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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명의 대제학과 청백리 7명, 8 정문(旌門)연리광김(延李光金:연안리씨(延安李氏)와 광산김씨)이라 하여양반가문중에서도 첫째로 꼽힌 문벌(門閥)<연안리씨로 표기하는 이유>연안리씨는 1947년 조선어 맞춤법 통일안을 재수정할때 한국에서는 두음법칙을 신설하여 두음에 나오는 ㄹ은 ㅇ이나(라-이)ㄴ으로(로-노) 바뀐다고 정하였다. 두음법칙이 없는 북한은 리로 쓰고 남한에서는 이로 쓰게 되었다.수천년 동안 이어져 온 성씨까지 두음법칙에 적용하는것은 잘못이라고 보며,1947년 이전의 사람들은 리로 썼고, 더구나 연안리씨는 중국계 리씨 이므로 중국에서 표기하는대로 한자표기는 李, 로마자 표기는 Li, 그리고 한글표기는 리로 쓰는것이 맞다며 리로 표기하고 있다.<편집자주>연안리씨(延安李氏)는 리무(李茂)를 시조로 받든다.시조 리무(李茂)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던 서기 660년(신라 무열왕 7년)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원군으로 신라에 들어온 중랑장(中郞將:고려때는 정5품무관)이었다.리무(李茂)는 전쟁이 끝난후 당나라에 돌아가지않고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한다.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통일신라에 기여한 그의 무공(武功)을 높이사 연안백(延安伯)으로 봉(封)하고후에 연안후(延安侯)에 가봉(加封)되었다.연안리씨 족보와 문헌에 따르면 시조 리 무(李茂)는 서기 660년( 당나라 고종. 현경 顯慶)5년에 신라 원군(援軍)의 장수(將帥)로 참전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고려때는 정5품)에 오르고, 시염성( 鹽城:황해도 연안의 고구려때 이름)을 유수(留守:지방장관으로 2품) 하였다고 한다.그후 라.당의 화합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기여한 공(功)으로 김유신(金庾信)장군의 주청(奏請,왕에게 상주하여 청함)에 의하여 문무왕(文武王)이 리무(李茂)장군에게 시염성( 鹽城:연안)을 식읍(食邑: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에게 그 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한 고을)으로 주고 높은 벼슬을 제의했으나,극구 사양하여 국빈(國賓)으로 예우(禮遇)했다고 한다.리무는 중국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 서량(西凉)을 세운 무소왕(武昭王:리호李暠)의 후손으로서 서기 660년 당 고종(高宗) 현경 5년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신라원군의 장수로 참전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공(功)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정5품)에 오르고 나당화합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백제를 정복한후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전(百濟戰)의 승세를 몰아 신라까지 정벌할 욕심으로 여러 장수들과 논의 하였는데,리무는 신라 군사가 막강하고 고구려가 건재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신라와의 연합이 당의 국익(國益)이라는 판단으로 소정방(蘇定方)을 설득하여 먼저 당라(唐羅)간에 무술시합을 해본후에 결정 하는것이 옳겠다고 건의하여, 망해정(望海亭)에서 궁술(弓術)을 시합하고 신라에 이기자 소정방(蘇定方)이 탄복하면서 "리무(李茂)장군의 건의가 없었다면 대사(大事)를 크게 낭패할뻔 하였다" 고 계획을 변경했다고 한다.그는 라당군(羅唐軍)의 위험한 대치상황을 무술시합으로 유도하는 기지(機智)를 발휘, 나당간의 화합을 굳히는 계기로 만들었으며, 신라인들 한테는 크나큰 은인(恩人)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당나라 유인원(劉仁願)과 함께 정복한 백제땅에 머물러 지키다가 서기 668년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정복하고 시조 리무는 당이 고구려 땅에 설치한 9 도호부(都護府)의 하나인 시염성을 유수(留守:고려때는 동경.서경.남경에 두어 그곳을 다스리게하는것,수도이외의 요직을 다스리던 2품외관직) 하였다.그 당시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년 12월16일,성은 무(武), 이름은 조(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가 섭정하면서 국정(國政)이 혼란하자, 리무(李茂)장군은 본국인 당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오늘날 연안리씨(延安李氏)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다.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년 12월16일,성은 무(武), 이름은 조( ),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는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로 무후(武后),무측천(武則天),측천후(則天后),측천제(則天帝), 측천여제(則天女帝), 측천여황(則天女皇) 등으로도 불린다.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호칭은 당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서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690년 당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함, 그는 빼어난 미모로 14살 때 제2대 태종의 후궁이 되었고, 태종이 죽자 비구니가 되었다가, 다시 고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그 후 황후를 쫓아내고 황후가 되어 황태자 충(忠)을 폐위시켰다.683년 고종의 건강을 핑계삼아 스스로 정무를 관장, 독재권력을 휘두르며 천후(天后)라 칭하였다.