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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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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왕조의 기틀을 안정시킨 최지몽현존하는 문헌에는 최초의 후작(侯爵)인물낭주(朗州)는 전라남도 영암(靈岩)의 옛이름으로,통일신라때 영암군(靈岩郡)이 되었다.서기 995년(성종14)에는 낭주군으로 개칭하였다가,1096년(헌종9)에 연암군(靈岩郡)으로 복칭되었다. 낭주최씨(朗州崔氏)는 시조 이전 선대(先代)의 문헌이 실전(失傳:대대로 이어온 사적을 알수없게됨)되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최흔(崔昕)이 낭주(朗州:지금의 영암)에 토착한 사족(士族)의 후예로 신라 말에 원보(元甫:관직이 없는 노인.군인.향리.일부 양반.여진족 추장에게 주던 신분체계로 작(爵))를 역임하고 영암(靈岩)에 정착하여 가세가 크게 번창하자 후손들이 최 흔(崔昕)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낭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시조 최흔의 아들 최지몽(崔知夢:최초로 '오등봉작제' 후(侯) 관작을 받음)은 초명이 총진(聰進)으로 907년(효공왕11)영암군 동구림리(東鳩林里)에서 출생했다.어릴때부터 성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널리 통달했으며 특히 천문(天文)과 복서(卜筮팔괘.육효.오행을 살펴 과거를 알아맞히거나 앞날의 운수.길흉을 미리 판단하는일)에 정통하였다.나이 18세때 고려 태조왕건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 꿈을 점치게 했더니 최지몽은 "길조(吉兆)를 얻어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다스릴 것" 이라고 해몽하자, 태조가 기뻐하며 그 이름을 지몽(知夢)이라 고쳐 주고, 금의(錦衣)를 내려 공봉(供奉고려때 예문관.춘추관 정7품)의 관직에 임명하였다.태조때부터 60여년간 중신(重臣)으로 봉직(奉職)한 그가 987년(성종6년3월)에 죽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태자태부(太子太傅:정1품)를 증직함과 동시에 민휴(敏休)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후에 태사(太師:정1품,3공 즉 태사.태부.태보 중 서열 첫번째)를 증직하여 경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그후 후손 최안우(崔安雨)가 문과에 급제하고, 봉렬대부(奉列大夫:정4품 문관 품계)로 검교군기시소감(檢校軍器侍小監:태종 14년에 군기감을 바꾼 이름으로 융장따위를 맡아 관리하던 관청의 벼슬)을 거쳐 재상(宰相:종1품 정승)에 올랐다.그는 평소에 성품이 강직하고 성리학에 밝았으며 포은 정몽주(鄭夢周),목은 이색(李穡)등과 도의(道義)를 나누며 시(詩)를 주고 받았다.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영평(永平:전남 나주군 봉황면 만봉리) 도성산(道成山)으로 들어가 시냇가에 대나무를 심고 불사이군(不事二君: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함)의 충절을 기리면서 호(號)를 죽계(竹溪)라 칭하고 세상을 등진채 은거하였다.최안우의 아들 최운(崔雲)은 조선조에 현감(縣監:종6품수령)을 지냈으며,최운의 아들 네 명이 모두 벼슬에 올랐는데,장남 최양이 지현(知縣)에,둘째아들 최장은 현령(縣令:종5품 수령)에 올랐고, 셋째 최상(崔湘)과 넷째 최영(崔渶)은 계공랑(啓功郞:종7품문관 품계)과 찰방(察訪:각도의 역참에관한일을 맡아보던 종6품)을 각각 역임했다. 그 외 후손 최치호(崔致湖)가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정5품)를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4품부장검사)에 올라 유명했으며,최산두(崔山斗)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많은 명사(名士)를 배출시켰다.낭주최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문관을 뽑기위하여 보던 과거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대과)에 1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봅던시험)에 4명 등의 과거급제자가 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낭주최씨는1985년에는 2,764가구 11,723명,2000년에는 4,417가구 14,264명이었다.<인물탐구> 최지몽(崔知夢:907~987,동래군후(侯))고려초의 유학자 이자 관료로 태조 왕건에 의해 발탁되어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조의 기틀을 안정시키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아버지는 원보(元甫:관직이 없는 지방 향리,노인,군인 등에게 주던 훈작) 최상흔(崔相昕)이며 천성이 총명.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대광(大匡:1품 품계) 현일(玄一)에게서 유학과 역사를 배웠으며 천문과 점복(占卜)에도 능하였다.924년(태조7년) 18세의 나이로 태조에게 발탁되어 태조의 꿈에 대해 장차 삼한(三韓)을 통일하게될 징조라고 해몽하여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태조의 측근에서 보좌하며 정치적 자문에 응하였다. 