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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복(卜) 문중 면천(沔川)
유래

시조는 고려개국 4공신 복지겸복오 아들 4형제,모두 현달(顯達:입신출세)면천 은행나무,진달래꽃 두견주이야기면천(沔川)은 충청남도 당진군에 속해있던 지명으로 고려 현종때 운주(運州:홍주의 옛 지명)에 속하였다.후에 감무(監務: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었고,조선 태종때 면천군(沔川郡)으로 고쳤으나 1913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진군에 속한 면천면(沔川面)이 되었다.우리나라 복씨(卜氏)의 선계(先系)는 문헌에 의하면 당나라(서기 923∼936)의 한림학사(翰林學士신라의 관직이며 당나라 때 황제의 자문 구실을 하며 주로 조칙의 기초를 담당하였는데 이 제도를 신라에서 받아들였고 고려 시대에 들어 한림원에 속하여 문한지임(文翰之任)을 담당하였음)이자 복서학자(卜筮學士:복서는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을 불에 태워서 그것이 갈라지는 금의 모양을 보고 점을 치던 방법) 한사람이 신라 말기에 오계(五季:5 왕조에 걸쳐 문란해진 시대)의 난국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건너와면천(沔川)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복씨의 본관은 면천을 비롯하여 홍주.오천(烏川).연주(延州 :강원도 영월의 옛이름).평산.구성(龜城) 등 9본이 있는 것으로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면천복씨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에 대해서는 고증할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고 한다.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 복지겸(卜智謙)은 궁예가 세운 태봉(泰封)의 마군장수(馬軍將帥)로 있다가 궁예(弓裔)가 왕위에 즉위한지 몇 년만에 처자식을 살해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등 폭정이 심해지자 동료 기장이었던 신숭겸(평산신씨 시조), 배현경(裵玄慶:경주배씨의 시조),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기로 결심하였다.복지겸은 왕건에게 왕창근,송합홍 등 점술가의 예언을 설명하면서 거사를 권하여 왕건을 고려 태조로 옹립한 개국공신 대장군(大將軍종3품)으로 고려사(高麗史)에 <고려개국 4공신>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그 후 장군 환선길(桓宣吉)과 임춘길(林春吉) 등의 반역 음모를 적발하여 이를 평정(平定)시켰으며 벼슬이 평장사(平章事:내사문하성 등의 정2품부총리)에 이르렀고 혜성부원군( 城府院君:혜성은 신라 경덕왕 때의 면천 지명)에 봉해졌다.후손들은 복지겸(卜智謙)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면천(沔川)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며 특히 고려 때에는 10여명의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성의 정2품부총리)와 관면 잠영(冠冕 簪瓔:잠영은 높은 벼슬아치)이 끊이지 않아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일컬어졌다.서기900년경 삼국시대의 어지러운 형국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개국한 1등 공신이며, 당대 최고의 무인으로 충청남도를 대표하는 자랑스런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 ~ )의 초명은사귀(沙貴).사괴(砂 )이며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이다.태봉(泰封)의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태봉국 궁예(弓裔)가 민심을 잃자 배현경, 홍유, 신숭겸과 함께 왕건을 추대한 4기장(騎將)으로 거사 성공후 서기918년8월 1등공신으로 책봉된다. 태조 왕건은 고려왕조를 열고 개국1등공신 4명, 2등은 염상, 김락 등 7명,3등은 각지의 군웅들 포함 무려 2천명을 책봉했다. 뒤에 환선길이 난을 일으키자 태조에게 알려 진압하게 하였고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을 평정하였으며, 994년(성종 13) 태사(太師:정1품)에 추증되었다. 그 당시 면천에 중국 당나라로부터 복학사(卜學士)라 일컫는 사람이 들어왔다. 복학사(卜學士) 가문은 기존 면천지방 호족(豪族)인 박술희(朴術熙) 가문과 손을 잡고 백성들의 의기를 모아 해적을 토벌하고 부의 축적과 함께 강한 해상세력을 형성하여 덕망(德望)과 부(富), 세력(勢力)을 고루 갖춘 강력한 집안의 후손인 복지겸 장군은 자연스럽게 왕건과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와 함께 궁예(弓裔)의 주력부대 장수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고려를 개국한 이후 복지겸 장군은 도성경비 및 감찰(監察)을 맡아 왕건의 최측근 무장(武將)으로서 초기의 혼란한 시기에 모든 반역음모를 잡아내며 왕권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마군장(馬軍將) 환선길(桓宣吉)과 그의 동생 향식(香寔)은 왕건을 추대한 공으로 왕건을 보필하며 숙위(宿衛)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복지겸 장군의 지략으로 가볍게 평정하였다. 또한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 강길아차(康吉阿次), 경종(景琮)등의 반역음모를 적발하여 제거하는 등 고려 개국초(開國初) 태조 왕건의 가장 신임 받는 장수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다. 태조 원년(918년) 8월 개국 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면천지역의 토지 300경(약 180만평)을 하사 받았으며 자손대대로 세습되었다. 개국의 위업을 이룩한 장군은 고려왕조가 안정되자 고향인 면천(혜성· 城)으로 낙향하여 지역 고을들을 다스리며 마지막까지 백성과 더불어 일생을 봉사했다. 한편 효성지극한 복지겸 장군의 딸 영랑은 전장(戰場)을 누비며 국사(國事)에 전념하는 동안 쇠약해진 아버지를 위해 정성으로 백일기도를 올렸다 한다. 이때 아미산(蛾眉山) 신령의 계시를 받아 마을에 은행나무를 심고 안샘의 물을 떠서 진달래 꽃으로 두견주(杜鵑酒)를 빚어 정성으로 봉양하자 장군이 완쾌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구전(口傳)되고 있다.복지겸 장군은 사후(死後)에도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어 고려왕조와 더불어 추앙을 받아왔으며, 후손들도 주요 직위에 등용되어 고려를 위해 충성과 봉사를 다하였다.충청남도는 1995년부터 장군을 숭모(崇慕)하고 충청인의 정신문화 회복을 위해 면천지역에 진달래를 식재하고 당진의 군화(郡花)를 개나리에서 진달래로 변경하였으며, 학술세미나 및 진달래 축제 등을 통해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김진우(한국성씨연구소장)의 "한국인의 역사"에서 발췌>