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예종(叡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황족을 탄압하였으며, 690년 혁명을 단행하여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우리나라는 사실상 고려때부터 성씨(姓氏)의 본관이 사용됨에 따라 후손들이 시조(始祖)의 식읍(食邑)이었던 염주(鹽州:시염성의 고려때 명칭)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염주리씨(鹽州李氏)로 하였다가, 충선왕때 연안(延安)으로 지명이 개칭됨으로 연안리씨(延安李氏)로 바뀌었다.그러나 신라시대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 각파(派)의 중시조를 1세조로 받들고 있다.후손들이 시조가 식읍(食邑:공신에게 내리어 그곳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던 고을)으로 하사 받은 연안(延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시조(始祖)이후 약 500여년간 나라가 바뀌고 수 많은 전쟁과 재해 등으로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묘지나 고적등이 대대로 이어온 사실을 알수없게 됨)되어 여러대(代)의 선계(先系)를 잃게 되었다.연안리씨는 기록에는 여러파가 있으나, 현재는 소부감판사공파(少府監判事公派).태사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등 4파만 전해져오며 각 파(派)간에 세대(世代)구분을 알수없어 항렬자는 따로 사용하고 있다.조선시대에 명문가(名門家)라고 하면 연리광김(延李光金:연안리씨(延安李氏)와 광산김씨光山金氏)이라 하여 양반가문(兩班家門)중에서도 첫째로 꼽힌 문벌(門閥)이다.현재도 각계 각층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또 연안리씨(延安李氏) 첨사공파(詹事公派)에서 분적(分籍)해 나갔다고 하는 안산리씨(安山李氏) 리인수(李仁守)계통이 있다.연안리씨는 고려조에 태자첨사(太子詹事:고려때 동궁과 첨사부에 딸렸던 정3품)를 지낸 리습홍(李襲洪),판소부감(判少府監:고려때 궁중의 공예품과 보물의 보관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로 소부시로 고침)에 오른 리현여(李賢呂),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통례문은 조회.의례 등의 예식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를 지낸 리지(李漬)와 대장군(大將軍:종3품 무관)에 오른 리 송(李松)등은 연안리씨의 4대 산맥이다.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 연안리씨(延安李氏)의 주류를 이룬다.연안리씨는 조선시대에 총 250명의 문과(文科:대과) 급제자와 8명의 상신(相臣:정1품 정승),8명의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과 청백리(淸白吏: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경효(敬孝).도덕.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인 관료상으로 의정부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며, 총 217명이 선발됨) 7명을 배출하여 조선시대에 연안리씨는 명문(名門)으로 큰 위세를 떨쳤다.조선후기 영조와 순조 때에는 부자(父子)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 정2품문형),3대(代)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여 더욱 명성을 날렸으며,아울러 연안리씨는 효자 리지남(李至男)부터 아들,손자,며느리 8명이 효부,열녀로 정문(旌門)을 받아 8정문(八旌門) 문중으로 유명하다.연안리씨가 자랑하는 리호민(李好閔)은 외교의 명수이다.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조좌랑(吏曺佐郞:문관의 천거를 담당하던 요직이었던 이조의 정6품 전랑)으로 명나라의 원병을 끌어들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그는 그 후 부제학(副提學:경서와 사적의 관리,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홍문관의 정3품)에 올라 대명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하는 등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했다.전란이 끝난후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이르렀으며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장관)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종1품)에 올랐다.리귀(李貴)는 학자의 가문인 연안리씨(延安李氏)가문을 명실공히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리 귀는 선조 36년에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여러벼슬을 거쳐 평산부사(平山府使:정3품 수령)로 있다가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고 사직했다.서기1623년 인조반정을 주동하여 인조를 옹립하는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종1품 재신)에 오르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에는 연평부원군 리귀(李貴)의 묘가 있다.이곳 계성산에는 조선 중기 연평부원군 리귀와 아들 연양부원군 리시백(李時白), 사우당 리시담(李時聃), 연성군 리시방(李時昉)을 제향하던 성봉서사가 함께 있었으나 현재 유허만 남아 있다.연안리씨는 벌열(閥閱:나라에 공이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벌족)의 가문으로 후손들이 현달(顯達:벼슬이나 덕망이 높아서 이름을 세상에 들날림.