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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목(睦) 문중 사천(泗川)
유래

뛰어난 인재의 산실, 정승.판서 즐비,형제 우애 돈독, 사회적 화평의 기초목씨(睦氏)는 원래 중국 조군(趙郡:직예성 대명도.고대의 조나라)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라고 한다.문헌에 전하는 본관은 사천목씨(泗川睦氏)을 비롯하여 수원목씨.남평목씨.경주목씨.태인목씨.계양목씨.옥천목씨.전주목씨 등 9본이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사천목씨(泗川睦氏) 단본이다.우리나라의 목씨(睦氏)는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를 비롯한 <백제 8대성씨>로 목씨.사씨.해씨.진씨.국씨.연씨.묘씨.협씨와 함께 <삼국사기>와 <남제서>에 기록 되어있는 전통의 명문이다.옛날 경상도 사천(泗川)지방에 형제가 살았는데, 그들의 우애가 어찌나 깊었던지 그 소문이 널리 퍼져 마침내는 임금의 귀에까지 알려져 이 소문을 듣고 확인한 뒤 그 지극한 형제애(兄弟愛)를 표창하기 위하여 <화목>을 뜻하는 「睦」자를 성씨로 내렸다고 한다.이 설화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문헌으로 우리의 고전소설에 작가.연대 미상의 한글 필사본 목시룡전(睦始龍傳)이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분량 115페이지).이 「목시룡전」은 흥부전.적성의전(翟成義傳)과 함께 우리나라에는 셋 밖에 없는 형제간의 윤리문제를 다룬 소설로서, 다른 두 소설은 형제간의 무정함과 시기질투를 줄거리로 하고 있으나,「목시룡전」만은 형제의 지극한 정의(情誼)와 사랑을 통하여 형제상목(兄弟相睦)이 개인적.가정적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적 화평의 기초를 이루는 핵심적 인륜(人倫)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우리 국문학사상 매우 독특한 위치와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김기동 「한국고전문학연구」-1887, 교학사 참조)우리나라 성씨중「형제상목설」을 내력(來歷)으로 하는 성씨는 사천목씨뿐이며 소설 「목시룡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형제상목설」이 단순한 설화가 아닌 실제적 사실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는 반증자료가 된다하겠다 <참고-사천목씨 종친회 문헌>목씨는 고려시대에 낭장(?將:정6품) 동정(同正고려때 6품 이하의 문관과 5품 이하의 무관에게 주던 정직(正職)에 준하는 명예직이며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는 경우에 주었고 정직 이름 밑에 붙여씀)을 지낸 목효기(睦孝基)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사천목씨(泗川睦氏)는 고려말부터 가문이 융성하여 비교적 희성임에도 대성(大姓)의 지위를 확보했다.기록에 의하면 사천목씨 형제들은 우애가 특별히 돈목(敦睦)해서 성을 목씨로 하였다.사천목씨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34명(35명 ),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75명 등 모두 11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사천목씨는1985년에는 1,690가구에 6,939명이었으며,2000년에는 2,492가구 8,181명이었다.사천(泗川)은 경상남도 사천시 일원으로,1018년(현종 9)에 진주의 관할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2)에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면서 독립하였다.1413년(태종 13)에는 사천현으로 개칭되었고 동성(東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곤양군이 사천에 폐합되었다.1925년 읍내면이 사천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에 읍으로 승격했으며 1995년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어 사천시가 되었다.고려때 사천목씨 선조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나를 살펴보면 두가지 사실에 크게 놀라게 된다. 하나는 목씨성을 가진 사람이 총 13인에 불과하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이들중 11인 (85%)이 관직에 출사 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관직출사는 권문세가 를 뜻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사천목씨 조상들 중에서 관직에 출사한 사람은 고려시대의 11인을 포함하여 154명이다. 700년의 세월에 비교한다면 적은 숫자인것 같으나, 세대수를 기준으로 비교한다면 이와같은 출세현황은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치이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