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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모(牟) 문중 진주(晋州)
유래

진주모씨는 모순(牟恂)이 고려조에 좌복야(左僕射:상서도성의 정2품부총리)를 지냈다고 전해온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진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편 함평, 진주, 파평, 인천, 영평, 무안 등 전해오는 본관 모두가 함평모씨(咸平牟氏)의 세거지명이라고 전한다.그에 따르면 첨정(僉正:종4품) 모세택(牟世澤)의 큰 아들 모순(牟恂)은 1417년(태종17)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여, 좌사간(左司諫:왕에게 간하던 관청인 사간원의 종3품)을 지내며 간관(諫官:사간원과 사헌부의 언관)으로서 유명했다.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정4품)등을 지냈는데,합천군수(陜川郡守:종4품수령)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재임동안 보릿고개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었고, 문을 열어 놓아도 도둑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하자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낫게 하였고, 늙어서 대변을 누자 맛을 보고 환후를 알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효행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적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 모세택(牟世澤)이 병으로 눕자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병간호를 극진히 했으며, 약을 구하러 가던중 큰 비가 쏟아져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없자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비가 그쳤고, 상을 당한 후 강물이 불어 건널 수 없게 되자, 하늘을 향해 외치자 강물이 흐름을 멈췄다고 한다.그로 인하여 절강(截江)이라는 아호(雅號)를 얻게 되었으며, 그의 효행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경남 진양군 사봉면 등건(登巾) 마을 입구에다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그의 효행을 사표로 삼게 했다.세조가 단종을 폐위 하고 왕위을 천탈한 후 절강일명 명어해동 종산일발 수양동청(截江一名 明於海東 種山一髮首陽同靑,즉 절강이라는 한 이름이 해동을 밝히고, 종산의 한 머리칼은 수양과 함께 푸르리)이라는 시(詩)을 지어보내 은근히 자신을 따르도록 회유했으나, 그는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아, 진주의 삼가현(三嘉縣)에 유배되었다. 이때 모순(牟恂)은 아들 3형제 중 모수천(牟秀阡)을 데리고 귀양 가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조선시대에 진주모씨는 1417년(태종17) 모순(牟恂)이 식년시(式年試:3년마다 보던 정기 과거)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였다.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모씨는1985년에는 29가구 129명,2000년에는 285가구 972명이었다.진주(晉州)은 경상남도에 위치한 지명으로, 1356년(공민왕 5)에 진주목으로 회복되었고,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931년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고,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