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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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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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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제학(大提學정2품문형) 7명 최다 배출, 조선 예학의 종조 사계구운몽.사씨남정기의 저자 서포 김만중조선 4대 서가(書家) 김구(金絿,기묘명현)의 인수체(仁壽體)라는 필체 생겨인재(人材)의 산실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 신무왕의 셋째 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문헌에 따르면, 김흥광(金興光)은 향후 국내의 정세가 혼란스러울 것을 알고,광서동(光西洞:광주광역시 서일동)과 담양에 정착해 살았다.시조가 신라왕자라고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문헌은 1307년(대덕 大德 11년,고려 충렬왕33년 정미丁未)6월에 지은 제안황대전고(提按黃臺典誥,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목적으로 적은 문서를 담당한 관직) 벼슬을 지낸 김이(金珥)의 찬(撰:지음)이라 전하는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이다.이 광산현제영시서는 광산김문의 최고(最古) 문헌인데,그 내용에 "차현내신라시..왕자김흥광예지장유난리출작서인래우차지복서일동이거(此縣乃新羅時 ........ 王子金興光預知將有亂離出作庶人來于此地卜西一洞而居.........) 즉,이 고을은 신라 때 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이 되어 이 땅 서일동에 와서 사셨고.........."로 되어있다. 후손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당상관 품계) 김현뢰(金賢賚)가 쓴 평장동유허서(平章洞遺墟序,양간공파보)에도 "명호평장동즉아선조신라왕자공복거지지(鳴呼平章洞卽我先祖新羅王子公卜居之地..........) 즉, 아 ~평장동은 우리 선조 신라왕자공께서 터를 잡아 사시던 곳으로 ......"로 되어 있고, 통정대부 김진상(金鎭商)이 쓴 왕자공 휘(諱) 흥광 유허비 음기(陰記)에는 "광주치지..평장동..아시조신라왕자김공지유허야(光州治之......平章洞......我始祖新羅王子金公之遺墟也....)즉 광주고을...평장동은..우리 시조 신라왕자 김공의 유허다..."로 되어있다.후손들은 본관을 광주의 옛이름인 광산(光山)으로 하게되었으며,김흥광의 아들 김식(金軾)이후 대대로 고려때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은 고려 문종때 서무를 총할하고 간쟁(諫諍)을 맡아보던 관아로 내사문하성을 고친 관청)가 연이어 8명이 배출되자, 세상사람들이 그 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했다.그 후손을 크게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으로 나누고 있다.한편,광산김씨 정유대동보(丁酉大同譜)에는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시조의 10세손인 김체의 아들대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진다.김체의 아들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 형제대(代)에서 두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 산맥으로 이어진다.김광세는 중랑장(中郞將:고려때 정5품)을 지내고,상서좌복야(上書左僕射:상서도성(尙書都省:백관을 통솔하던 어사도성의 바뀐 명칭)의 정2품 부총리)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되었으며, 그의 아들 김경량이 대장군(大將軍:종3품)에 올랐고 손자 김수(金須)는'삼별초의 난'때 순절(殉節:나라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림)하였다.김수의 손자 김광재(金光載)는 공민왕때 난정이 시작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가에 여막(廬幕:궤연 옆이나,무덤옆에 지어 상제가 거처하는 초막)을 짓고 거상(居喪)하였으며, 임금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곳에 영창방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는 정표(旌表:어진 행실을 칭송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를 세우게 했다.공조판서(工曹判書:정2품 장관)를 지낸 김예몽의 아들 김성원은 세조때 동국여지승람(東國與之勝覽:성종 때 왕명으로 김성원,노사신 등이 각 도의 지리.풍속 등을 적은 책.55권 25책)을 편찬했고,손자 김구(金絿)는 중종때 조광조의 혁신정치에 동조 김정,김식,한충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조광조,김정 등의 사람파들이 지치주의의 실현을 위해 혁신정치 시도하다 훈구파의 공격으로 사사된 사림들)으로 일컬어졌다.그는 뛰어난 필법과 명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작성했으며,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의 마을 이름을 붙여 인수체(仁壽體)라는 필체가 생겼다.당적보(黨籍譜)에 의하면, 김구는 중국 사람들이 자신의 글씨를 소중히 한다는 말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않아,세상에 남은것이 많지 않다고 한다.중종때의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 김극성은 30여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뛰어난 경륜으로 명성을 떨쳤다.김광존의 후손을 보면,현손(玄孫:고손자) 김진이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올라 유명했으며, 김 진의 증손이자, 시조의 18대손 김정(金鼎)의 세아들 김약채(金若采)등 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의 화려한 명맥이 이어졌다.김정(金鼎)은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책록되고, 중대광(重大匡:고려때 문산계로 1308년(충렬왕 34) 종1품으로 제정되었다. 뒤에 벽상삼한(壁上三韓)의 칭호를 위에 덧붙였음)으로, 대호군(大護軍:종3품대장군)에 이르러, 광성군(光城君)에 봉군되었다.김정의 세아들로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도지사)를 지낸 김약채(金若采), 척약재( 若齋) 김약항(金若恒),직제학(直提學:홍문관.예문관의 종3품)을 지낸 김약시(金若時) 모두 과거에 올라 크게 현달하였다.고려말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 김약채는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 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지냈으며,김약채가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연산(連山)에 자리잡아,세칭 광김(光金)을 중심으로 한 기호유학(畿湖儒學)의 본거지가 되었다.충남 논산시 연산면에는 입향조 김약채의 재실이 있다.김약채의 아버지는 광성군(光城君) 김정(金鼎)이고, 어머니는 전법판서(典法判書:정3품법무장관) 리방(李昉)의 딸로 연안리씨(延安李氏)이다. 광산김씨의 연산 입향사적은 불분명하나 입향조는 김약채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전된 김약채의 묘가 경기도 양주 풍양에 있었고, 아들 김문(金問)의 묘는 장단에 있었기에, 외관직(수령) 생활 때문에 개성에 근거지가 있었다고 전한다.김문(金問)의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가 청상과부로 수절하면서 자손을 잘 키웠고, 그녀의 묘소가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으며,후손의 묘도 연산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진정한 입향조는 양천허씨라고도 하며,본격적인 연산지역의 세거는 양천허씨의 손자 김국광(金國光) 대(代) 부터라고도 한다.동생 김약항(金若恒,호는 척약재 若齋)은 공민왕때 대사성(大司成:성균관의 정3품)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표문(表文:임금에게 표로 올리던 글)이 공손치 못하다며,황제의 노여움으로 양자강변에 유배되어 돌아오지못했다고 한다.후에 김약항의 여종이 중국 남경에 가서 유골을 찾아왔다고 한다.김약채(金若采)의 증손 김국광(金國光)은 적개공신(敵愾功臣세조 때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컸던 44명에게 3등으로 녹훈(錄勳)하고 공신에 책록, 전지(田地)를 하사함)과 좌리공신(佐理功臣성종2년(1471년) 김국광.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 73인에게 임금을 잘 보좌하고 정치를 잘하였다는 공로로 내린 훈명勳名) 두 개의 공훈(功勳)에 책록(策祿)되고, 성종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문산계(文散階) 정1품 상(上)의 품계명으로 종친.의빈.문무신에게 주던 조선시대 최고 품계)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정1품정승)에 올라,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策封)되었다.일찌기 황희(黃喜)가 손녀사위로 맞아들여, 손녀사위임에도 황희가 그를 대할때는 반드시 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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