입신출세)하였다.연안리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250명,무과(武科:무관을 뽑기위하여 보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6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620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1명 등 89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시조 연안후(延安侯) 리무(李茂)의 묘는 대전시 유성구 갑동 갑하산 아래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 좌측 상단에 있고,"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우측 갑하산 아래에는 인조반정 1등공신 리귀(李貴)의 아들 사우당(四友堂) 리시담의 묘가 있다.또한 유성구 구암동에 위패를 모신 연원사(延源祠)가 있는데,해마다 개천절(10월 3일)에는 전국의 후손들이 운집하여 세천(歲薦)을 올리고 돈종목족(敦宗睦族)하는 정의(情誼)를 다지고 있다.리시담(李時聃,1584~1665)의 자는 현충(玄忠) 또는 자현(子玄),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아버지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리귀(李貴)이며,어머니는 참판(參判:6조의종2품차관) 장민(張旻)의 딸이다.영의정을 지낸 리시백(李時白, 1581~1660)은 그의 큰 형이며,충남 보령에서 지석이 발견된 리시방은 둘째 형이다.리시담은 1613년(광해군 5)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유생으로 있으면서 1623년의 인조반정에 아버지와 형과 함께 참여하여 공을 세우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반정 뒤 6품직을 제수받았고,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내자시는 궁중에서 쓰는 여러 식품인 국수.쌀.술.간장.기름.꿀.채소.과일 등과 직조(織造) 및 내연(內宴) 등을 맡은 관아의 6품).사헌부감찰(監察:백관을 규찰하던 정6품검사).사직서령(社稷署令: 조선때 사직단(社稷壇)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정6품) 등을 지낸 뒤 외직으로 나가, 충주목사(牧使:정3품지방장관)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63년(현종 4)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종2품)가 되었다. 동지중추부사는 수계(受繼:조상의 업적이나 유산을 물려받아 이어나가는것)로 받았다.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하여 명관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순창.능주 등지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재간을 발휘하였으며,오언시를 특히 잘 지었다고 한다.그의 묘소는 대전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내 제1장군묘역 우측 상단에 있고,묘역 하단에는 의정부 좌참찬(정2품)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찬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정1품품계)로 의정부좌의정(정1품정승)으로치사하고,봉조하에오른 송근수(1818~1902년)가 글씨를 썼으며,10대손 리병서가 전(篆)한 신도비(神道碑,숭정 신축 5월(1661년)에 세움)가 있다.최근(2010년)에는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등산로를 만들면서 길 옆에 노출되어 쉽게 찾을 수 있다.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당시는 공주 갑촌 甲村)이 리시담 선조가 받은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공신에게 왕이 내려준 논밭)인 관계로, 이 곳에서 십여세대를 거치면서 세거 하였는데,이곳이 1970년대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국립묘지로 지정되고, 1985년 국립묘지가 완공되어, 인근에 있는 연리묘역들은 현재 논산시 죽림리로 대부분 이장하였다.시조와 후손 리시담의 묘는 연안리씨종친(당시 청와대 행정처장 등)들이 당시 박정희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이장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관들의 말에 의하면 국립대전현충원은 남한에 있는 가장 좋은 명당자리 중 한곳이라고 한다. 그의 장손 리명저는 사마시에 합격을 하였으나, 대과(大科:문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음직(蔭職: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혜택으로 얻던 관직官職)으로 영동현감(縣監:종6품수령)을 지냈다.연안(延安)은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의 옛 지명으로,고구려때는 고염성(鼓鹽城),신라시대에는 해고군(海皐郡)이었다.고려때는 염주(鹽州).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다.서기 1310년(충선왕2)에 연안(延安)으로 고쳤으며,1413년(태종13)에 연안도호부가 되었고1895년(고종32)지방제도 개정으로 연안군(延安郡)이 되었다.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안군은 다시 배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 인구조사에서 연안리씨(延安李氏)는1985년에는 30,274가구 126,569명이었으며,2000년에는 총 44,799가구에 145,440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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