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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중구

창계숭절사

숭고한 절의(節義)를 기리다 창계 숭절사

계유정난 이후 벼슬을 버리고 단종복위를 도모했던 인물 박심문((朴審問 1408~1456)은
성삼문․하위지 등 육신의 참형소식을 듣고 자결로써 뜻을 같이한 인물로, 후일 그의 충절이 재조명되면서 이조참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단종과 단종를 따르던 충신 89위의 위패를 모신 숙모전에 배향된 인물이다. 더불어 단종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세조의 회유와 고문에 아랑곳 않고 절개를 지키다 죽어간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은 사육신 중의 하나,
박심문과 박팽년의 위패가 함께 모셔진 사당이 있다 해서 찾아 나선 길 숭절사에 닿는다.

사진1

사진1 -익공식 맞배집의 숭절사,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전면 1열은 집체의 원칸과 분리된 툇칸이다. 숭절사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의 처형 소식을 듣고 자결한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1408∼1456)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고 있다.

두 충신을 기리다.

숭절사는 1923년에 박심문의 후손 연황이 지역 사림들의 여론을 모아 세운 사당이다. 사육신들의 사당을 세운 곳은 그들의 고향이나, 거주지 그리고 묘소가 있는 곳에 세웠으나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사당을 세운 예가 없다하여 여러 대 후손들이 살아온 마을에 사당을 세워 조상을 추모하고자 한 것. '숭절사'라 현판을 달고 박심문과 사육신 중 이 지역과 연고를 같이 하는 박팽년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야산을 등지고 동향으로 터를 잡은 사당은 외삼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사준비와 회의를 하는 용도의 상의당이 중앙에 위치하고 그 뒤로 내삼문, 숭절사가 일적선 상에 배열되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전면 1열은 집체의 원칸과 분리된 툇칸이며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3층으로 쌓아 만들고 초석은 전후 모두 위를 둥글게 가공하여 사발을 엎어 놓은 복발(覆鉢) 모양을 하고 있다. 기둥은 민흘림이며 기둥머리에는 공포를 짜 올려 비교적 화려한 묘당의 형식을 취한 익공식 건물이다.

사진2

사진2 - 숭절사 외삼문. 본래 외삼문의 기능을 생략한 채, 삼문의 협문은 문간채를 들이고 중앙의 문을 쓴다.

  • 사진2/숭절사 외삼문. 본래 외삼문의 기능을 생략한 채, 삼문의 협문은 문간채를 들이고 중앙의 문을 쓴다.
  • 사진3/숭절사의 상의당. 가운데 2칸은 대청을 들이고 양옆 1칸씩은 온돌을 들인 협실. 우측 서향의 집은 재실이다.
  • 사진4/상의당 뒤로 내삼문이 보인다.
  • 사진5/내삼문에서 바라본 숭절사.
  • 사진6/측면에서 바라본 숭절사.
죽음으로 지킨 충절, 충신으로 거듭나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문종, 단종 등으로 이어지는 왕권의 변화에도 문신으로서 고위직에서 밀려나지 않고 왕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김종서(金宗瑞, 1390∼1453). 단종 때 정승의 반열까지 오른 그는 아쉽게도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 1년(1453), 계유정난의 첫 희생자가 된다. 그러자 박심문은 조정 출사를 그만두고 성삼문, 하위지 등과 단종 복위를 논의하며 칩거를 하게 된다.

박심문은 김종서가 함길도절도사 역임당시 6진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으로 야인들의 민심을 달래는데 힘쓴 인물로 종사관, 평안도판관 등을 지낸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며 단종 복위를 도모했던 그는 계유정난 이후 계속되는 조정출사 요구를 사양하였으나 세조 2년(1456)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가게 된다. 다녀오던 중 그는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6충신이 참형되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를 지킨다.

대역모반죄로 누명을 쓴 김종서, 박팽년은 충절이 재평가 되어 김종서는 영조 22년(1746)에 박팽년은 숙종 17년(1691)에 복관 되었다. 복관 이후 박팽년은 1758년(영조 34)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육신의 죽음에 절개를 같이한 박심문 또한 조선 말기에 이르러 그의 충절이 재조명되면서 1804(순조 4)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856(철종 7) 이조판서에 추증, 단종과 그를 따르던 충신 89위의 위패를 모신 숙모전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사진7

사진7 - 숭절사의 내삼문. 내삼문에 올라 내려다보면 상의당이 내려다 보일만큼 사당의 위치를 높게 했다. 조상을 공경하고 사당영역을 신성시하는 의미가 있다.

  • 사진7/숭절사의 내삼문. 내삼문에 올라 내려다보면 상의당이 내려다 보일만큼 사당의 위치를 높게 했다. 조상을 공경하고 사당영역을 신성시하는 의미가 있다.
  • 사진8/특면에서 바라본 숭절사와 내삼문.
  • 사진9/사당 뒤 우측에서 바라본 숭절사 전경. 숭절사, 내삼문, 상의당, 외삼문 등이 일직선상에 배열되어 있다.
문화재 정보(출처 문화재청 http://www.cha.go.kr)
  • 종목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 명칭창계숭절사 (滄溪崇節祠)
  • 분류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인물기념/ 사우
  • 수량/면적/지정(등록)일1동 / 77.2㎡, 1989.03.18
  • 소재지대전 중구 대둔산로137번길 67
  • 시대일제강점기
  • 문의대전광역시 중구 문화체육과 042-606-6284

숭절사는 1923년 세운 사당으로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박팽년(1417∼1456)과, 사육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함께 복위운동을 도모했던 박심문(?∼1456)을 모신 곳이다.

박팽년 선생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7년(1434) 문과에 급제한 후 단종 2년(1453) 우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세조 1년(1455)에는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는 중 발각되어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심문 선생 역시 조선 전기 문신으로 세종 18년(1436)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함길도 절도사인 김종서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큰 공을 세웠으며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성삼문 등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원래 정절서원(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박팽년 선생을 비롯한 여러 분의 위패를 모셨으나 고종 8년(1871)에 서원이 헐려, 지금 있는 곳에 다시 사당을 세우고 두 분을 모셔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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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관리 담당부서 : 총무국 > 문화체육과 > 축제담당 연락처 : 042-606-6292 최종수정일 : 2017-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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