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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씨

    최(崔)

    문중

  • 유래

    최고집은 태조 이성계 친구 만육(晩六) 최양(崔瀁)이 장본인한국의 성씨 중에서 오랜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인 최씨(崔氏)는 많은 인재를 배출해온 전통의 명문 거족으로 선현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한 업적에서 더듬어 볼 수 있다.최씨 특유의 신념,절조,기개 등으로 "최고집" 또는 "최씨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 등의 애칭을 낳기도 했다."최고집"이라는 말은 고려말 조선초의 두문동 72현 중의 한사람인 만육(晩六:시호 충익) 최양(崔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전주최씨 군옥파의 후손인 만육 최양은 이성계의 친구이자 과거 시험 동기이며,조정의 출사도 같이 한 인물이다.이성계는 친구인 최양에게 재상반열의 벼슬자리를 주며 조선창업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이라며 이를 끝내 거절하고 진안 팔공산으로 들어가 3년동안 두문불출하였기에 이성계와 그 일파에 의해 붙여진 별명이라는 것이다.(전주최씨 참고)우리나라 최씨(崔氏)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의 6촌(斯盧六村)중에서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후에 사량부로 개편됨)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그는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 왔다고 한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기원전 57년경 유민들이 여러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서기 32년(유리왕 9년)봄에 6촌을 6부로 개정하고,알천 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李氏)를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崔氏)를(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가 정씨(鄭氏)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소씨도 소벌도리가 조상으로 되어있음),무산 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孫氏)를 취산진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鄭氏)를 금산가리촌장 지타(祗 )에게는 배씨(裵氏)를 명활산고야촌장에게는 설씨(薛氏) 성(姓)을 내렸다고기록하고 있으며,삼국유사는 6부의 촌장들이 하늘에서 내려온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손으로 신라말기의 석학(碩學)으로 대문장가이자 한문학의 종조(宗祖)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주축으로 하여,그의 선대(先代)및 후대에서 우리나라 최씨가 분파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문헌에는 우리나라 최씨는 총 387 본으로 나타나는데 시조가 분명히 확인된 것은 43본(本)이다.신라시대에 웅기한 전통의 명문 최씨(崔氏)는 신라에서 최치원,최승우,최언위 등 이른바 "신라 3최"가 천재들로 똑같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그 명성을 떨쳤으며,특히 문창후 최치원 같은 석학은 동방의 명현(名賢)으로 추앙받아 왔다.최치원은 서기 869년(경문왕9) 열두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17세에 빈공과(賓貢科:외국인에게 보이던 과거)에 급제하고 승무랑(承務郞:종8품 하(下)의 품계)으로 시어사(侍御史:고려때는 어사대(御史臺,사헌부)의 관직으로 백관을 규찰하던 품계는 종5품, 정원은 2인)와 내공봉(內供奉:조정에서 불사에 종사하는 승직,또는 백관에 대한 사무를 보던 관청,고려때 상서도성)에 올라 비범한 문재로 명성을 떨쳤다.875년 산동지방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 때 그가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 황소를 치기 위하여 지은 격문,계원필경에 실려 있음)은 절세의 명문으로 알려졌으며,그는 29세에 귀국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문신가운데 뽑힌 뛰어난 학자로 한림원의 종2품,정4품),수병부시랑(侍郞:정4품)이 되었으나, 6두품의 한계와 국정이 문란하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여러 고을의 태수(太守:신라때 군의 으뜸벼슬,위계는 중아찬에서 사지(舍知)까지)를 지냈다.한편 황소의 난(黃巢의 亂:875~884년간)은 산동성 소금밀매업자의 두령인 황소(黃巢)가 반란군의 충천대장군이 되어 호북.호남.광동 등을 장악한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의 난이다.당나라 말기에는 소금세가 높았고 소금판매업자들이 폭리를 취하자,소금밀매가 성행하게 되어 밀매를 위한 조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하남성 복주지방의 소금 밀매업자의 두령이었던 왕선지(王仙之)가 서기 874년에 난을 일으켰다. 얼마후 산동성의 원구지방 소금 밀매업자의 두령인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켜 왕선지와 합류하였다.왕선지와 황소는 하남성과 산동성 일대를 점령하고 그 기세가 높아갔다. 왕선지가 호북성 황매에서 관군에게 죽은 후 황소는 반란군의 충천대장군(衝天大將軍)으로 하남,산동 및 강서,복건,광동,광서,호남,호북으로 대이동을 전개하여 880년에는 60만 대군으로 불어난 황소의 군대는 낙양에 이어 장안 등을 함락하였고 황제 희종은 사천으로 달아났다.황소는 장안에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대제(大齊),연호를 금통(金統)이라 부르고 항복한 관리도 기용하여 통치를 굳히려고 하였다.그러나 당나라 왕조를 돕는 투르크계의 이극용(李克用)등 토벌군에게 격파되어 3년 후에는 창안으로부터 동방으로 퇴각,이듬해에 산동의 태산부근에서 자결하였다.이후 당나라는 23년간 명백만 유지했을 뿐이며, 근본적으로 당나라가 붕괴되는 계기가 되었다.최치원은 진성여왕때 시무11조(時務 11條:당장에 시급한 일)를 올려 6두품 최고벼슬인 아찬(阿粲:일길찬이라 하며 신라 17관등 중 제6등)이 되었으나, 6두품의 한계를 알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문헌과 경주최씨 대종회(慶州崔氏大宗會)의 자료에 의하면,소벌도리의 24세손 최치원의 윗대에서,개성최씨(1,487명).삭녕최씨(38,736명).동주최씨(철원최씨11,699명).전주최씨(군옥파,392,548명) 등의 본관으로 나뉘어졌으며,최치원을 1세조로 받드는 경주최씨(976,820명)에서 최치원의 첫째아들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는 함양최씨(인구345명).청주최씨(2,352명).충주최씨(13,466명).영흥최씨(436명).용강최씨(104명).수원최씨(13,156명).부안최씨(950명).강릉최씨(인구140,854명).강화최씨(14,557명),화순최씨(31,173명).통천최씨(8,144명).양천최씨(6,914명).원주최씨(1,709명).등으로 분관이 되었고,지손에서는 해주최씨(181,840명).진주최씨(7,289명).탐진최씨(68,127명).전주최씨(균파,392,548명)등으로 분관했다.최씨(崔氏)는 경주최씨가 대종(大宗)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전주최씨(인구 392,548명).해주최씨(181,840명).우봉최씨(196명)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동주(철원)최씨(11,699명)도 상당한 세력을 펼쳤다.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고려시대에 특히 그 세력을 떨쳤다.따라서 우리나라의 최씨(수성최씨는 김씨에서 분적,충주최씨는 귀화성씨)는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최씨를 원조로 하는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후예이다.최씨는 문헌에 326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125개 본관이 전한다. 2000년 조사에서는 1,913,322 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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