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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父子)대제학(大提學:정2품 문형) 추 황,추 적추적(秋適)은 명심보감(明心寶鑑:어린이의 인격 수양을 위해 엮은 한문교양서)의편자(編者)로 명심보감 중국에도 전파우리나라 추씨(秋氏)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총 47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같은 뿌리이며 현존하는 본관은 전주,추계(양지)두 본관이다. 그러나 2000년조사에서는 강화추씨.개성추씨.경주추씨.괴산추씨.나주추씨.달성추씨.대구추씨.문천추씨.밀양추씨.수원추씨 등 29본관 54,667명이었다.추씨(秋氏)는 중국의 성씨로 송나라 고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 추엽(秋 )이 고려 인종때 가솔을 이끌고 함흥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하여 우리나라 추씨의 시조가 되었다.추씨9백년사(秋氏九百年史)에 의하면 추엽(秋 )의 아들 추황(秋簧)이 1209년(희종5) 성균시험(成均試驗)에 장원급제하고,1213년(강종3)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후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장관),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고려때는 제찬과 사명(辭命)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대제학은 종2품)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추황의 아들 추적(秋適)은 문장에 뛰어났고 민부상서(民部尙書:정3품 장관)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2품문형)에 올라 부자(父子)가 대제학에 올라 이름을 날렸으며,시랑(侍郞:고려때 정4품 차관)겸 국학교수(國學敎授:국자감의 교수,국자감은 고려때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 교육기관)에 이르렀다.추계(秋溪)는 경기도 용인시 양지(陽智)지방으로,1399년(조선 정종1)처음으로 현(縣)을 두고 양지(陽智)로 하였다. 1413년(태종13)에 현감(縣監:종6품수령)을 두고 치소를 광주 추계향(秋溪鄕)으로 옮기고 죽주(竹州)의 고안.대곡.목악.제촌 4부곡(部曲)을 병합하여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속하였다.1895년(고종32)에 군으로 승격하고 1914년 용인군(龍仁郡)에 병합하였다. 추씨(秋氏)는 송나라 고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 추엽(秋 :적부라 공 籍符羅 公),적부라는 국립도서관장)이 고려 인종때 가솔(家率)을 이끌고 함흥 연화도(蓮花島)의 서호진(西湖津)에 첫발을 들여 놓고 정착하여 우리나라 추씨(秋氏)의 시조가 되었다.그 때가 11세기 후반으로 고려 무인정권시대이기에 약 900여년의 역사이다.추엽은 남송황제 고종11년(114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국립도서관장에 해당하는 적부라(籍符羅)직을 역임하였다.적부라공 추엽은 죽음이 임박하자 손수 연화도의 섬 언덕에 영면할 자리를 준비하고 그 자리에 묻혔다.그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후 해일이 밀려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이에 촌로들의 발의로 수소 두마리를 잡아 적부라 신령에게 정성들여 제사하자 그 뒤로는 탈이 없고 농사도 잘되어 살기좋은 섬이 되었다고 한다.적부라공 추엽은 연화도의 수호신이 되었고,그의 묘는 <적부라 릉>으로 신성시 하게 되었다. 1868년(고종5) 현감(縣監:종6품)이던 남정하가 시조(始祖) 적부라공의 묘갈명을 썼다.추씨(秋氏)는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47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같은뿌리라고 한다.현존하는 관향은 전주추씨(全州秋氏),추계추씨(秋溪秋氏)두 본이다.추씨9백년사(秋氏九百年史)에 의하면 추엽(秋 )의 아들 추황(秋簧)이 1209년(희종5) 성균시험(成均試驗)에 장원급제하고,1213년(강종3) 문과(대과)에 급제한 후 예부상서(禮部尙書:정3품 장관),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고려때는 제찬과 사명(辭命)을 맡아보던 관청의 2품 문형) 등을 지냈으며,추황의 아들 추적(秋適)은 문장에 뛰어났고 민부상서(民部尙書:정3품 장관)와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등을 역임한 후 시랑(侍郞:고려때 정4품 차관)겸 국학교수(國學敎授:국자감의 교수,국자감은 고려때 유학을 가르치던 최고의 교육기관)에 이르렀다.그는 명심보감(明心寶鑑:조선때 어린이들의 인격 수양을 위해 엮은 한문교양서)의 편자(編者)로 유명하며 명심보감을 중국에 전파하였다.이부시랑(吏部侍郞:정4품 차관)을 지낸 추천일(秋天日)의 아들 추수경(秋水鏡)은 명나라에 건너가 무강자사(武康刺史)로 재임 중,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병으로 이여송의 부장(副將)이 되어 아들 추노(秋蘆),추추(秋萩)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곽산,동래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때 전주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추적(秋適)의 7세손 추익한(秋益漢)은 세종때 한성부윤(漢城府尹:종2품 서울시부시장)을 지내고 향리로 돌아가 시서(詩書)로 자락(自樂)하다가 어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어 오자 머루.다래 등을 따다 바치며 충성을 다하였다.1457년(세조3)단종이 살해되자 그도 단종을 따라 죽자 세상사람들은 당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嚴興道)와 더불어 "살아 생전 추충신(秋忠臣)이요,죽어서는 엄충신(嚴忠臣)"이라고 일컬었다.단종과 추충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사당인 영월에 있는 영모전(永慕殿)에는 그의 충성을 기려 백마를 탄 단종의 혼백에게 머루를 진상하는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한말에는 칠의사(七義士)의 한사람이었던 추치경(秋致鏡)이 충주의 장현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충절의 가풍을 이었으며 추용만(秋鏞滿)과 추용소(秋鏞召)형제는 합천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수비대를 공격하다 순국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그외 전북 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윤현보와 함께 영암,동해 등지에서 활약한 추기엽(秋琪燁)과 군자금 마련을 하다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 추교철(秋敎哲)등이 뛰어났고 독립애국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어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군자금 모금에 공헌한 추규영(秋圭暎)을 비롯하여 많은 애국열사들이 배출되었다추씨는 1930년도조선총독부 조사 당시 전국에 3,523가구가 있었으며,경남 통영.거창 등지와 경북 달성.청도.전남 완도.해남 등에 주로 거주했다.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만 439가구,인구는 4만 3552명으로 당시 274성 중 제65위였다.한편 <문헌비고>에는 추적의 본관이 추계(양지의 다른 이름)로 되어있으므로 본관을 추계추씨로 하고 있으며 양지추씨로 하는 사람도 있다.추씨(秋氏)는 조선시대에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3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추엽(秋 )의 묘는 함경남도 함흥 연화도에 있으며 3월 3일과 9월9일 향사(제사)한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추계추씨는1985년에는 5,229가구 21,421명이었으며,2000년에는 12,622가구 39,994명이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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