3년마다 보던 정기 과거시험을 통틀어 이르는 말) 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일본어.여진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뽑기 위하여 보던 과거)에 급제하여 종씨(鍾氏)가문을 빛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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