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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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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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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당(湖堂)에 들어 사가독서로 명성을 떨친 호남의 3걸 최산두초계 최씨(草溪崔氏)는 전주최씨(全州崔氏)에서 분파되었다.문헌과 자료에 따르면 시조 최용궁(崔龍宮)은 전주최씨 일파의 시조인 최균(崔均)의 4세손으로 서기1296년(충렬왕22)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고 충익대보조공신(忠翼戴保祚功臣)으로 판사(判事:정3품 벼슬)와 참찬(參贊:의정부 정2품)에 올랐다.이어 광록대부(光祿大夫:종2품 품계)로 세자태부(世子太傅:정1품)에 이르렀으며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시조 최용궁의 봉군지(封君地)인 초계(草溪)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상계(上系)의 기록이 실전(失傳:묘지나 고적 등이 대대로 전해 온 사실을 알 수없게 됨)되어 시조의 13세손인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를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1세조 최산두(崔山斗)는 참봉(參奉:종9품)을 지낸 최한영(崔漢榮)의 아들인데 어려서부터 용모와 기개(氣槪)가 뛰어났고 학문을 좋아하여 9세때 까마귀가 그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것을 보고 그 모습에 감동하여 지었다는 "영오시(詠烏詩)"가 있다.서기 1513년(중종8)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에 급제하고 수찬(修撰:서적을 편집.찬술하던 홍문관의 정6품)을 지내고 호당(湖堂:독서당의 별칭,장의사에서 오로지 공부만 하도록 한 유능함과 재덕을 갖춘 문신이 공부하던 연구시설)에 뽑혀 명성을 떨쳤다.그는 사간원 헌납(獻納:왕에게 간하던 일을 맡아하던 사간원의 정5품)과 지평(持平: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의정부 정4품)에 올랐고 문장에 뛰어나 윤구(尹衢).류성춘(柳成春)과 함께 호남의 3걸로 알려졌다.명문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초계(草溪) 최씨는 '전국일가찾기운동'을 전개하여 1971년 7월 20일 광주(光州)에서 대종회총회(大宗會總會)를 개최하였고 28세손 최동련(崔棟連) 최병오(崔炳吾)가 대표하여 전국을 순방하며 성의(誠意)에 찬 종친(宗親)들의 힘을 얻어 1976년 6월 25일 초계최씨 대종회 지역대의원 총회를 열었다고 한다.그때 총회에서는 초계최씨(草溪崔氏)대동보 편찬사업을 결의한후 대동보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성했으며 또한 고종때 훼철(毁撤)되었던 도원서원(道源書院)을 후손들이 중건(重建)하여 1977년 6월 29일에 위패 봉안식을 거행하였다.초계(草溪)는 경상남도 합천의 초계면 지역으로 940년(태조23)초계로 명칭을 고쳤고,1334년(충숙왕 3)에는 초계현이 군(郡)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합천군 초계면이 되었다초계최씨(草溪崔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8명 등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초계최씨는 1985년에는 총 5,158가구에 22,209명이었으며2000년에는 8,612가구에 27,213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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