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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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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始祖) 이하 3대(代)가 정승 반열에 올라 가문 중흥시켜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인물 영의정 채제공평강채씨는 채송년(蔡松年:시호 경평)을 시조로 받든다.그는 고려 고종때 추밀승선(樞密院 承宣:승지의 옛이름,조선조에는 승정원의 정3품 승지)이 되고,서기1230년 '최향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사(兵馬使: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벼슬로 조선때는 종2품,절도사)로 이를 평정하여 대장군(大將軍:종3품)에 올랐다.이후 상호군(上護軍:정3품 상장군이 고쳐진 관직)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종2품의 품계이며 1361년에 정2품 대부로 바뀜)에 올랐으며,이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를 지내고 태자태사(太子太師:정1품)에 이르렀다.채씨(蔡氏)의 본관은 문헌에 따르면 평강채씨(平康).인천채씨.음성채씨(陰城).광주채씨(光州蔡氏)등으로 전해지나 모두 동원분파(同源分派)이며,그중 평강채씨와 인천채씨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채씨(蔡氏)의 선대(先代)는 고대 중국 고신(高辛)의 아들로 사도(司徒:고려때는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 품계)를 지낸 계(契)의 후손으로 전한다.은나라가 멸망하자 기자(箕子)를 따라 한국에 왔다고도 하며,일설에는 평강채씨의 시조 채원광(蔡元光)은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사위 채보한(蔡輔漢)의 후손이라고도 하지만,정확한 고증은 어렵다고 한다.또 전설에는 '오색이 영롱한 영귀(靈龜:거북)가 평강(平江)에서 나와 사람으로 변했기에,왕이 이를 듣고 그에게 채성(蔡姓)을 하사하고 평강백(平康伯)에 봉하였다'고도 한다.채씨(蔡氏)중에서 대본(大本)인 평강채씨는 조선 중기에 성세를 보였고 특히 고려 말기에도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채씨는 조선시대에 158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1960년도 인구조사에서는 6만 3217명으로 성별순위는 당시의 258성 중 제51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2만 3412가구에 9만 7634명으로 당시 274성 중 제52위였다.평강채씨의 인물은 고려때 최충헌(崔忠獻)의 집정기에 발탁,고종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를 지낸 평강채씨 시조 채송년(蔡松年)과 그의 아들 채정(蔡楨)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 재상반열)에 올라 평강군(平康君)에 봉해졌다.그리고 둘째아들 채자화(蔡子華)도 상장군(上將軍:정3품)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올라 판이부사(재상이겸임함)를 지냈으며,손자인 채인규(蔡仁揆),채모(蔡謨),그리고 증손 채종린(蔡宗璘)등 3대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후손들은 봉군지(封君地)인 평강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채송년(蔡松年)은 서기1230년 '최향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사(兵馬使:각 지방의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절도사)로 이를 평정하여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이 되었으며,상호군(上護軍:정3품 상장군의 고쳐진 관직)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종2품의 품계,1361년에 정2품 대부로 바뀜)에 올랐으며,이어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부의 정2품)를 지내고 태자태사(太子太師:정1품)에 이르러 가문을 크게 빛냈다.평강채씨는 조선시대에도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굳혔는데,중종.명종때 호조참판(종2품 차관)을 거쳐 좌참찬(左參贊:의정부 정2품)을 지낸 채세영(蔡世英)이 유명했으며,효종때 대사헌(大司憲:백관을규찰하고 풍속을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감사원 감사위원)을 지내고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오른 채종린의 11대손 채유후(蔡裕後)가 명성을 떨쳤다.특히 채세영(蔡世英)은 중종과 명종대에 걸쳐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 장관),좌참찬(左參贊:의정부의 정2품)을 역임한 명신(名臣)으로 일찍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14)에 남곤.심정 등의 수구파가 조광조.김정 등의 신진 도학자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사림(士林)들이 크게 화를 당하자 대궐에 들어가 승지(承旨:정3품 왕의 비서실장,도승지.동부승지.좌.우부승지 공히 정3품 승지) 김근사의 사필(史筆)을 빼앗아 들고 임금께 말하기를,"신은 간신이 아니고 제 소임 밖의 일을 말씀 드리는 것은 죄가 되오나,이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는 것인지 죄명을 들고자 하나이다"하고 말하자,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겁을 내어 목을 움츠렀다고 한다.(자료참고) 특히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기묘사화,을사사화(士禍)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홀로 남아 창안백발(昌顔白髮)이 조정에서 빛났으며 평소 장중하여 아무도 그를 범하지 못했다고 하며,학문이 깊어 천문.의약은 물론 중국어까지 통달하였다고 한다.평강채씨가 자랑하는 인물인 채제공(蔡濟恭)은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에서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기까지 10여년 동안 재상(宰相: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조선 천주교의 포교운동을 음양으로 지원한 사람이다.그가 죽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도에 달하여 이른바 1801(순조1)년의 신유박해를 비롯하여 1815년 을해박해,1827년 정해박해,1839년 기해박해 등이 일어났다.그외 철종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각 지방에 두어 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병사.절도사)를 지낸 채동건(蔡東健)이 고종때 개성부 안무사(按撫使:고려.조선조에 지방에 파견되어 수령을 감찰하는 임시 외관직,또는 변란이나 재난이 있을때 왕명으로 파견되어 백성을 안무하던 벼슬)를 거쳐,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삼도수군통제사의 준말이며 각 도에 두었던 수영(水營)의 정3품으로 수군을 통솔하던 벼슬)와 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법무장관)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채동식(蔡東軾)의 아들 채광묵(蔡光默)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의병을 일으켜 홍성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 아들 채규대(蔡奎大)와 함께 전사하였다. 채영찬(蔡永贊)은 면암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경남 하동군 화개동에서 광양 의병장 백낙구(白樂九)와 합세하여 순천을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고금도에 유배,이듬해 다시 항일전을 전개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평강채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44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3년마다 실시됨)에 16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96명,의과에 2명 등 158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평강채씨는2000년에는 21,373가구에 인구는 69,256명이었다. 평강(平康)은 강원도 북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1018년(고려 현종9)에 평강(平康:平江)으로 개칭하고 동주(東州:철원)에 예속시켰다. 1172년(명종2)에 감무(監務:중앙에서 파견한 작은현의 감독관)를 두고 김화(金化)감무를 겸하였다. 1413년(태종13)에는 현감(縣監종6품)을 두었으며,이후 변천과정을 거쳐 1952년 북한 행정구역 개편때 유진면을 판교군에,서면일부를 철원군,회양군 일부를 평강군에 편입시켜 군(郡)영역을 조정하였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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