혜종(惠宗) 대에는 사천대 공봉(供奉)의 직으로 혜종의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암살의 위기를 모면케 하였다.정종,광종으로부터도 후대를 받았으나 왕권강화를 적극 추구하던 광종 말년에는 미움을 받아 한동안 폄출(貶黜:폄척으로 벼슬을 깍아 내리고 물리침)되기도 하였다.980년(경종5) 내의령(內議令:고려 내의성의 장관)의 직으로 복귀하고 성종 원년 좌집정(左執政) 수내사령(守內史令:내의령이 바뀐 명칭으로 '수'는 으뜸 벼슬)의 직위와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의 호와 함께 왕의 지극한 존숭을 받았다. 성종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태자태부(太子太傅정1품)를 증직하고 시호를 민휴(敏休)라 하였다.고려 초기 지방출신의 대표적 문신 관료이며,주로 국왕의 측근에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최지몽은 980년(경종5)에 동래군후(侯)의 작위를 받았는데 후(侯)는 오등봉작제의 3번째 작위로 식읍 1천호을 받았으며,1356년(공민왕5)에는 정1품 관품으로 격상했다.현존하는 문헌에 최초의 후작(侯爵)을 받은 사람이 최지몽이라고 한다.동주최씨(東州崔氏,철원최씨)당대의 문장가 최유청"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汝當見金如石)" 명장이며 재상인 최 영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데 큰 역할을 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는데 큰 공헌신문학운동의 선구자 육당 최남선동주(東州)는 강원도 철원(鐵原)의 옛 이름으로,통일신라 경덕왕때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때 동주로 고쳤고,1018년(현종9)에 지동주사(知東州事)를 두었다가 1310년(충선왕2)에 철원부(鐵原府)가 되었다.1413년(태종13)에 도호부(都護府)가 되어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이속되었으며, 1914년 군면(郡面)폐합에 따라 경기도 삭녕군(朔寧郡)의 내문(乃門),인목(寅目),마장(馬場)의 3개면을 병합하고 동변과 송내를 합하여 동송읍으로 하였으며 1931년 서변면이 철원읍(鐵原邑)으로 승격되었다.동주최씨(東州崔氏) 시조 최준옹(崔俊邕)은 최씨 도시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으로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태사(太師:정1품)에 이르렀다.최준옹(崔俊邕)의 증손인 최석(崔奭)은 1051년(문종5)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고려의 최고 중앙정치기관인 좌습유(左拾遺:내사문하성 소속 종5품에서 정6품)를 시작으로 1075년(문종29) 형부시랑(形部侍郞:정4품 법무차관)에 올라 그해 4월 요(堯)나라에 들어가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한 뒤 돌아왔으며 전중감(殿中監:목종때 보첩,족속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지어사대사(知御史臺史:어사대의 두번째 벼슬)가 되었다.그 후 여러 요직을 두루 역임한 후 1087년(선종4) 감수국사(監修國史종1품 품계인 재신들이 겸임함)에 이르렀다.최유선(崔惟善),이정공(李靖恭)등과 함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최석(崔奭)은 나이 70세에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당대의 문장가 최유청(崔惟淸)이다.최유청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을 좋아하여 경(經)과 사(史),자(子),집(集)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예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나 "학문이 넉넉하게 된 뒤에 벼슬에 오르겠다"하며 두문불출하고 오직 글만 읽었다.주위에서 벼슬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곧 "학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하며 굳이 사양하였고 오랜 뒤에 한림원(翰林院:고려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꾸미는 일을 맡아본 관아)에 들어 갔으나인종초에 주위의 간계로 물러나 있다가 1132년(인종10)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정6품)으로 진주사(陣奏使:외교적으로 중국에 통고해야 할 일이 생긴 경우 임시로 파견한 사신)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 왔다.그 후 금나라에도 다녀왔으며 경인난(庚寅亂) 및 계사(癸巳)의 난(亂)에 문신들이 모두 해를 당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평소에 그의 덕망에 경복(敬服)하였으므로 친척들과 함께 모두 화를 면했다. 왕이 즉위하자 숙덕(宿德:오래도록 쌓은 덕망)으로 다시 재상에 올랐고, 가 집필한 저서 "이한림 집주(李翰林集註)"와 "유문사실(柳文事實)"을 왕이 보고 칭찬하여 판목(版木)에 새겨 전하였다.1161년(의종15)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올랐고 1172년(명종2) 수사공, 집현전 대학사,판예부사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였다.그는 독자로 태어났으나 슬하에 8남 2녀를 낳아 그로부터 가문이 번창하였다. 최 당은 최유청(崔惟淸)의 넷째 아들로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며 명성과 공적을 남겨 명망이 한 시대에 두터웠다.1197년(명종 27,신종 원년)에 신종의 이름을 탁(晫)으로 지어 올렸고,1199년(신종2)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문하부 정2품부총리)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하여 아우 최선(崔詵)과 장자목(張自牧).이준창(李俊昌).백광신(白光臣).현덕수(玄德守)등과 더불어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세인들은 그를 지상신선(地上神仙)이라 하였다.최당의 동생 최선(崔詵)은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자기몸을 낮추어 어진이를 예(禮)로써 대우했다고 한다.그는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재신)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장관)에 올랐다.최선의 아들 최종준(崔宗峻)과 최종자도 당대에 뛰어난 인물이었다.최종준(崔宗峻)은 1201년(신종4)문과(文科: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초에 좌승선(左承宣:왕명의 출납과궁중의 숙위,군기등을 맡아보았으며 1276년 좌승지로 바뀜,조선때는 승지로 정3품)을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왕명을 출납하고 숙위와 군기를 담당하던 관청의 종2품),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내사문하성의 정3품으로 간쟁을 담당함,좌.우기상시가 있음),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장관) 등을 역임하고,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백관을 통솔하고 정사를 도맡아 총리하던 종1품 정승)에 이르러,궤장( 杖:궤장연때 70세이상의 원로대신에게 임금이 내리는 지팡이와 안석)을 하사받았다.그는 특히 의학에도 정통하여 "신집어의촬요방(新集御醫撮要方)"을 저술했다. 최종준의 동생 최종자도 1225년(고종12) 위위경(衛尉卿내군의 종3품)으로 과거시험의 감독관(지공거)을 거쳐 1236년(고종23) 우복야(右僕射:상서도성소속 정2품부총리)에 이르렀다.최당의 손자 최린(崔璘)은 성격이 호탕하여 술과 놀이를 좋아했으며 30세에 독서를 시작한 뒤 강종 때 급제하여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차례 몽고에 사신으로 들어가 외교적으로 공을 쌓았으며 최 인의 아우 최징(崔澄)은 고려때 평장사(平章事: 중서문하성 등의 정2품 부총리)를 지냈다.최징(崔澄)의 아들 최유(崔濡)는 1090년(선종 7)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교서교감(校書校勘),중서 사인(中書舍人:종4품 벼슬)을 거쳐 1111년(예종6) 시어사(侍御史:고려때 감찰사와 어사대의 종5품)가 되었고 1128년(인종6)에 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로서 사은사(謝恩使:나라에 호의를 베풀었을때 중국에 가는 사신)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다.이후1138년(인종16)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최종자의 아들 최온은 최유청(崔惟淸)의 증손으로 고려 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1258년(고종 45) 추밀원사(樞密院事:정령의 출납과 숙위.군기를 맡았던 추밀원의 종2품)에 올라, 권신 최의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김준(金俊)등과 참여하였다.한때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기도 했으나,장군 이주인(李柱仁)의 청으로 풀려나와 1260년(원종1)에 추밀원사에 복직하고, 수사공(守司空),좌복야(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 부총리)를 거쳐,1262년(원종3)에 판공부사(判工部事:판상서공부사(判尙書工部事)라고 하며 상서공부의 으뜸벼슬로 재상급이 겸임함)를 지낸 후,수태부(守太傅:왕의 고문을 맡은 정1품명예직),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정2품부총리)로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했다.최옹(崔雍)은 최유청(崔惟淸)의 증손이며 최정소(崔貞紹)의 아들로 고려 고종때 문과에 급제하고,대관승(大官丞:내자시와 같은 관아로 대궐에서 쓰는 여러 가지 식품에 관한일을 하던 5품에서 9품)을 거쳐 전리좌랑(典理佐郞:정6품)이 되었으며,충렬왕이 태손(太孫)때 그 스승이 되었고, 1280년(충렬왕 6) 정랑(正郞:조선때는 정5품)으로서 경사교수(經史敎授국자감에서 경서(經書)나 역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던 벼슬로 충렬왕 6년(1280)에 7명을 처음으로 둠)를 겸임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292년(충렬왕13)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정령을 출납하던 종2품),문한학사(文翰學士:문필에 종사하던 선비)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인구조사에 의하면 동주최씨는1985년에는 2,518가구 10,562명,2000년에는 3,697가구 11,699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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